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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망이 Dec 26. 2019

답 없는 물음, 함께 있음

<신도의 공동생활>, 디트리히 본회퍼

교회에 관해 품었던 환상 중 하나는 공동체였다. 사랑하고, 자기 것을 나누며, 차별하지 않으며... 와 같은 온갖 좋은 말들을 자기 것으로 삼는 공동체가 가능할 거라 믿었고, 그것이 교회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 관심사는 늘 교회였고 계속 그것을 물어오다 보니, 지금은 이름마저도 [함께.걷는.]이라는 교회의 일원으로 속해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제 교회에 관한 환상은 없다. 산산이 부숴진지 오래다. 나는 교회가 온 세상을 구원할거라고도, 혹은 자체적으로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룰 수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모이기를 중단해야 할까? 공동체는 불가능한 관념에 불과한 걸까? 그럼에도 우리는 끊임없어 공동체의 (불)가능성을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답 없는 질문을 뇌 한편에 쑤셔 놓은 채로 오랜만에 본회퍼의 『신도의 공동생활』을 읽었다. 역시나 공동체에서.

『신도의 공동생활』을 쓴 본회퍼는 국내에도 널리 알려진 신학자다. 저자는 『신도의 공동생활』, 『나를 따르라』와 같이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신앙 에세이 형식의 책을 저술한 목회자인 동시에, 교회의 사회학적 가능성을 학문적으로 다룬 『성도의 교제』, 그리스도교의 비종교화를 주제로 한 『윤리학』등을 저술한 저명한 신학자이다. 신학과는 별개로 히틀러 암살시도에 가담한 혐의로 사형까지 당한 독특한 이력과, ‘옥중서신’의 저자라는 사실이 전해주는 숭고함이 버무려진 덕분에 더 유명해진 인물이기도 하다.  

『신도의 공동생활』은 저자가 몸담았던 핑켄발데 신학교 기숙사인 ‘형제의 집’에서 머물렀던 경험을 기록한 것으로 1939년에 출간되었다. 『신도의 공동생활』은 교회의 원리나 역할, 성서적 근거 등을 다룬 책이 아니다. 책은 철저하게 그리스도교인의 공동생활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므로 교회의 사회적 역할이나 교회 안과 밖의 소통에 관심을 두고 책을 읽는다면 실망하게 될 것이다. 저자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내에서의 사귐(1장)과 예배(2,3장), 섬김(4장)과 고백(5장) 등에 관해 말한다. 본회퍼의 글은 독특하다. 그는 전통적인 신앙언어를 그대로 사용하면서도 자신만의 독특한 통찰과 표현방식으로 독자들에게 묘한 느낌을 전해준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있다는 것은 결코 자명한 사실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원수들 가운데 살았다. 마지막에는 모든 제자가 그를 떠났다. 십자가에서 악한 자와 조롱하는 자에게 둘러싸인 그는 오직 홀로였다. 그가 오신 목적은 하나님의 원수들에게 평화를 주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도 홀로 수도원적인 은둔생활을  것이 아니라, 원수들 가운데 살아야 한다. 그의 사명과 일은 바로 원수들 한가운데 있다.”(21)

본회퍼는 설명하지 않는다. 인과를 풀어내서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것은 저자가 하려는 일이 아니다. 그는 차분하면서도 직설적인 문장으로 독자를 깊이 끌어들인다. 전통적인 신앙 용어를 사용함에도 촌스럽지 않고, 독자를 잡아 세우는 이유가 아닐까.

디트리히 본회퍼(1906-1945)


1장 ‘공동체’는 책의 서론 격으로 그리스도인의 사귐에 관해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진정한 사귐에 참여할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스도인의 사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사귀는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사귐은  이상일 수도,  이하일 수도 없다.”(25)

본회퍼는 루터교회 신학자답게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물론 나는 루터교 신학을 잘 모른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사귐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이룰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본회퍼가 마치 그리스도교 바깥의 사귐을 부정하는 배타적인 주장을 하는 것처럼 보이거나, 또는 그리스도만 갖다 붙이면 모든 것이 허락되는 ‘말 없는 설교’들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읽는 이에 따라 의견이 다룰 수 있겠지만 나는 이렇게 읽는다. 그리스도 안에서(그의 길을 통해서) 참사람이 가능하다고 믿듯, 그리스도의 사귐이 우리를 참된 사귐으로 안내한다. 참사람으로 자신을 드러낸 것처럼 자신의 사귐을 통해 우리를 참 사귐으로 불러들인다.  

그 이후 본회퍼는 영적 사랑과 정신적 사랑을 대조시킨다. 영적 사랑은 그리스도안에서의 사귐이지만, 정신적 사랑은 그것을 억지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리스도 없이 사랑을 직접 다루려는 욕망이다. “정신적 사랑은 자기 자신을 자기 목적과 공적, 그리고 우상으로 만들어 경배하며 모든 것을 그 아래 복종시키려 한다.”(38) “정신적 사랑은 다른 사람을 제멋대로 이런 사람이라느니, 저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느니 말하기 일쑤다. 정신적 사랑은 타자의 삶을 자기 손아귀에 넣으려 한다.”(40)

2장 ‘함께 있는 날’은 공동예배를 구체적으로 다룬다. 말씀을 함께 읽는 일, 공동 찬양, 중보기도 등을 그것들의 의미 뿐 아니라 방식까지도 세부적으로 제시해준다. 실제로 2장은 공동예배 뿐 아니라 노동을 포함한 하루 일과를 다루는데, 흡사 오래된 수도원의 예식서와 해설서를 동시에 읽고 있는 듯도 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함께’이다.

함께 노래할  들리는 것은 교회의 음성이다. 내가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노래한다. 나는 교회의 일원으로서 교회의 노래에 참여할 따름이다. 바르게 부르는 모든 찬송은 우리의 영적 시야를 넓혀 주고,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작음 공동체를 지상의 거대한 그리스도교의  지체로 인식하도록 만든다.”(66)

위 내용은 모든 날을 함께 지내는 공동체를 바탕으로 하는데다가, ‘예배인도는 한 가정의 아버지가 하는 것이 좋다’는 둥, ‘찬양을 부를 때는 화음을 쌓아서는 안 된다’는 둥, 적용하기에는 지나치게 구체적이고 심지어 고리타분하다. 하지만 공동예배와 그 안에 포함된 내용에 관한 본회퍼의 통찰은, 설교 외에 나머지 순서는 주변 것들이 되어버린 오늘날의 예배에 여러 고민을 던져준다. 그 중에서도 시편교독은 내게 새로운 빛을 던져주었다. 우리는 시편 기도로 되돌아가야 한다. 시편은 성서 전체에서 독특한 지위를 차지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사람들의 기도다. ... 시편은 본래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서다. 그는 시편을 기도하셨고, 이제 시편은 모든 시대를 위한 그의 기도가 되었다. 기도하시는 그리스도가 여기서 우리를 만나시기 때문에 이제야 우리는 어떻게 시편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인 동시에 하나님 자신의 말씀일  있는지를 이해할  있게 되었다.”(49, 50-51)

3장 ‘홀로 있는 날’은 2장 ‘함께 있는 날’의 짝이다. 아래 문장으로 요약을 대신한다. 공동체 안에 있을 때에만 우리는 홀로 있을  있고, 또한 홀로 있을  있는 사람만이 공동체 안에 있을  있다.”(83)

4장과 5장은 ‘섬김’과 ‘고해’에 관해 말한다. 섬김에 대해서 본회퍼는 세 가지 지침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신자들이 흔히 듣던 내용과 큰 차이가 없다. 들음, 도움, 짐을 짊어지는 것인데 뻔한 듯 보이는 위 내용을 본회퍼는 한층 더 깊이 숙고하게 한다. “다른 사람은 내게 짐이 될 때에만 형제가 되고 지배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104) 5장은 ‘고해’ 즉 죄의 고백에 관해 말한다. “자신의 죄악에 홀로 남겨진 사람은 완전히 고독한 사람이다.”(115), “죄는 인간과 홀로 있으려 한다. 죄는 인간에게서 공동체를 빼앗아 간다.”(117) 그러므로 서로를 향한 구체적인 죄의 고백을 통해서만 사귐에의 돌파가 일어나게 된다. 1장에서 언급한대로 공동체와의 사귐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귐이라면, 자매/형제에게 죄가 고백될 때,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자리에 들어서며 진리와 자비가 그곳을 다스리게 될 것이다. 죄의 고백은 공동체 안에서 고백한 자를 새로운 삶으로 이끌 것이다.

솔직하게 말해, 『신도의 공동생활』은 정확하게 좋은 그만큼 갑갑하다. 현실 교회에 적용하기 어려운 지침들 때문이기도 하고, 오용되기 좋은 신앙용어들을 풀어 설명하지 않고 쓰기 때문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공동체를 지나치게 낙관하는 믿음 스며든 그의 글이 수차례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다. 그는 교회에 관해 이상주의자인걸까? 그는 순진하게도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공동체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걸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여전히 책을 권할 수 있는 이유는, 여전히 공동체에서 무언가를 하려는 내 껍질을 벗겨내기 때문이다. 원론적이면서도 답답한 그의 글이 여전히 나를 찔러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라도 멈추지 않고 (불)가능성을 끝까지 말해야 했던 게 아닐까. 본회퍼가 자신의 글을 통해 법정 앞에 세우는 것은 군중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까지나 책을 읽는 한 개인이다. 나 자신이다. 그는 아직까지는 내게 유효하다.



서평22. 신도의 공동생활/본회퍼/대한기독교서회/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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