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2호선 신대방역 아래에는 하천 하나가 흐른다. 천(川)을 따라 지상으로 늘어선 지하철 덕분에 하천은 늘 그늘져 있다. 지상 위로 오가는 전철 양 옆으로 들어오는 볕이 없다면 음습하고 눅눅하기만 할 텐데, 하천 양쪽으로 지나다니는 바람과 햇살 덕분에 쾌적한 느낌을 주는 공간이 생긴다. 점심때쯤 하천을 건너면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악 소리가 들린다. 소리를 좇아 눈을 돌리면, 음악에 맞춰 아무렇게나 몸을 흔드는 한 무리가 있다. 6-70대로 보이는 아주머니 7-9명인데, 그들은 아무런 틀도, 일정한 동작도 없이 ‘아무렇게나’ 몸을 흔든다. 춤 보다는 되는대로 몸을 흔드는 운동에 더 가까웠지만, 음악에 따라 제멋대로 몸을 움직이는 그들을 보는 게 나는 좋았고 때로는 부러웠다. 내 춤은 어디로 갔을까. 어디선가 잃어버렸을까. 아니면 누군가 빼앗아 갔을까. 시간이 흐르면 나도 춤 출 수 있게 될까.
“가요. 가서 방귀가 아닌 노래나 춤이 되게 합시다.”(338)
『그리스인 조르바』는 춤을 추는 조르바를 그린다. 제목이 자신 있게 내세우듯 소설은 ‘조르바’라는, 문학사에서 손꼽힐만한 인물을 다룬다. 흥미롭게도 조르바는 허구가 아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34세에 만난 실제 인물로, 저자는 크레타의 광산에서 뿐만 아니라 여러 삶을 조르바와 함께 한다. 카잔차키스는 숙명이었던 조르바와의 만남을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글로 그려낸다. 34세에 만난 60세 조르바를, 저자는 자신이 60세가 되던 해에 글로 되살린다. 35-6년의 시간은 저자의 기억 속 조르바를 그대로 두었을까. 예순 살 카잔차키스는 예순 살 조르바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그리스인 조르바』는 만남과 헤어짐이라는 평범한 형식을 따른다. 소설은 조르바와 ‘나’의 만남 이후 크레타 섬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사건을 다룬다. 이상주의자이면서도 현실을 도피하려는 ‘나’는 러시아에 붙잡혀 있는 그리스인들을 구출하러 가자는 친구의 제안을 거절한다. ‘나’는 친구와 헤어진 직후 한 술집에서 조르바를 만난다. 조르바는 ‘나’에게 자신을 고용하라고 제안하고, 한 눈에 그가 마음에 들어 제안을 받아들인 ‘나’는 조르바와 함께 크레타 섬으로 향한다. 크레타 섬에서 조르바는 ‘나’가 소유한 광산에서 관리자로 일하게 된다. 두 사람은 더 큰 성공을 위해 산에서 땅으로 나무를 옮기는 케이블을 설치하기로 계획하지만, 큰 실패로 끝이 난다. 물론 이게 전부는 아니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두 사람의 만남 이후 크레타 섬에서 일어난 다채로운 사건을 역동적으로 기록한다.
다소 통속적인 서사에도 소설은 재미있다. 단연코 ‘조르바’라는 인물 덕분이다. 문학사에서 그처럼 톡톡 튀는 캐릭터가 또 있을까? 실존인물이라는 배경과 카잔차키스 특유의 글쓰기가 더해진 까닭인지, 조르바는 이전에 본적이 없을 만큼 생생한 모습으로 독자들 앞에 나타난다. 저자는 조르바를 이렇게 설명한다.
“그는 살아있는 가슴과 커다랗고 푸짐한 언어를 쏟아 내는 입과 위대한 야성의 영혼을 가진 사나이, 아직 모태인 대지에서 탯줄이 떨어지지 않은 사나이였다.”(22)
“온몸의 체중을 실어 두 발로 대지를 밟고 있는 이 조르바의 겨냥이 빗나갈리 없다. 아프리카인들이 왜 뱀을 섬기는가? 뱀이 온몸을 땅에 붙이고 있어서 대지의 비밀을 더 잘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다. 뱀은 배로, 꼬리로, 그리고 머리로 대지의 비밀을 안다. 뱀은 늘 어머니 대지와 접촉하고 동거한다.”(94)
조르바는 하늘에는 무관심하면서 지면에 가까운 인간이며, 이성으로 사고하기 보다는 먹고 노동하며 춤을 추는 몸의 사람이다. 그는 현실이며 감각이고, 오늘이며 지금이다. 뫼르소처럼 보편적 원리가 아닌 감각만을 진실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데미안처럼 하늘과 땅, 선과 악의 경계를 지우려고 한다. 그는 하늘에 소망을 두고 땅을 극복하려는 수도자가 아니다. 그는 인간 이상이 되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오롯이 인간이고자 한다. 조르바는 고통을 사랑한다.
조르바는 소비하지 않는다. 자신에게서 행위를 분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는 일하려고 먹지 않으며, 쉬기 위해 일하지 않는다. 조르바는 자신이 행위 하는 그것 자체가 되려고 한다. 그것이 조르바의 춤이며 자유다.
“나는 어제 일어난 일은 생각 안 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을 자문하지도 않아요.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나는 자신에게 묻지요.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자네 뭐 하는가? 잠자고 있네. 그럼 잘 자게.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자네 뭐 하는가. 일하고 있네. 잘해 보게. 조르바, 자네 지금 이 순간에 뭐 하는가? 여자에게 키스하고 있네. 조르바, 잘해 보게, 키스할 동안 딴 일일랑 잊어버리게.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네. 자네와 그 여자밖에는. 키스나 실컷 하게.”(391)
“그는 내게 이런 말을 하고는 했다. ‘일을 어정쩡하게 하면 끝장나는 겁니다. 말도 어정쩡하게 하고 선행도 어정쩡하게 하는 것,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이 된 건 다 그 어정쩡한 것 때문입니다. 할 때는 화끈하게 하는 겁니다. 못 하나 박을 때마다 우리는 승리해 나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악마 대장보다 반거충이 악마를 더 미워하십니다!’”(333)
흔히 생각하듯 『그리스인 조르바』의 주제를 ‘자유’라고 한다면, 그것은 조르바가 보여주는 마초적 남성성에서 비롯하지 않는다. (그의 남성성을 자유로 읽는다면 명백한 오독이다. 더구나 지금이라면 조르바는 천하의 개잡놈이었을 것이다.) 조르바에게 자유는 자기 행위와 자신을 통합하는 일이다. 타인과 세계가 얽어매는 인간이기를 거부하고 오롯이 자신이 되고자 한다. 타인과 세계에게 먹혀 자신을 잃어버리기보다, 차라리 세계를 자신에게 일치시켜 자유롭고자 한다. 그는 윤리와 도덕, 국가와 종교 등 자신을 억누르는 세속적 틀에 속하려고 하지 않는다. 만약 누군가 그에게 사회적인 윤리와 규범을 들이댄다면 그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결국 당신은 내가 인간이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이겁니다.”, “인간이라니, 무슨 뜻이지요?”, “자유라는 거지!”
하지만 『그리스인 조르바』는 조르바 한 사람만을 주인공으로 다룬 소설이 아니다. 조르바의 기상천외함에만 주목한다면, 소설을 절반 밖에는 읽지 못한 셈인지도 모른다. 조르바를 빛나게 하는 건 그를 동경하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나’이기도 하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조르바를 이상으로 삼아 자유와 변화를 찾아 걸음을 내딛는 ‘나’의 모험기이다.
조르바가 대지에 밀접하다면 ‘나’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조르바가 현실적이며 감각하는 몸이라면 ‘나’는 이상적이며 관념적인 이성이다. 조르바가 당장의 쾌락을 탐닉한다면, ‘나’는 끊임없이 반성하는 사고(思考)다. 조르바가 말한다면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생각하는 나’로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고 ‘나’는 여긴다. 춤출 수 없기 때문이다. 대지와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자신을 끊임없이 비하한다.
“내 말은 종이로 만들어진 것들에 지나지 않았다. 내 말들은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어서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것이었다. 말에 어떤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그 말이 품고 있는 핏방울로 가늠될 수 있으리.”(400)
‘나’는 조르바와 그의 자유를 동경하며, 언어와 책에 갇혀 현실을 외면하는 자신을 끝없이 비하하지만, 그의 언어와 관념은 소설을 풍성하게 하고, 두 사람의 대조는 이야기를 균형 잡는다. 조르바가 완성형이라면 ‘나’는 성장한다.
하늘로 날아오를 듯 춤을 추는 조르바를 동경하던 ‘나’는, 재산을 다 날리는 큰 실패 후에 자신만의 춤을 춘다. 책을 다 태워 바보에서 벗어나라는 조르바에게, 샌님 같았던 '나'는 책을 토해 더 이상 그것에 미련이 남지 않을 때까지 책을 먹어보겠다며 자신만의 길을 고집한다. 이처럼 소설은 모험을 통해 변하고 자유를 얻는 ‘나’를 그린다. 다시 말해 『그리스인 조르바』는 한편의 성장 소설이기도 하다.
본 서평을 쓰는 중에 엉뚱하게도 『데미안』이 떠올랐다. 둘은 서로 전혀 다른 소설처럼 보인다. 배경이나 주인공의 성격, 분위기와 문체 등 두 이야기는 닮은 구석을 찾기가 더 어렵다. 다만, 『데미안』의 주인공 싱클레어와 데미안의 관계가 ‘나’와 조르바의 그것과 닮은 구석이 있다고 보면 지나치려나. 싱클레어가 선과 악으로 분리되는 이분법에 속한 인물이라면, 데미안은 선과 악, 남성과 여성, 어른과 아이의 이분법을 넘어서려는 인물이다. 정리하면, ‘나’는 알에서 깨어난 싱클레어이고, 독일에 있던 데미안은 1차 세계 대전 후에 조르바로 이름을 바꿔 그리스로 간 게 아닐까 하는 어처구니 없는 상상을 잠시 해본다. 아니면 데미안의 영향을 받아 변해버린 싱클레어의 거친 성인 버전이 조르바이거나.
소설은 재미 뿐 아니라 다채로운 주제를 제공한다. 자유 뿐 아니라 국가, 가족, 윤리, 종교, 부조리 등 여러 주제를 생각하게 한다. 밑줄을 그을 만한 좋은 문장도 많다. 조르바의 말은 재치로 가득하고 ‘나’스스로가 시덥지 않아하는 관념은 깊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을 꼽자면, 여성혐오의 교본으로 삼아도 충분할 만큼, 그 정도가 심하다. 시대적인 한계로 웃어넘기기에는 여성혐오의 A~Z가 소설 전반에 새겨져 있고, 조르바의 마초성을 부각하기 위한 장치로만 보기에는 그의 자유 자체가 여성을 인간 이하로 여기는 구조적 인식을 기반으로 한다. 그런 인식에서 비롯된 자유를 나는 원하지 않는다. 2차 세계대전이라는 상황 속에 놓인 소설에, 오늘에야 민감해진 여성혐오 문제를 기준 삼는 일에 눈살을 찌푸리는 이들이 있겠지만, 남성 중심이었던 작가들이 오랜 동안 생산해 온 여성에 대한 수많은 인식을 대표하는 소설이기에 굳이 한마디를 덧붙이게 되었다. 최근 한 시인이 그랬다더라. ‘문학의 이름을 빌어 자행되는 모든 위계와 차별, 그리고 폭력에 반대한다’고. 나도 그렇다.
끝으로 조르바가 ‘나’에게 던지는 한 마디를 나에게도 다시 던지는 것 같아, 뼈아픈 마음으로 인용한다. 새겨 들을지는 모르겠다.
“내 생각을 말씀드리겠는데, 부디 화는 내지 마시오. 당신 책을 한 무더기 쌓아 놓고 불이나 확 싸질러 버리쇼. 그러고 나면 누가 압니까. 당신이 바보를 면할지. 당신은 괜찮은 사람이니까.”(139)
서평21. 그리스인 조르바/니코스 카잔차키스/열린책들/19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