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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망이 Jan 01. 2020

'나목' 찾기

<나목>, 박완서

<밤의 해변에서 혼자>라는 영화에는 유독 기억이 남는 장면이 하나 있다. 주인공이 머무는 집의 거실 유리를 바깥에서 누군가가 열심히 닦는 장면이 그것이다. 아무리 닦아도 유리는 깨끗해지지 않는다. 닦아야 할 유리면이 바깥쪽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장면 속 주인공은 유리나, 바깥을 닦는 타인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다. 영화를 보는 입장에서는 애써 유리를 닦으려는 바깥의 타인이 우스꽝스럽다. 나라면 물었을 것이다. ‘뭐 하시는 분이세요?’

‘마음은 결국 자신에게 달린 것’이라는 진부한 해석 말고도, 여러 읽기가 가능한 장면이다. 바깥에 있던 타인은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열심히 유리를 닦았을까. 주인공이 더러워졌다고 생각했을까. 자신이 주인공을 깨끗하게 만들 수 있다고 확신했을까. 자신이 보는 면이 깨끗하면 주인공의 인생 전부가 깨끗할 거라고 믿었을까. 열심히 닦다 보면 언젠가는 유리 너머의 주인공에게 닿을 수 있을까. 유리는 점점 얇아지고 결국엔 사라질까.

소설 『나목』에도 유리 안과 밖에 있는 사람들 사이의 간격을 인상 깊게 그린 장면이 있다. 주인공 (이)경은 자신이 있는 유리 안쪽을 구경하듯 쳐다보는 창 밖 사람들을 보며 이렇게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 속에 갇힌 원숭이인 것이다. 유쾌한 구경꾼들이 자꾸만 몰려들었다. 우리는 그들을 위해 아무런 재주도 부릴  모르는 무능한 원숭이  , 우리의 절망이 그들에게 미칠  없고 또한 그들의 애환이 우리에게 생소하다. 우리는 휘장을 밀었다.”(250)

소설 『나목』은 박완서 작가의 등단작이다. 2011년 80세 나이로 별세한 박완서 작가는 대략 50년 전인 1970년에 『나목』으로 문학계에 첫 발을 내딛는다. ‘나목’(裸木)은 겉모습만 보면 숨이 끊어진 고목(枯木)처럼 앙상하고 황량하지만, 계절이 바뀌면 메마른 품에서 생명을 내놓는 나무를 가리킨다. 제목만 보면 무슨 이야기일지 예상되는 흔한 소재이지만, 저자는 결코 만만치 않은 문장과 감정으로 독자를 잡아끈다.


알려져 있듯, 소설 『나목』은 화가 박수근과 그의 작품인 <나무와 여인>을 모티프로 삼는다. 여느 소설처럼 작가의 자전적 삶이 담긴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휴학 중이던 박완서가 박수근 화백과 우연히 함께 일했던 실제 과거를 소설로 옮겼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목』은 흥미롭다. 작가의 삶과 문장뿐만 아니라, 박수근 화가의 일면도 조금은 훔쳐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영국 작가 서머싯 몸(Somerset Maugham)이 예술가로서의 고갱에 관해 쓴 소설 『달과 6펜스』처럼, 『나목』도 박수근 화백과 거리를 두고 그의 삶이나 예술가적 면모를 조명한 소설은 아니다. 소설은 철저하게 화자(話者)이면서 주인공인 ‘(이)경’ 중심이다.

박완서 작가의 소설이 대체로 그렇다고 평가받듯, 등단작인 『나목』 역시 6.25 전쟁을 배경으로 하며, 주인공 (이)경과 엄마의 관계가 소설의 뼈대를 이룬다. 소설은 전쟁을 직접 다루지는 않는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을 저자는 그린다. 총알과 포탄이 한반도를 휩쓸고 난 직후를 저자는 특유의 필체로 써 내려간다. 절망, 무력, 권태, 혐오 등으로 가득한 문장을 써 내려가면서도, 폐허 위에 다시 집을 지어 살아가려는 사람들을 저자는 그린다.

주인공 (이)경은 전쟁 이후 황폐를 드러내는 인물이다. 경은 전쟁 중 집에 날아든 포탄으로 두 오빠를 잃었고, 그 후로 엄마와의 관계마저 산산이 부서진다. 아니, 있던 관계가 사라진다. 폭격에 두 아들을 빼앗긴 충격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두 오빠를 행랑채에 숨기자고 제안한 딸 경이를 탓한 걸까. 행랑채가 폭격당해 두 아들을 잃은 엄마는 ‘공허’로 향한다. 그녀는 텅 빈 존재가 된다. 살아있으나 죽음과 이미 손을 잡은 듯 엄마는 부재(不在)로 뛰어든다. 경이는 엄마를 부르고 만지려고 하지만 손에 잡히지 않는다. 엄마가 경이를 ‘마주 대하지’ 않는 까닭이다.  
 
나는 허겁지겁 어머니의 손을 꼬옥 쥐었다. 차지도 덥지도 않은 까실한 손은 결코 마주 쥐어 오는 법이 없다. 나는 그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바랐다.”(89)

나는 먼저 수저를 놓고 어머니의 식사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왈칵왈칵 치미는 혐오감을 되새김질했다. 나는 어머니가 싫고 미웠다. 우선 어머니를 이루고 있는  부연 회색이 미웠다. 백발에 듬성듬성 검은 머리가 궁상맞게 섞여서 머리도 회색으로 보였고 입은 옷도  찌들은 행주처럼 지쳐 빠진 회색이었다.”(17)

소설 『나목』의 특징 하나가 여기에 있다. 흔히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로 분석되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기본 값인 여느 가족 서사와는 달리 『나목』에는 아버지와 아들이 없다. 딸과 어머니가 흔히 가부장을 상징하는 고가(故家)를 차지한다.

 드넓은 고가에 단둘만이 살면서 우리는 애정이라든가 의무로 묶여 있지는 않았다. 차라리 우리는  같이 고가의 망령에 들려 있음이 분명했다. 나도 결국 누구 때문도 아닌  이곳을 떠날 수가 없는 것이다.”(67)

소설에는 신화적인 모성도, 엄마를 향한 딸의 사랑도 없다. 부재로 향하려는 엄마와, 존재하려는 딸이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 『나목』은 아들에게만 자신의 존재 의미를 부여하던 엄마가 두 아들을 잃고 난 후 극단적인 자기부정 즉 ‘없음’으로 치닫자, 그런 엄마의 세계(사실상 가부장)를 극복하고 끝내 ‘있음’으로 향하려는 여성 주체의 서사로도 읽기가 가능하다. 물론 『나목』은 여성인 박완서 작가의 자전적 삶을 담아낸 소설이므로, 그가 설정한 자연스러운 배경을 굳이 복잡하게 읽을 필요는 없다. 게다가 50년 전 이야기인 만큼 그보다 발전한 ‘엄마와 딸’ 서사는 얼마든지 있다. 그럼에도 ‘아버지와 아들의 세계’에 익숙한 우리에게, 전쟁 직후의 이야기를 엄마와 딸의 관계를 통해 듣는 일은 어딘지 새롭다. 거기에 예스러운 문장과 의외의 작법은 묘한 매력을 더해준다. 굳이 의미를 덧댄다면 『나목』은 여성주의 이론가들이 흔히 지적하듯, 프로이트와 라깡의 오이디푸스 이론이 배제하거나 주변화한 엄마와 딸의 서사를, 광장 한복판에서 다시 읽게 한다. 소설은 삶을 욕망하는 딸 (이)경을 그린다.

과거의 망령에 붙들린 엄마와 달리, 딸 (이)경은 삶을 욕망한다. 그녀는 현실의 황폐를, 회색 빛 세계를 넘어서기를 갈망한다. 하지만 어디에서 생기를 찾을 수 있을까. 살아있다는 명증한 사실을 어떻게 만질 수 있을까. 전쟁 후 세계는 색을 잃었고 삶이라 부를 만한 것이 남아있지 않다. 두 오빠가 죽은 공간인 고가(故家)와 완벽한 허(虛)인 엄마로 대표되는 세상은 빛깔을 잃었다. 누군가 있다 한들 모두가 ‘잡종’과 ‘엽전’으로 비하되는 세상이며, (이)경과 타인 사이에 놓인 차가운 유리 밖에는 감각할만한 무엇도 남지 않았다. (이)경 자신 역시도 초상화를 한 장이라도 더 팔기 위해 우스꽝스러운 영어를 지껄이며 미군을 꼬드기는 업무를 맡았고, 환쟁이들은 본 적도 없는 백인 여인들의 초상화를 그리며 추잡한 욕을 내뱉을 뿐이다. 그녀가 속한 실내는 회색 휘장으로 늘 가려져 있으며, 그것을 걷어봐야 어차피 닿지 않을 타인의 구경거리가 될 뿐이다. 자신의 말을 내뱉는 이가 없으며 원하는 삶을 사는 이가 없다. 권태로움과 환멸, 무력감 말고 무엇을 더 만질 수 있을까. 삶에 대한 욕망은 현실에서 오는 절망 때문에 다시 죽음을 향한다.  

그러고는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곧이어 살고 싶다로 고쳤다. 죽고 싶다. 살고 싶다. 죽고 싶다. 살고 싶다.  상반된 바람이 똑같이 치열해서 어느 쪽으로도 나를 처리할  없다.”(166)

삶을 욕망하는 (이)경은 권태롭고 환멸스러운 현실이 아닌 ‘다른’ 무엇을 원한다. 환쟁이나 콩글리쉬, 잡종이나 엽전으로 득실대는 세계가 아니라, ‘진짜’를 갈망한다. 회색빛이 아니라, 천연한 색을 욕망한다. 데카르트처럼 자신만으로는 삶을 확인할 수 없는 걸까. 그녀는 ‘다른’ 무엇, 빛깔로 가득한 무엇과 관계하기를 바란다. 그것에게 말 걸고 사랑하기를 원한다.  

나는 갑자기 빛깔에 대한 걷잡을  없는 갈망을 느꼈다. 그것은 오랫동안  속에 억압되어   없이 잠재해 있다가 열기를 만난 인화물질처럼 차올랐다.”(98)

나는   없이 옥희도 씨를 생각했다. 그리고 주문처럼 ‘그는 딴사람과 다르다. 그는 딴사람과 다르다 외었다. 나는 그런 되풀이를 통해 어쩌면 새로운 생활에의 노크를 시도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50)

(이)경은 옥희도라는 인물을 만난다. 환쟁이들과는 ‘달리’ 진짜 화가 출신인 옥희도를 그(녀)는 사랑함으로써 삶을 만지려고 한다. 옥희도와의 연결을 통해 자신을 확인하려는 것이다. 화가인 그에게서 빛깔을 얻고, 아내와 자녀가 있는 그를 사랑함으로써 현실의 규범을 가로질러 자신을 확증하려고 한다. 윤리와 도덕은 어머니의 세계, 즉 자신을 옭아매던 과거의 망령이며, 먼 미래는 자신에게 해당하지 않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너무도 아득한 시간, 5년이나 10년쯤. 바로  너머쯤에 전쟁이 있는  살벌한 거리에서 5년이나 10 후쯤을 꿈꾸다니 얼마나 미련한가 말이다. 나는 그렇게 천천히  수는 없는 것이다. 아주 상식적이고도 완만한 궤도로부터 과감히 탈선해서 지름길로 삶의 재미난 것을 재빠르게 핥으며 가야 하는 것이다.”(81)

하지만 (이)경은 옥희도의 그림을 보고 절망한다. 그의 그림은 황폐한 고목(枯木)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옥희도의 황폐한 그림은 (이)경 자신이 그의 삶에 끼어들 여지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그를 사랑한다고 믿었고, 그와의 연결을 통해 자신의 삶을 감각할 수 있다고 믿었던 그(녀)는 옥희도와도 역시 닿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제 (이)경은 삶에 대한 욕망을 어디에서 채울 수 있을까.   

독자를 절망에 맞세운 채 『나목』은 끝이 날까. 인간은 서로에게 닿을 수 없다고 소설은 말하는 걸까. 전쟁은 끝났지만 혹자들은 종말 이후라고 부르는 오늘, 우리는 모두 유리로 된 우리 안에서 차가운 유리만을 감각한 채 어머니의 세계를 살 수밖에 없는 걸까. 우리는 각자 죽은 나무인 채로 사는 걸까.

『나목』은 시간이 꽤 흐른 후를 마지막 장면으로 삼는다. 흔한 서사지만 (이)경에게는 의미심장하다. 그(녀)에게 미래는 오지 않을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른 후에도 그녀는 여전히 ‘살아가고’ 있다. 남편에 주름에 입을 맞추는 모습은 그녀가 받아들인 시간을 뜻할 것이다.

어느 날 (이)경은 옥희도 유작전에서 고목이 그려진 그림을 다시 본다. 그림은 달라져 있었다. 죽은 나무가 아니라 나목이 있다. 살아 숨 쉬는 나무가 그림 안에 있다. 그녀가 숨을 쉬듯 나목도 색을 입고 있었다. 그림이 달라진 걸까.

내가 지난날, 어두운 단칸방에서  한발 속의 고목, 그러나 지금의 나에겐 웬일인지 그게 고목이 아니라 나목이었다. 그것은 비슷하면서도 아주 달랐다. 김장철 소스리 바람에 떠는 나목, 이제  마지막 낙엽을 끝낸 김장철 나목이기에 봄은 아직 멀건만 그의 수심엔 봄에의 향기가 애닯도록 절실하다.”(284)

사실 『나목』은 ‘실존’ 같은 흔한 용어나, ‘고난을 이기고 피어난 꽃’ 같은 진부한 문장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게다가 통속적이다. 소설을 쓰윽 보면 ‘전쟁으로 인한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주체의 서사’라고 뭉개는 설명도 가능하다.  

장담컨대 그게 전부는 아니다. 본 서평에 담아내지 못한 매력이 소설 곳곳에 숨겨져 있다. ‘박수근 화백과의 만남’이라는 흥밋거리뿐만 아니라, 시간과 공간, 시각과 촉각 등을 저자는 균형감 있게 사용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 곳곳에 숨겨둔다. 저자가 들려주는 스산한 문장과 무력하면서도 욕망하는 (이)경의 감정도 충분히 좋다. 이것도 전부는 아니다. 소설은 독자가 예상하는 것보다 깊게 이야기를 실험한다. 그 이야기를 발견하는 독자에게는 색다른 즐거움이 있을 것이다. 다시 본 그림에서 나목을 발견한 (이)경처럼.



서평27. 나목/박완서/세계사/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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