<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게르하르트 로핑크
내게 교회는 그 밖의 모든 것을 주변적인 것으로 만들어서 흡수해버리는 블랙홀과 같았다. 그만큼 절대적인 세계였다. 나는 여전히 교회에 속해 있고, 심지어 그와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기왕이면 잘(?)하고 싶다. 하지만, 교회라는 기관이 반드시 필요하다거나 절대적인 구원의 길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쇠락해가는 교회를 어떻게든 지켜내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반복해왔던 말대로라면, 신은 돌들로도 자신의 자식을 삼을 테니까 말이다. 다만, 이미 수많은 교회가 존재하기 때문에, 밤마다 무수한 십자가가 LED빛을 내며 반짝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교회의 자리는 어디인가. 교회는 자신을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가.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1982, 분도출판사)는 제목에서 드러나듯 교회를 주제로 한 책이다. 가톨릭 신학자로 신약성서를 연구하는 게르하르트 로핑크는 저자 서문에서 이 책을 쓰게 된 이유로, 아돌프 폰 하르낙을 언급한다. 대표적인 자유주의 신학자로도 악명(?) 높은 하르낙은 우리에게는 칼 바르트의 선생으로도 알려져 있다. 저자 로핑크는 1899-1900년에 걸쳐 있었던 하르낙의 강연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언급하며, 그가 이끈 새로운 신학 주류는 종교적 개인주의며, 주관주의라고 말한다. 하르낙은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 나라가 온다는 것은 그것이 개인에게 온다는 데에 있다. 그것이 개인의 영혼 안에 들어와 머물고, 그것을 그 영혼이 깨닫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 다스림이다. 물론! 그러나 그것은 각자의 마음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다스림, 권능을 행사하시는 하느님 자신이다.”(<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서문에서 재인용, 12)
개인, 영혼, 마음과 같은 단어들이 하르낙의 강연에서 계속해서 강조된다. 저자 로핑크가 보기에 하르낙에게 하느님 나라는 개인의 내면, 영혼, 마음에 관한 것이고, 교회는 하느님을 내면에서 만난 개인들의 연합체일 뿐이다. 땅의 현실과 현실에서의 교회는 극단적 개인주의에 흡수되어 버린다. 즉, 저자 게르하르트 로핑크는 하르낙을 필두로 한 개신교의 종교적 개인주의, 주관주의 신학을 비판하면서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를 시작한다.
저자가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은 단순하다. 그는 저명한 성서학자답게 성서 속 예수를 중심으로 그의 선포와 이스라엘의 관계를 차분하게 추적해 나가면서 내용을 시작한다. 책은 총 4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장 안에서 소주제들을 짧은 에세이 형식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읽기에 부담이 적다. 저자는 성서주석과 비평, 그리고 다른 전문가들의 견해를 선택하고 취합하여 자신의 주장을 펼쳐나간다.
1장에서 저자는 예수의 선포(세례요한의 선포와 연속한)가 이스라엘을 향한다는 내용에 집중한다. 즉 예수의 하느님 나라 선포는 개인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를 대상으로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주 기도문’을 다루는 작은 챕터에서 ‘아버지의 거룩한 이름을 드러내소서’ 라는 청원이 에스겔의 내용에 기대고 있다고 말한다. ‘내 이름을 내가 다시 거룩하게 하리라. ... 모든 땅에서 내가 너희를 모아 너희의 땅으로 데려오리라.’(겔36:22-24, 공동번역) 주 기도문 첫 번째 청원과 언급된 에스겔 말씀과의 관계를 저자는 이렇게 풀이한다. “세말에 곳곳에서 이스라엘을 모아들이고 새로이 하여 다시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심으로써 당신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신다. ... 그리고 여기서는 하느님 이름의 성화와 하느님 백성의 재건이 확고한 관계로 밀착되어 있다.”(35) 즉, 예수는 이스라엘을 모으고자 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개인이 아니라 모임이다.
2장. 예수는 어떻게 이스라엘을 모으고 구분하려고 했을까. 열 두 제자를 세우고, 그들에게 독특한 윤리를 가르치고 지키게 함으로써다. 독특한 윤리는 산상수훈으로 대표되는데, 이 가르침이 요구하는 생활 방식은 기존 사회와 그들을 날카롭게 구분한다. 특히 가족(해체)과 (비)폭력에 관한 견해가 대표적인데, 마가복음의 한 구절을 예로 들어 보자. ‘나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토지를 버리는 사람치고 백배로 되돌려 받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도 지금 이 순간에 이미 집들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들과 자녀와 토지를 받습니다.’(막10:29-30, 공동번역) 로핑크는 이 구절에서 예수를 따르면 되돌려 받는 목록에 아버지가 없다는 특이한 사실에 주목한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새가정에는 ‘아버지들’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아버지란 너무나 가부장적 지배의 상징이다.”(85) 즉, 예수의 공동체는 기존의 사회적 질서를 전복하고, 새롭고 급진적인 윤리를 따르는 가시적 교회가 되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내면이나 영혼이 아니라 구체적이며 가시적인 윤리이다.
그렇다면 예수의 의지는 초기 공동체에 잘 전달되었을까? 1,2장에서는 복음서를 중심으로 이스라엘을 새롭게 모아 세말론 공동체를 세우려는 예수의 의지를 드러내고, 그의 뜻이 산상수훈을 통해 제자들에게 전해지는 과정을 보여준다면, 3장은 복음서 외 다른 신약성서를 통해 원시교회가 공동체에 관한 예수의 뜻을 어떻게 전승하고 지켜왔는지를 주석학적 작업을 통해 보여준다. 두 가지를 전제해야 한다. 첫째, “이스라엘의 상황이 이제부터는 예수가 하느님의 백성을 위하여 목숨을 바쳤다는 사실에 의하여 그 성격이 규정”(135)된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공동체, 즉 교회는 이제 하느님 나라만을 바탕으로 규정되지 않고 그에 더해 예수의 죽음까지를 기반으로 하는 그리스도론적 공동체가 된다는 것이다. 둘째, 세말 공동체에 나타나는 성령의 현존이다. 성령의 현존은 하느님의 나라가 현재의 일이 되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것은 예수에게서 원시교회에까지 연속되어 나타나는 치유이적을 통해서 드러난다.
“병자 치유 사실을 제쳐놓고 예수의 삶을 생각할 수는 없다. 그것은 예수의 하느님 나라 선포와 확고히 밀착되어 있다. 하느님 나라는 말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도 도래한다. 또 그것은 온 인간을 사로잡는다. 온 인간이란 결코 고립된 개체인 때라고는 없는 법이다. 그를 둘러싼 사회가 그에게 속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치유이적도 개인에 대한 행위로만 볼 수 없다. ... (부마 현상도) 시대적 조건과 관련된 현상으로서, 병든 사회에 의하여 강요되는 비인간적 조건들이 심신 병리적으로 대상화된 것이라 하겠다. 하느님 나라가 현재의 일이 되고 있다는 것은 따라서 인간의 ... (육신성 뿐 아니라) 사회성 차원 속으로 깊이 치유해 들어갈 것이 틀림없다.”(145)
원시교회는 이렇듯 예수의 죽음과 성령의 현존을 통해 새롭게 규정되는 새로운 공동체다. 예수의 선포와 죽음에 의해 새롭게 규정되고 성령의 현존을 자신의 것으로 삼은 이 공동체는, ‘사회적 차별을 지양’(151)하며, ‘서로가 함께를 실천’(169)하고, ‘지배를 단념’(195)하는 대조사회라고 저자는 말한다.
본론의 마지막인 4장에서 저자는 고대 교회 시대를 다룬다. 저자는 잘 알려진 교부들과 지금까지 전해지는 다양한 문서를 통해 고대교회 역시도 자신을 대안사회로 인식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저자 자신의 전공분야가 아니기 때문인지 1-3장에 비해서는 설득력이 조금 떨어지고 자신도 그것을 인식하는 듯하다.
끝으로 저자는 아우구스티누스를 비판하며 내용을 매듭짓는다. 저자는 자신이 논증한대로 고대교회까지 전해져온 공동체에 관한 예수의 뜻이 어디서부터 왜곡되었는지를 묻는 질문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을 비판한다. 신국과 지상국을 선명하게 나눠버린 <신국론>에서는 “애당초 순례 도상의 교회와 비그리스도교 사회가 대조될 여지가”(303) 없기 때문이다. 신플라톤주의의 세례를 받은 아우구스티누스는 가시적 교회, 순례 도상의 교회를 천상의 것으로 피안화(彼岸) 해버렸고 거기에서 개인화가 일어났다고 저자는 판단한다. 이렇게 책은 하르낙 비판으로 시작해서 아우구스티누스 비판으로 끝이 난다.
위의 내용으로 인해 저자가 뻔하고 단조로운 주장을 반복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서평을 잘못 쓴 탓이다. 저자는 세밀하고 단단한 주석을 통해 자신의 견해를 펼쳐나가고, 독자로서는 저자의 작업을 통해 예상치 못했던 정보와 새로운 관점을 얻게 되는 쏠쏠한 재미가 있다. 소개한 일부 내용보다는 훨씬 묵직하고 다양한 성서해석을 얻을 수 있다는 장점이 뚜렸하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예수는 교회 같은 것을 세우려고 하지 않았는데 바울이 망쳤다’는 식의 조롱 섞인 주장에 정면으로 맞서는 견해이기도 하다.
한편, 흔히 성서학이 보이는 한계를 저자 역시 드러내는데, 그것은 고정된 텍스트 안에서만 문제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얼마든지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성서를 독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공동체'라는 최종 목적지가 정해져 있고, 그곳으로만 독자를 끌고 가려다 보니 가끔은 무리수를 두는 듯도 하다. 저자의 방식대로라면 그 반대의견을 펼치는 것 역시 어렵지 않아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저자가 이상적인 공동체를 순진하고 단순하게 낙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성서를 통해, 예수와 그의 후예를 통해, 우리가 자신을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지를 저자는 묻는다. 그것만으로도 책장 한 자리를 차지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지 않을까.
서평23.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게르하르트 로핑크/분도/19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