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장 13-23절
어린 생명으로 오신 주님의 평화가 여기 계신 모든 분들과 멀리 흩어져 함께 걷고 있는 모든 분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빕니다.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드라마를 보다가 충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내용에 관한 정보는 하나도 없이 ‘재밌다’는 허다한 소문만 듣다가 결국 보게 된 드라마인데, 충격의 연속이었습니다. 드라마를 처음 보면 누가 주인공인지를 금방 알게 되잖아요. 그래서 ‘아, 저 사람이 주인공인가 보군’ 하면서 드라마를 보는데, 초반부터 그 주인공이 위기에 처합니다. ‘어떻게든 살겠지 뭐’ 하면서 드라마를 보는데, 목이 댕강 잘려 죽어버리는 겁니다. 그럼 그제야 ‘뭐지 이거’ 싶어 집니다. 하지만 저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제 초반이니까요. ‘와- 뒤통수 제대로 맞았네.’ 하면서 주인공에 적합한 다른 인물을 찾습니다. 드라마가 워낙에 대서사시인 탓에 두 세 사람을 주인공 후보에 다시 넣습니다. 하지만 드라마는 제 생각 따위 무참하게 짓밟습니다. 제가 생각한 후보들은 위기가 닥치지 않았는데도, 느닷없이 죽임을 당합니다. 별 준비 없이 보던 저는 또 뒤통수를 어루만지게 됩니다. 그때부터 제 안에서는 갈등이 일어납니다. 또 다른 주인공을 찾을지, 아니면 이 드라마는 주인공 같은 건 취급하지 않는다고 결정을 내릴지를 은근히 고민하는 겁니다. ‘별 고민을 다 한다’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그만큼 제가 주인공이 이끄는 서사에 익숙해져 있다는 뜻일 겁니다. 주인공은 중간에 죽으면 안 되는 겁니다. 다른 사람 다 죽더라도 말이죠.
저뿐만 그런 건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주인공 서사에 익숙합니다. 주인공이 나쁜 놈들을 학살하다시피 할 때는 통쾌함마저 느끼다가도, 드라마나 영화 속 주인공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을 때는 자기 일 마냥 안타까워하거나 슬퍼하도록 우리는 길들여져 왔습니다. 나쁜 놈이라고 해서 삶이 무가치한 건 아닐 텐데 말이죠. 넘겨짚자면, 주인공에 대한 관습적인 감정이입은 ‘나만 아니면 된다.’는 의식과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는 건 아닐까요. 화면 속 나쁜 놈들 쯤 무더기로 죽어도 아무렇지 않은 감정은, 나 외에 다른 타인을 조연쯤으로 생각하는 습관적인 사고방식과 맞물려 있는 건 아닐까요. 만약 그런 사고방식이 신앙과 만난다면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될까요. 오늘 본문을 이런 시선으로 본다면 본문에서 우리는 어떤 말씀을 들을 수 있을까요.
오늘은 성탄절 후 첫째 주일입니다. 흔히들 25일 하루만을 성탄절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는 주현절 전까지, 즉 25일 이후 약 12일 정도를 성탄 절기 보내왔습니다. 이브나 25일 만을 시끌벅적하게 보내고 마는 게 아니라, 충분한 시간 동안 여린 생명으로 나신 아기 예수를 충분히 곱씹고 묵상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여전히 성탄 절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본문은 여전히 아기 예수에 관한 사건을 들려줍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성탄의 주인공은 아기 예수니까요. 다만 분위기가 좀 다릅니다. 성탄절까지만 해도 환영과 축하로 가득한 내용이었는데, 오늘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인공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겁니다.
본문은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만, 당시 예수님이 태어난 유대 지방은 헤롯이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로마에게 통치를 위탁받은 왕이었죠. 어느 날 그는 한 가지 소문을 듣습니다. 동쪽 어딘가에 온 이방 점술가들(몇 명인지는 모릅니다.)이 말하기를, 점괘를 보니 베들레헴에 이스라엘을 위한 왕이 태어났다는 겁니다. 제가 어릴 때는 이 동방박사들이 제일 답답했습니다. 그걸 왜 헤롯왕에게 말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으니까요.
헤롯은 이제 막 태어난 아기를 찾아 죽이려고 하지만 실패합니다. 그 아기가 어디에서 났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역시 흥미롭습니다. 성 밖 목자들과 이방 점술가들은 예수가 어디에 있는지 알았지만, 왕은 알 수 없었으니까요. 예수는 어디에서 태어날까요. 그곳을 누가 알까요. 성문 밖에서 밤을 지새우던 목자들입니다. 외국에서 온 점성가들입니다. 적어도 왕은 아닙니다.
아기 예수를 죽이려다 실패한 헤롯은 광기에 사로잡혔다고 밖에 할 수 없는 결정을 내립니다. 이제 태어난 아기 예수가 어디 있는지 모를 바에야, 비슷한 또래 아기들을 전부 죽이기로 작정합니다. 끔찍하다는 말로는 부족한 학살극이 벌어지게 된 겁니다. 여기까지가 본문의 배경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아기 예수와 가족들은 천사들의 도움을 받아 죽음을 모면합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드라마가 늘 그렇듯 위기에 처한 주인공은 도움을 받아 구원을 얻습니다. 요셉과 마리아, 그리고 아기 예수는 헤롯의 광기 어린 칼날을 피해 이집트로 피난을 떠납니다. 난민이 된 거죠. 난민이기는 하지만 아기 예수는 목숨을 건집니다. 주인공은 살았습니다. 그들은 거기서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세월이 흘러 헤롯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들은 다시 갈릴리로 향합니다.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하지만 주인공을 향한 모든 위협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유대 지방은 여전히 헤롯 가문이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이전 헤롯의 아들인, 헤롯 아켈라오가 대를 이어 유대 지방을 통치했으니까요. 결국 예수의 가족은, 유대 베들레헴이 아니라, 갈릴리 나사렛으로 발걸음을 돌립니다. 그게 바로 ‘나사렛 사람’이라는 별명이 예수를 따라다닌 이유라고 본문은 해설까지 덧붙입니다. 여기까지가 본문 내용입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어떤 말씀을 들을 수 있을까요.
본문은 무엇을 말하려는 걸까요. 하나님의 은혜로 아기 예수가 죽음을 당하지 않고 살았다는 교훈일까요? 저는 그런 거 신앙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딴 걸 은혜라고, 하나님의 도움이라고 말하는 신앙을 저는 거부합니다.
혹시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예수가 어쩌다가 갈릴리에 살게 되었는지를, 나사렛 예수란 별명을 어떻게 얻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려는 이야기는 아닐까요?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예언에 따르면 메시아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야 하는데, 예수는 갈릴리 출신이라는 소문이 돌았으니까요. 메시아로써 예수님의 정통성을 확보하려면 예수님이 베들레헴 태생이라는 걸 어떻게든 말해야 했을 겁니다. 유대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문제였으니까요.
더구나, 이 이야기는 출애굽 사건과도 닮아 있습니다. 모세를 필두로 노예들이 이집트를 탈출하기 전 이집트의 장남들이 모두 죽은 사건을 본문은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본문은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성경이 예언한 대로 베들레헴에서 태생인 데다가, 이스라엘의 구원하면 떠올리는 모세 이기도하다는 겁니다. 당시 유대교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와 같은 정통성 문제가,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심각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아닙니다. 저는 예수가 베들레헴 태생이라서 그를 믿는 게 아닙니다. 저한테 예수의 혈통 같은 건 눈곱만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막말로 저는 예수님이 베들레헴 태생 아니라고 해도 믿을 겁니다. 저한테 중요한 건 출신이나 혈통이 아니니까요. 또 저는 유대인이 아니라 그런지, 예수님을 모세에게 연결하려는 시도도 제게는 별로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지요. 언젠가부터 본문을 읽을 때마다 제게는 딱 한 가지 문제만 눈에 들어옵니다. 바로 영·유아 학살입니다.
주인공 시점에서 조금만 벗어나 보면, 이 학살사건은 도무지 넘기 어려운 걸림돌입니다. 예수의 관한 어떤 이해가, 이 학살을 못 본체 하게 놔둘 수 있을까요. 예수에 관한 어떤 예언이나 설명이 저 참혹한 살해를 필요한 디딤돌로 만들 수 있을까요. 주인공이 아닌 삶은 이렇듯 무감각하게 지워져도 괜찮은 걸까요. 이 사건은 우리를 멈춰 세울 뿐만 아니라 붙잡습니다. 붙잡힌 우리는 뭐라고 변명할 수 있을까요.
앞에 있는 그림을 보겠습니다. 그림은 우리가 지금까지 잘 보지 않았던 장면에 주목합니다. 아이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여인, 작은 아이를 바닥에 내리치려는 남성, 이미 내동댕이쳐져 축 늘어진 작은 몸들이 그림 속에 있습니다.
한 해를 마감하는 마지막 주일 성찬 식탁에 이런 그림을 두는 게 적절할까 하는 고민을 잠시 했습니다만 그 생각이 들자마자 이 그림을 같이 보기로 마음을 정했습니다. 예배는 좋은 것만을 드러내는 시간이 아니니까요. 삶의 진실을 마주하는 시간이기도 하니까요.
피난하는 아기 예수에게 집중한 그림도 여럿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저를 유혹했던 건 램브란트의 그림이었는데요. 헤롯을 피해 피난하는 아기 예수를 앉은 체 쉬고 있는 요셉과 마리아를 멀리서 그린 그림이었습니다. 평화로워 보이는 그림입니다. 보기엔 그게 훨씬 더 좋았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 그림이 맞겠다 싶었습니다. 우리보다 먼저 이 장면에 붙잡힌 사람이 있었다는 뜻이니까요.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체 본문은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요.
가만 생각해보면 참 이상한 흐름입니다. 그 앞까지만 해도 이야기는 기대와 희망으로 그득합니다. 꿈에 천사들이 나타나서 예언을 하고, 이방 사람들은 별을 보고 아기 예수를 경배하려고 선물을 들고 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우리가 아는 성탄은 온통 아름다운 노래와 축복으로 가득합니다. 온 세상의 기쁨과 노래와 축복이 아기를 향하는 그런 이야기가 성탄입니다.
그런데 페이지를 조금만 더 넘기면 그런 따뜻함은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기쁨은커녕 온 세상이 통곡으로 가득합니다. 1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18"라마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울부짖으며, 크게 슬피 우는 소리다.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우는데, 자식들이 없어졌으므로, 위로를 받으려 하지 않았다."
축복은커녕 저주로 가득한 세상이 도래합니다. 본문은 여전히 아기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분명히 성탄이 주제인데, 우리가 알던 기쁨으로 가득한 세상은 몽상처럼 흩어집니다. 위로조차 건넬 수 없는, 남이 건네는 위로 따위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세상이 나타납니다. 어쩌면 우리는 성탄을 절반만 알았던 건지도 모릅니다. 아기 예수라는 작은 선에, 헤롯이라는 거대 악이 맞섭니다. 연약한 생명을 압도적인 죽음이 가로막습니다. 가느다란 한 줄기 기쁨을 통곡이 에워싼 꼴입니다. 어쩌자는 걸까요.
저는 이 이야기가 거짓이면 좋겠습니다. 참혹하기 이를 데 없는 유아 살해 같은 거 역사적인 사실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그저 ‘예수는 진짜 메시아’라고 선언하기 위해 마태가 표현한 방식이면 좋겠습니다. 예수는 베들레헴에 태어난 메시아라고, 그는 모세보다도 높은 분이라고 주장하는 문학적 장치라면 좋겠습니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는 진실일 겁니다. 헤롯은 늘 있으니까요. 주인공 자리를 빼앗길까 봐 어쩌지 못하는 헤롯은 항상 가까이에 있습니다. 주인공이라는 광기에 사로잡힌 헤롯은 곳곳에 넘쳐납니다. 내가 주인공인 인생에서 조연 같은 연약한 생명들이 죽어 나자빠져도 아무런 상관없는 무감각함으로 헤롯은 가까이에, 곳곳에, 늘 있습니다. 헤롯은 어느 때고 살해와 통곡을 불러올 겁니다. 이것은 경고입니다.
때로 헤롯은 예수조차도 주인공으로 세웁니다. 주인공만 살 수 있다면 주변 인생들 쯤 어떻게 돼도 상관없다고 말합니다. 눈을 가려서 학살당하는 약한 생명들을 보지 못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예수가 주인공이니까요. 그런 점에서 주인공 신앙은 위험합니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라고 말하는 신앙도, 내 인생의 주인공은 예수라고 말하는 신앙도 위험하기는 매한가지입니다. 그것은 결국 참상을 불러올 겁니다.
저는 이 사건의 책임을 아기 예수에게 돌리고 싶지 않습니다. 아기 예수는 겨우 살아남은 생존자이니까요. 저는 헤롯을 탓하고 싶습니다. 이 참상은 헤롯에게서 비롯합니다. 주인공이라는 광기에 사로잡힌 왕이 시작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헤롯에게서 도망해야 합니다. 살아서 나사렛으로 가야 합니다. 그곳은 주인공이 될 수 없는 땅이니까요. 나사렛에서는 주인공이 날 수 없습니다. (나사롯에서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
더 많은 조연들이, 연약한 생명들이 헤롯에게서 도망쳤으면 좋겠습니다. 살아남아서 나사렛으로 갑시다. 내년에는 우리 나사렛에서 만납니다. 혹시라도 헤롯 피해 모인 나사렛에서 헤롯 노릇 하지 맙시다. 내가 주인공이라고 설치지 맙시다. 느닷없이 헤롯이 되어 칼 휘두르지 맙시다. 그럼 그에게서 다시 도망할 겁니다.
헤롯에게서 도망칩시다. 도망쳐서 살아남읍시다. 살아서 나사렛으로 갑시다. 나사렛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합시다. 살아남은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선한 것이 날 수 없다고 공언된 그곳에서 우리는 예수의 일을 합시다.
2019년 12월 29일 [함께. 걷는. 교회.] 설교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