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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망이 Dec 29. 2019

매임을 풀어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누가복음 13장 10-17절

좋으신 하나님의 평화가 여기에 계신 모든 분들의 삶과, 멀리 흩어져 함께 걷고 있는 이들의 삶에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빕니다.

언젠가부터 쓰지 않는 말들이 있습니다. 저를 몸서리치게 만드는 단어들인데요. 예를 들면 충성, 봉사, 헌신, 순종 같은 단어들이 그렇습니다. 얼핏 생각하기에 군대와 교회 내에서 자주 쓰는 용어 같은데요. 교회에서 그 말들을 쓸 때 그 대상은 주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만 그 단어들을 써 왔다면, 혹은 그 단어들을 섬세하게 쓰려고 애썼다면 지금처럼 그 단어들에 반감을 느끼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언젠가 제가 다른 교단에서 전도사 고시를 봤을 때, 면접관이었던 한 장로님이 제게 ‘무슨 일이 있어도 담임 목사님에게 충성 봉사하겠느냐’는 질문을 한 기억이 있습니다. 뭐라고 답했는지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충성, 봉사, 헌신, 순종과 같은 단어들을 교회처럼 자유자재로 쓰는 집단이 또 있을까요. 많은 경우 그 말들은 교회 내 일꾼을 필요로 할 때 주로 쓰입니다. 각종 주일학교 교사, 성가대, 주방봉사, 임원 등을 세울 때마다 소환되는 단어들입니다. 사람이 모였으니 일손이 필요한 거야 당연하겠지만, 하나님을 거기에 갖다 붙이는 일에 저는 동의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렇게 하면 할수록, 충성 봉사하지 않은 사람은 비난의 대상이 되니까요.

분명히 기꺼운 마음으로, 즐겁게 참여했던 사람도 있었을 테지만, 그 반면에 교사니, 성가대니 하는 말만 들어도 끔찍해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집트의 노예생활을 예로 들 정도니까요. 저는 전자였습니다. 교회 일이라면 누구보다 재밌게, 또 열심히 했습니다. 요직에 앉혀주지 않아서 삐질 정도였죠. 중요한 자리에 앉아보고 싶었거든요. 지금 생각해보면 왜 안 시켜줬는지 충분히 납득이 됩니다.  

그렇게 교회 일이라는 게 재미있고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좋은 건 줄만 알았는데, 청년부 전도사를 하면서 그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때로는 청년들을 놓고 쟁탈전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청년부 예배가 더 중요한지, 교육부서 교사 회의가 더 중요한지, 아니면 오후 예배 찬양팀이 더 중요한지를 놓고 다투기도 했으니까요. 그렇게 교회가 청년들을 소모품으로 여긴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청년들이 미래다’라는 외침은 달콤하기만 했지 속은 텅 빈 구호에 불과했고, 헌신과 순종을 빌미로 교회 일에 청년들을 채워 넣는 데만 급급했습니다. 교회를 위한 봉사라고는 하지만, 그것을 요구받는 당사자가 얼마나 지쳐있는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얼마나 바쁜지, 왜 봉사를 하기 싫어하는지 등에는 무관심했습니다. ‘힘들다’고 말하면 예수 안에 있지 않아서 그렇다고, 예배 안에서 해결하자는 답답한 대답을 돌려주곤 했습니다.   

그러고 나니 청년만 그렇게 여겨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도 알게 됐습니다. 현실에서 교회는 숫자를 뜻했고, 우리 모두가 그것을 위한 수단이었죠. 담임목사는 부교역자를, 부교역자들은 교사들을, 장로들은 담임목사를, 서로가 서로를 도구 삼았습니다. 그렇게 서로를 억압하는 겁니다.  

이렇듯 삐딱한 시선이 저를 사로잡았을 떠오른 첫 질문이 ‘교회 뭘까?’였습니다. 당시에 제 첫 번째 관심은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거창한 물음이었습니다. 지금도 묻고 있는 중입니다. 교회 뭘까요.  

질문을 던지던 중, 복음서 한 구절이 거창한 답의 일부를 채워 주었습니다. 예수님 말씀인데요. 읽어보겠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

엄청 센 발언입니다. 말 그대로 불온하죠. 어떤 복음서는 이 말씀 때문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기로 작정했다고 말합니다. 감히 안식일 법을 건드렸으니까요. 예수님은 당시의 안식일은 사람을 억압한다고, 그래서 안식일의 참뜻이 드러나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안식일 법을 다시 읽고, 그것을 뒤집어엎으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역시 그렇습니다.




본문은 흔하디 흔한 치유 이야기입니다. 언제나처럼 예수님은 치유하고 누군가는 낫습니다. 늘 보던 패턴이죠. 익숙하게 들어왔듯 본문은 예수님의 치유 능력을 드높이는 걸까요. 그게 전부는 아닐 겁니다. 치유와 나음 후에 한바탕 설전이 일어난 걸 보면, 또 문제가 생긴 겁니다. 그렇다면 무슨 내용일까요.  

때는 안식일이고 장소는 회당입니다. 회당은 지역 사람들이 모여 말씀을 듣고 나누던 장소입니다. 우리가 주일에 그렇듯, 그들도 안식일에 말씀을 듣고 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불청객이 나타납니다. 등이 굽은 여인입니다. 성경은 그를 18년 동안이나 허리가 굽은 채로 살아온 여인이라고 묘사합니다. 그 뒤는 뻔하죠. 예수님은 그녀에게 손을 대어 치유하고, 그녀는 나음을 얻습니다. 18년 동안이나 굽어 있었던 허리를 펴게 된 겁니다.   

따뜻하고 좋은 이야기인데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그 모습을 보던 회당장이 부들부들 떨고 있었던 겁니다. 본문은 그가 분개했다고 말합니다. 그는 왜 그렇게 화가 났을까요. 무엇이 그를 그렇게까지 화나게 했을까요. 분을 삭이지 못한 그는 이를 꽉 물고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14절의 그가 말한 부분만 읽겠습니다.       

일을 해야  날이 엿새가 있으니, 엿새 가운데서 어느 날에든지 와서, 고침을 받으시오. 그러나 안식일에는 그렇게 하지 마시오.”

맞는 말 아닌가요. 틀린 말이 하나도 없습니다. 화난 중에도 군더더기 없이 잘 말한 겁니다. 우리가 그들처럼 안식일을 지키는 건 아니지만 굳이 사회적 합의를 어겨서 문제를 일으킬 필요는 없습니다. 다른 여섯 날이 있으니까요. 18년을 그렇게 살았는데 하루 더 참는다고 해서 탈 나는 거 아닐 테니 말입니다. 하루 더 있다가 고쳐주면 오죽 좋습니까. 왜 하필 안식일이었을까요. 본문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걸까요.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15절과 16절에 있는 말씀 부분만 읽겠습니다.

너희 위선자들아, 너희는 저마다 안식일에도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끌고 나가서 물을 먹이지 않느냐?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딸인  여자가 열여덟  동안이나 사탄에게 매여 있었으니, 안식일에라도  매임을 풀어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우선은 ‘매임을 풀어주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되물음이 저를 매료했습니다. 속박을 푸는 일, 그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라고 저는 믿기 때문입니다. 저 되물음을 중심으로 본문을 풀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제목을 정했습니다. 한편 질문도 생겼습니다. 두 가지인데요. 하나는 ‘등이 굽었다’는 표현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지가 궁금했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은 왜 하필 그 여성을 소와 나귀에 비유했는지가 의문이었습니다. 제아무리 좋은 의도라도 여성을 가축과 비교한 꼴이 되니까요. 왜 그랬을까요. 그냥 아무 동물이나 막 갖다 쓴 걸까요. 그러다가 궁금한 게 또 생겼는데요. 왜 소와 나귀는 풀어다가 물을 먹였을까요. 외양간에서 풀어내서 굳이 물 먹이는 것도 일 같은데 말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렇게 질문하던 중에 떠오른 내용이 있습니다. 십계명입니다. 신명기 5장 1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14그러나 이렛날은  너희 하나님의 안식일이니, 너희는 어떤 일도 해서는  된다. 너나, 너의 아들이나 딸이나, 너희의 남종이나 여종뿐만 아니라, 너희의 소나 나귀나,  밖에 모든 집짐승이나, 너희의 집안에 머무르는 식객이라도, 일을 해서는  된다. 너희의 남종이나 여종도 너와 똑같이 쉬게 하여야 한다.”   

방금 읽은 내용은 십계명입니다. 그중에서도 안식일 법이죠. 하나님에 관한 십계명 중 가장 길고, 구체적으로 지킬 수 있는 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인지 십계명 중 가장 자주 언급되는 단어가 안식일이기도 합니다. 이 법에 소와 나귀가 나옵니다. ‘소와 나귀를 쉬게 하라’는 명령이 안식일 법에 포함된 겁니다. 소와 나귀는 집안일을 하는 ‘가축’(家畜)입니다. 그러니 안식일에는 밭일 안 시키고 굳이 풀어다가 물 먹이고 쉬게 한 겁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소와 나귀를 이 사건에 가져다 쓴 이유는 그들이 집안일을 하는 ‘가축’(家畜)이기 때문입니다. 또다시 말하면, 여성의 등이 굽었다는 표현은 다른 특별한 뜻을 지닌 게 아닙니다. 소와 나귀보다도 더한 노동으로 쉼을 빼앗기고 혹사당한 여성들의 삶을 가리키는 표현일 겁니다. 안식일 법에서 배제된 채 집안일에 몸을 빼앗긴 그들의 삶을 등이 굽었다고 말하는 겁니다. 그들 쉬게 하라는 겁니다. 함께 아브라함의 딸이니 허리를 펴게 하고 안식을 누리게 하라는 겁니다.

안식일 법이 가축조차도 포함하는 모든 생명을 쉬게 하는 거라면, 허리가 굽도록 노동하는 사람 없도록 하라는 겁니다. 너희 놈들이 안식일 법에서 빼버린 여성이 쉼을 얻도록 하라는 겁니다. 안식에서 빠져 있는 모든 생명 쉬게 하라는 겁니다. 그게 안식일인 겁니다. 평생을 굽어있던 등과 허리를 곧게 펴도록 하는 게 안식일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회당장의 주장처럼 다른 6일이 아니라, 반드시 안식일 말씀이 나눠지던 그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습니다. 오랜 시간 안식에서 배제되어 허리를 펴지 못하는 누군가에 관한 이야기이니까요. 안식일을 지킨다며 누군가의 안식을 빼앗고 또는 외면하는 우리에 관한 이야기이니까요. 그야말로 그날, 그리고 오늘 선언되어야 할 복음인 겁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축귀나 치유로 간단히 읽어 넘겨서는 결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 아닙니다. 복음의 능력을 낮추고 싶어서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읽기가 복음을 가린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 읽기는 왜 등이 굽었는지를, 왜 하필 여성인지를 전혀 관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분명 이 둘 다 중요합니다.  

본문을 읽으면서 먼저 우리는 등이 굽을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았던 여성을 생각해야 합니다. 어디론가 건너뛰기 전에 그게 먼저입니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수많은 이야기가 그렇습니다. 사마리아 여인과 간음한 여인이 그렇습니다. 생리혈이 멈추지 않는 여인과 두 렙돈이 재산 전부이던 여인이 그렇습니다. 뜻하지 않게 예수님을 임신한 마리아가 그렇고, 유일하게 죽음을 준비하며 향유를 부은 여인 마리아가 그렇고, 가장 먼저 빈 무덤을 목격한 마리아가 그렇습니다. 그거 읽어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무엇인지 조금이나마 알 수 있는 겁니다.

대부분 아시다시피 저는 여성주의라는 주제를 꾸준하게 공부하고 있습니다만, 예수님이 저 같은 시선을 가졌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눈 크게 뜨고 보셨던 거겠죠. 감사하게도 누구도 관심하지 않았던 삶을 아셨던 걸 겁니다. 당시에 지워지고 배제된 사람들의 인생을 위로한 그 자리에 늘 여성들이 있었던 걸 겁니다. 어린이들과 병에 걸린 사람들, 정상 아닌 사람들, 겨자씨 같고 가라지 같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부 부정하다 평가받던 사람들입니다. 거기에 손을 대어 고치고 안고 하나님 나라는 이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그러니 믿기로 작정한 우리도 그의 시선을 따라 읽는 게 우선입니다. 그거 다 제끼고 ‘예수님 짱’ 이러는 게 정답 아니라는 겁니다.

‘등이 굽은 여인’을 말씀하시면 치유로 먼저 갈게 아니라, 오늘도 그렇지 않은지를 생각해보는 게 먼접니다. 오늘은 정말 괜찮은지 살펴보는 겁니다. 육아는 어떤지, 경력단절은 어떤지, 데이트 폭력은 어떤지, 편견 섞인 말들은 어떤지, 여전히 부들부들하는 회당장은 없는지 생각해 보는 겁니다. 그게 누군가의 허리를 펴지 못하게 하는 건 아닌지 생각해 보는 겁니다. 그다음에 또 고민하는 겁니다. 쉼을 빼앗기고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이가 누구인지, 혹 우리 중에는 없는지, 혹 내가 그것을 빼앗고 있지는 않은지 말입니다. 오늘 지워진 채로 존재를 부정당하고, 등이 굽어 있는지를 보고 그곳을 향해 가는 겁니다. 혹 우리 중 있다면 부끄러워야 하고 뜯어고쳐야 하는 겁니다. 그게 오늘 일어나야 할 일입니다.




16절에서 예수님은 그 여인이 사탄에게 매여 있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사탄인가요. 허리를 펴지 못하게 만드는 존재일 겁니다. 사회구조가 악일 수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디딤돌 삼지 않으면 안전을 확보할 수 없다고 믿게 만드는 구조가 악인지도 모릅니다. 낮은 디딤돌일수록 허리를 펼 수 없을 테니까요. 그런 세계에서 안식을 외치는 복음은 무엇일까요? 또 교회는요?

때로 사탄은 교회일지도, 혹은 누군가에는 주일일지도, 어쩌면 우리가 만들어낸 하나님일지도 모릅니다. 안식이 선언되어야 할 때와 장소에서 우리가 누군가를 억압하고 있다면 말입니다. 신의 뜻을 빌미로 누군가의 허리를 짓누르고 있다면 말입니다. 저는 그거 안 하려고 여기 있는 건데 오늘 우리는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사탄은 자신이 그것인지 모를 수 있습니다. 말씀을 잃고 해석했을 회당장이 은폐된 세계를 몰랐던 것처럼 말입니다. 말씀과 율법과 안식을 이유로, 안식 없음을 방치했으니 말입니다. 눌린 허리를 18년 동안이나 몰랐으니 말입니다. 때로 모름은 악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위선자라는 비난을 받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안식을 선언하는 일이고, 굽었던 허리를 펴게 하는 일입니다.



2019년 8월 25일 [함께. 걷는. 교회.] 설교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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