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과 6펜스>, 서머싯 몸
초중고 교과과정 중 가장 자신 없는 건 미술이었다. 가위나 붓 등 도구를 이용해 그림을 그리거나 무언가를 오리고 붙여 만드는 활동을 나는 가장 못했다. 누구보다도 느렸고 결과 역시 늘 평균 이하였다. 남들에 비해 왼손이 둔하다는 핑계가 없는 건 아니지만, 왼손과는 전혀 무관한 그림 그리기가 가장 엉망이었던 걸 보면, 미술 쪽에는 평균만큼의 소질도 없었던 게 분명하다. 칠판이 필요한 수업보다는 덜 지루했지만, 같은 반 친구들이 얻은 결과에 늘 못 미치는 내용물을 만들며 나는, 미술 시간을 은근히 곤란해했다. 자연스레 미술 쪽 감각과는 거리가 멀어졌고, 문외한이라고 자처하기에 부끄럽지 않을 만큼 그 분야에 관해서는 무지하다. 그런 내가 미술과 관련한 소설을 어떻게 읽느냐고? 염려 마시길. 『달과 6펜스』는 그림을 그린 사람에 관한 소설이지, 그림 자체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니까.
『달과 6펜스』는 영국 작가 서머싯 몸이 쓴 작품으로, 화가 폴 고갱을 모델로 한 소설이다. 고갱의 무엇이 서머싯 몸을 매료했을까. 서머싯 몸은 고갱의 무엇을 말하려고 글로 옮겨 담았을까. 글로 옮겨 놓은 고갱은 오롯이 그 일까? 아니면, 서머싯 몸의 기대와 이상이 뒤섞인 또 다른 창조물일까.
저자 서머싯 몸에게는 독특한(?) 이력이 하나 있다. 무명이던 시절 서머싯 몸은 신문에 광고를 싣는다. 『달과 6펜스』를 홍보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흔한 책 광고와는 달랐다. 그가 낸 홍보는 구혼 광고였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저는 젊고 교양이 있는 백만장자입니다. 서머싯 몸의 소설에 나오는 여주인공과 같은 인물과 결혼하고 싶습니다.” 지금이라면 허위광고로 법적 제재를 받을게 뻔한 이 광고 덕분에 그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한다. 이제는 고전의 반열에 오른 그의 명성 때문인지, 재치 있는 전략이었다고 쉽게들 평가하지만 나는 쉽게 동의하기가 어렵다. 현재의 윤리적 잣대를 백 년 전 인물에게 들이밀려는 게 아니다. 『달과 6펜스』에서 드러나는 인간에 관한 그의 생각이, 구혼 광고를 홍보 전략으로 택한 그의 태도와 묘하게 맞물리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본 서평은 『달과 6펜스』에서 드러나는 서머싯 몸에게 다소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게 될 것 같다.
추측건대 서머싯 몸은, 35세라는 늦은 나이에 그림을 선택한 고갱에게 매료된 듯하다. 고갱은 증권가에서 일하던 중 경기침체로 인해 직장을 잃게 되자, 가족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림을 택했다고 한다. 서머싯 몸은 ‘아랑곳하지 않는’ 고갱에 주목한다. 『달과 6펜스』에서 저자는 나이와 가족에 얽매이지 않고, 그림이라는 원초적 자유를 향해 달려간 고갱을 이상적으로 그린다.
“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지 않소. 그리지 않고서는 못 배기겠단 말이오. 물에 빠진 사람에게 헤엄을 잘 치고 못 치고 가 문제겠소? 우선 헤어 나오는 게 중요하지. 그렇지 않으면 빠져 죽어요.”(69)
『달과 6펜스』의 주인공은 ‘찰스 스트릭랜드’(고갱과는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다.)로 40세까지 증권가에서 일하며 가족을 부양하던 그는 어느 날 홀연히 사라진다. 스트릭랜드가 다른 여성과 눈이 맞아 파리로 도피했다고 확신하는 그의 아내는, 평소 자신의 사교모임에 참석하던 한 작가(아마도 서머싯 몸 자신으로 보이는)에게 스트릭랜드를 찾아 설득해서 집으로 데려와 줄 것을 요청한다. 그녀의 요청을 수락한 익명의 작가는 스트릭랜드를 찾아 파리로 떠나게 되고, 그곳에서 만난 스트릭랜드와 그의 기행을 관찰자 시선에서 전기로 남기는 과정을 『달과 6펜스』는 그린다.
바람난 상대와 사치스러운 한때를 보내고 있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스트릭랜드는 더럽고 비좁은 여관방에서 혼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처음 만난 스트릭랜드에게 가족에 대한 책임과 윤리를 들먹이며, 집으로 돌아갈 것을 권하자 스트릭랜드는 귀찮다는 듯 거절한다.
“사람들이 비열한 인간이라고 욕해도 괜찮단 말인가요? 부인과 아이들이 비렁뱅이질을 해도 상관없고요?” “상관없소.” ... “정말 천하에 악질이군요.” “자, 이제 그만큼 했으면 속이 후련할 테니, 가서 저녁이나 합시다.”(70)
서머싯 몸은, 스트릭랜드와 작가 사이에 오고 간 대화에 상당한 지면을 할애한다. 긴 대화를 통해 저자는 스트릭랜드라는 인물의 성격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스트릭랜드는 그림 외에는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다. 윤리나 규범, 40년 동안 지속해온 관계, 사회적인 시선, 사랑이나 성적 욕망에도 그는 무관심하다. 그림을 그리겠다는 욕망 말고는 어떤 것도 그를 자극하지 못한다. 가족에 대한 윤리나 책임, 사회적 평판 등을 언급하며 날 선 공격을 던지는 작가에게, ‘그려야 한다’ 고만 응답하며 가볍게 응수한다. 가족을 버리고 온 일에 대한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그에게는 없다.
“아무래도 이런 격언을 믿지 않으시는군요. ‘그대의 모든 행동이 보편적인 법칙에 맞을 수 있도록 행동하라’는 격언 말입니다.” “들어본 적도 없거니와 돼먹지 않은 헛소리요.” “칸트가 한 말인데요.” “누가 말했듯, 헛소리는 헛소리요.”(76)
스트릭랜드가 그림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보여주려는 걸까. 그림에 사로잡혀 인생을 불태운 어느 천재의 예술혼을 뒤늦게라도 예찬하려는 걸까. 그렇지 않다. 서머싯 몸은 스트릭랜드를 통해 고갱을 재조명하거나, 그의 숨겨진 면을 드러내는 일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물론 고갱의 인생과 작품을 빌려 틀로 쓰고 있지만, 서머싯 몸의 목적은 다른 데 있다. 그가 쓴 다른 작품 『인간의 굴레에서』라는 제목에서 엿볼 수 있듯이, 그는 굴레를 벗어난 인간을 말하고 싶어 한다. 타인이라는 윤리, 사회라는 굴레를 비웃는 인물을 서머싯 몸은 그린다. 스트릭랜드를 도덕이나 양심과 멀리 떨어트려 도드라지게 해 놓고, 그를 악인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모순적이고 속물적인 존재인지를 서머싯 몸은 드러내고 싶어 한다.
“하지만 남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정말 전혀 상관 않는 사내가 여기 있었다. 그러니 인습 따위에 붙잡혀 있을 사내가 아니었다. 이 사내는 온몸에 기름을 바른 레슬링 선수처럼 도무지 붙잡을 수가 없었다.”(75)
“이런 인간을 상대로 양심에 호소해 보았자 효과가 있겠는가.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찾는 격이었다. 나는, 양심이란 인간 공동체가 자기 보존을 위해 진화시켜 온 규칙을 개인 안에서 지키는 마음속의 파수꾼이라고 본다. 양심은 우리가 공동체의 법을 깨뜨리지 않도록 감시하는,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있는 경찰관이다. 그것은 자아의 성채 한가운데 숨어 있는 스파이이다. 남의 칭찬을 바라는 마음이 너무 간절하고, 남의 비난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너무 강하여 우리는 스스로 적을 문 안에 들여놓은 셈이다. 적은 자신의 주인인 사회의 이익을 위해 우리 안에서 잠들지 않고 늘 감시하고 있다가, 우리에게 집단을 이탈하려는 욕망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냉큼 달려들어 분쇄해 버리고 만다. 양심은 사회의 이익을 개인의 이익보다 앞에 두라고 강요한다. 그것이야말로 개인을 전체 집단에 묶어두는 단단한 사실이 된다. 그리하여 인간은 스스로 제 이익보다 더 중요하다고 받아들인 집단의 이익을 따르게 됨으로써, 주인에게 매인 노예가 되는 것이다. 그러고는 그를 높은 자리에 앉히고, 급기야는 왕이 매로 어깨를 때릴 때마다 아양을 떠는 신하처럼 자시의 민감한 양심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리고 양심의 지배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온갖 독설을 퍼붓는다. 왜냐하면 사회의 일원이 된 사람은 그런 사람 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스트릭랜드가 자신의 행위가 불러일으킬 비난에 정말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나는 그 무서운 사람을 피해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마치 인간이랄 수 없는 괴물의 모습에 공포를 느끼고 뒷걸음치듯.”(77)
저자는 스트릭랜드를 양심에 붙잡히지 않는 괴이한 인간이라고 말하면서도, 양심은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적이라고 비난한다. 오히려 저자 자신이 칸트의 정언명령이 헛소리라고 말하는 셈이다. 고갱의 삶과 스트릭랜드의 입을 빌어서 말이다.
서머싯 몸에게 양심은 인간 내적이거나 본래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를 보호하기 위해 인습과 문명이 만들어낸 인공물이다. 그것은 인간을 억누르며 자유롭지 못하게 한다. 뿐만 아니라 윤리, 사랑 등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인간은 양심의 명령 아래에서 자신과 타인을 속이는 거짓 자아가 될 뿐이다. 저자는 그 반대편 꼭대기에 스트릭랜드를 놓음으로써 그를 이상화한다.
스트릭랜드는 자신의 욕망만을 욕망한다. 그에게 타인은 없다. 오로지 자신만이 자기 행위의 동력이다. 자신에게서 비롯하는 것만을 향해 그는 달려간다. 그의 삶에는 윤리나 사랑 따위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
가족은 물론, 자신의 천재성을 알아봐 주고 존경해주었으며, 자신이 병들었을 때는 보살펴 주었던 스트로브도 스트릭랜드에게는 무가치하다. 오히려 스트릭랜드는 자신에게 매혹당한 그의 아내와 집을 빼앗는다. 심지어 자신 때문에 스트로브의 아내가 자살하는 상황에까지 이르지만 스트릭랜드에게는 일말의 죄책감도 없다. 이렇게 극단적인 인물과 상황을 설정해 놓고 서머싯 몸은 무엇을 얻으려는 걸까. 그는 소설 속 작가의 입을 빌어 이렇게 말한다.
“작가는 자신의 작가적 본능이 인간성의 기이한 특성들에 너무 몰두하는 나머지 때로 도덕의식까지 마비됨을 깨닫고 당혹스러운 기분을 느끼는 때가 있다. 악을 관조하면서 예술적 만족감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하고 약간 놀라기도 한다. 하지만 정직한 작가라면, 특정한 행위들에 대해서는 반감을 느끼기보다 그 행위의 동기를 알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강렬하다는 것을 고백할 것이다. 작가는 논리를 갖춘 철저한 악한을 창조해 놓고 그 악한에게 매혹당한다. 비록 그것이 법과 질서를 능멸하는 일이 될지라도 그렇다. ... 작가는 악당을 만들어내면서 자기 안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본능 – 문명 세계의 법도와 관습이 잠재의식이라는 저 신비로운 구석으로 몰아넣은 –을 만족시키고 있는 것이 아닐까. 자기가 창조해 낸 인물에 살과 뼈를 부여함으로써 작가는 다른 식으로는 방출될 수 없는 자신의 본능에 생명을 부여하고 있는 셈이다. 작가의 만족이란 하나의 해방감인 것이다.”(197)
서머싯 몸은 자신이 창조한 인물 스트릭랜드에 만족한 듯 보인다. 스트릭랜드와 고갱이 얼마나 일치하는지는 이미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서머싯 몸은 스트릭랜드에게 삿대질을 하며 비난하는 사람들을 비웃고 싶은지도 모른다. ‘당신 정말 스트릭랜드가 피해 입힌 사람을 걱정해서 그런 거 맞소?’라고 되물으며 말이다.
고갱이 실제로 머물면서 그림의 모델로 삼았던 섬 타히티에서, 소설 속 주인공 스트릭랜드는 죽음을 맞는다. 섬의 원주민들과 함께 원시에 가까운 삶을 살아가던 스트릭랜드는 자신이 한센병에 걸린지도 모른 채 그림에 몰두하다가 죽는다. 타히티라는 공간이 뜻하는 바는 비교적 분명하다. 인습과 문명이 가져온 법과 규범, 윤리와 도덕, 사랑 따위 이전의 이상적인 세계를 의미할 것이다. 굳이 말한다면 타히티는, 선과 악이 나뉘기 이전의 장소 즉 에덴인 것이다. 결국 서머싯 몸은 고갱을 틀로 삼고 스트릭랜드의 입을 빌어 자신이 꿈꾸는 이상적인 주체와 세계를 보여주려 한 것이다.
서머싯 몸이 던진 물음을 피해 갈 재간이 나는 없다. 그의 물음은 당대 여러 작가들에게서 다양한 방식으로 반복된다. 헤르만 헤세는 『데미안』을 통해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경계를 넘어서려고 했고,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땅과 하늘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자유로운 인간 조르바를 묘사했다. (흥미롭게도 『데미안』과 『달과 6펜스』는 같은 해인 1919년에 출간되었다.) 이는 모두 니체에게서 비롯한 주제인데, 세 작가 모두 니체에게 아주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지나치게 손쉬운 정리 인지도 모르겠지만, 이 같은 유사성은 니체 철학이 당대 유럽의 문학사조에 미친 영향일 테고, 여전히 유의미한 물음이라는데 나는 동의한다.
다만, 방식 면에서 서머싯 몸의 그것이 나는 가장 별로였다. 스트릭랜드가 그림을 통해 자기 주체 혹은 원초적 자유라는 꼭대기를 향해 올라갈수록, 저자는 주변 인물들을 천박한 존재로 전락시킨다. 자기 욕망을 욕망하는 스트릭랜드는 본래적 존재로 이상화되는 반면, 그 외의 주변인들을 죄다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천박한 인간으로 묘사하는 단순함도 진부하지만(그 와중에 자신으로 보이는 작가는 스트릭랜드와 죽이 잘 맞는 인물로 묘사한다), 그중에서도 압도적인 주변화는 두 말할 필요 없이 여성을 향한다. 스트릭랜드가 차례로 만나는 세 명의 여성이 사실상 소설의 구조를 이루는데, 스트릭랜드를 두드러지게 하려고 서머싯 몸은 철저하게 여성을 주변화한다. 겉만 멀쩡할 뿐 속은 천박하거나, 사랑에 목매거나, 혹은 거치적거리지 않아 딱 좋은 여성. 물론 시대적인 한계가 있을 테고, 하루 이틀 일도 아니지만, 『달과 6펜스』에서는 필요하지 않은 내용에까지 굳이 여성에 대한 저자의 편견이 드러나서 읽는 내내 불편함을 감출 수 없었다.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다. 앞서 언급한 내용 이외에도 생각할 거리는 많다. 미술이라는 낯선 세계로 안내함으로써, 윤리(善)와 아름다움(美)의 관계, 천재에 관한 저자의 독특한 견해 등에 관해서도 여러 이야기가 가능하다. 다만, 다소 통속적인 서사와 과하게 드러나는 저자의 태도가 못내 아쉬웠던 건 사실이다. 서머싯 몸은 고갱에 관해서가 아니라, 자신에 관해 말한다. 어떤 때는 떼를 쓰는 듯도 했고, 자신의 재능을 몰라주는 불특정 다수에게 삐쳤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한참 늦었겠지만 뒤늦게라도 저자를 변호하며 본 서평을 마치려고 한다. 어쩌면 스트릭랜드에게서 드러나는 주체성이 독립을 넘어 고립에 가깝다고 느낀 이유는 아래 내용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버튼이 있다면 ‘공감’을 누르고 싶은 내용이다.
“사람은 누구나 세상에서 홀로이다. 각자가 일종의 구리 탑에 갇혀 신호로써만 다른 이들과 교신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신호들이 공통된 의미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그 뜻은 모호하고 불확실하기만 하다. 우리는 마음속에 품은 소중한 생각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려고 안타까이 애쓰지만 다른 이들은 그것을 받아들일 힘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나란히 살고 있으면서도, 나는 남을 이해하지 못하고 남도 나를 이해하지 못한 채로 함께 어울리지 못하고 외롭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 우리는 마치 이국 땅에 사는 사람들처럼 그 나라 말을 잘 모르기 때문에 온갖 아름답고 심오한 생각을 말하고 싶어도 기초 회화책의 진부한 문장으로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는 사람들과 똑같다. 머릿속에는 전하고 싶은 생각들이 들끓고 있음에도 기껏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정원사 아주머니 우산은 집 안에 있습니다> 따위인 것이다.”(211)
서평26. 달과 6펜스/서머싯 몸/민음사/19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