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보낸 하느님>, 돈 큐핏
1. 거창한 물음
발칙하면서도 귀여운(?) 모임 하나를 교회에서 하는 중이다. 일명 <신있스>로 ‘신은 있는가 스터디’를 제멋대로 줄인 명칭이다. 직선적이고 어설프면서도 한편으로는 발랄한 이름인데, 나는 그게 좋았다. 이런저런 까닭으로 교회를 떠났던 이들 몇과 함께하는 모임이라는 점도 의미가 있는데, 그에 더해 참여자들은 그동안 감춰왔던 질문들을 거침없이 묻고 자신의 견해를 솔직하게 드러낸다. 제약이나 금기는 없고 누군가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다. 가감 없으며 그래서 재미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신(神)이 있는지 없는지를 쉽게 단정 짓는 사람은 없다. 그 물음 자체가 위험한 사상이라거나 신성모독이기 때문이라서 그런 건 아니다. 너무 큰 물음이기 때문이다. 신(神)의 있고 없음을 말하는 일은 여전히 크다. 적어도 이 바닥에서는.
그럼에도 <신있스>라는 즉흥적인 호칭은 ‘그리스도인’으로 구체적인 현실을 살아야 하는 개인의 근본 물음 하나를 잘 드러내 준다. ‘타자로서의 신, 대상으로서의 신은 있는가?’ 하는 물음이 그것이다. 이 오만한 물음은 수많은 질문을 포함한다. 과연 신은 있을까? 있다면 어떻게 있을까. 내 눈 앞에 있는 노트북처럼 신은 실재(實在)할까. 아니면 그런 신은 없는 걸까? 없다면 그것으로 괜찮을까? 유물(唯物)만으로 세계는 충분한가. 의무와 당위를 가진 인간, 그 인간이 가진 관념은 어디에서 비롯한 걸까. 그것은 우리 외부에 있는 절대적 존재에게서 건네받은 게 아니었던 걸까.
2. 하느님을 떠나보내자고?
『떠나보낸 하느님』의 저자 돈 큐핏(Don Cupitt)은 <신있스>라는 이름만큼이나 직선적으로 신의 있고 없음을 묻고 또 답한다. 그는 거침이 없다. 저자 자신이 성공회 사제이면서도, 교회에 남아 있는 신자를 배려한다는 이유로 우회하지 않는다. 돈 큐핏은 신의 존재 물음에 관해 곧장 결론으로 달려간다. 『떠나보낸 하느님』이라는 제목이 이미 드러내듯, 그는 실재하는 하느님은 없다고 단정 짓는다. 그렇다면 저자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걸까? 그는 ‘떠나보낸 하느님과’ 함께 그리스도교, 혹은 종교마저도 떠나보자고 주장하는 걸까?
총 12장으로 구성된 『떠나보낸 하느님』을 한 장씩 살펴볼 수는 없다. 분량이 많을뿐더러 저자가 다루는 내용이 워낙 다양하기 때문이다. 신학자이면서 종교철학자인 돈 큐빗은 신학과 철학을, 때로는 역사와 성서를 자유롭게 드나들며 자신의 주장을 펼쳐나간다. 본 서평에서는 저자가 책에서 반복해서 강조하는 몇 가지 내용만을 살펴보고자 한다.
책의 주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로 실재(實在)하는 하느님, 세계 외부에 객체로 존재하는 신은 더 이상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돈 큐빗은 이렇게 말한다.
“이제 하느님이 신자들 위에 군림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것이 되었고, 영적으로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되었다. 대상화시키는 종교는 더 이상 구원의 힘이 없기 때문에 거짓 종교가 된다.”(35)
싸우자는 걸까. 저자는 서슴없이 실재하는 하느님을 신앙하는 그리스도교를 거짓 종교라고 말한다. 이는 애당초 무신론자였던 사람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을 주장이지만, 교회 내부에서 터져 나오는 목소리라면 얘기가 다르다. 그리스도교를 뿌리 채 뽑아버리려는 주장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실재하는 신 없는 그리스도교가 가당키나 할까. 현실 교회에서 위 주장을 수용할 리 없다. 차라리 저자 자신이 그리스도교를 떠나면 될 일 아닌가. 하지만 그는 외부인이 되려고 하지 않는다. 반드시 교회 내부에서 할 이야기가 있다는 듯이 자신의 자리를 붙든다. 여기에서 『떠나보낸 하느님』이 주는 긴장이 생겨난다. 돈 큐핏은 어쩌다가 저런 주장을 하기에 이르렀을까.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다. 돈 큐핏이 ‘없다’고 단정하는 신은 객체로 존재하는 하느님이다. 다시 말해 저자는, 인간 외부에서 타자로 실재하는 객체로서의 신 개념을 부정한다. (저자는 책 전반에 걸쳐서 타자, 실재, 객체 등의 용어를 반복해서 사용한다.) 즉 그는 인간 밖에서 왕으로 군림하며 군주로써 명령하는 신, 즉 ‘바깥’의 하느님을 부정한다. 세계 바깥의 신은 인간 외부에서 ‘명령’하는 타율적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타율로 세계를 억압하며 자율을 폐기하기 때문이다. 이는 근대 이후의 인간, 즉 자율적이며 주관적인 주체를 긍정하는 저자의 생각을 바탕으로 하는데, 돈 큐핏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이러한 과정에서 ‘죄’의 의미가 역전되었음을 감지한다. 즉 전통사회에서는 자신의 철저한 자유를 긍정하는 것이 죄의 본질이었다. 죄란 하느님이 질서 지운 현존하는 삶의 구조에 대해 불복하고 반항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복종이 죄다. 무엇보다도 인간은 자신의 내면의 성실성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내면의 성실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지닌 자율성이다.”(33) ... “하느님의 요구가 인간을 통제하기 위해 인간 밖의 객체적인 권위로 남아 있는 한, 종교는 충분히 발전할 수 없다. 종교란 밖으로부터 일어날 수 없는 인간 본성의 완전한 내면적 변혁을 특별하게 요청한다.” ... “따라서 하느님이 선하시다면, 하느님은 무대에서 사라져야 한다.”(38)
돈 큐핏은 실재하는 하느님 대신 범신론이나, 혹은 일련의 신학자들처럼 범재신론을 주장하는 걸까? 그렇지 않다. 돈 큐핏은 위의 인용문에서 자율성과 내면의 성실성을 관련짓는다. 그는 바로 이 지점에서 ‘떠나보낸 하느님’을 다시 소환한다. 자율적인 인간 내면에 ‘새 계명’으로 새겨진 하느님을 말한다. 바꿔 말하면, 인간의 자율성이 곧 새로운 계명으로 새겨진 하느님이라는 것이다. 즉 인간 내면의 주관성과 자율성이 하느님의 실재를 대체한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무엇인가? 하느님은 영성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모든 것을 설득력 있게 인격화하고 나타내는 통합적 상징이다. ... 하느님은 구체화된 종교적 관심이다.”(42)
돈 큐핏은 신의 실재를 새롭게 변증하거나, 신 존재의 불가피한 필연성을 증명하는 일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오히려 그는 객체로서의 신과, 그로 인한 타율적 권위들이 사라져야 종교가 자신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에게는 인간 내면의 자율성이야말로 궁극적인 선(善/도덕이나 윤리적 이상으로 바꿔도 무방)을 향한 종교적 관심에서 비롯된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종교적 실재론에 대해 결정적으로 반대하는 이유는, 그것이 실재적이게 되면 반드시 종교적이기를 멈추기 때문이다.”(99)
돈 큐핏은 1-6장까지는 자신의 의견을 분명히 하고 신학적/철학적/역사적/성서적 근거를 들어 실재론을 반박하는 일에 총력을 기울인다. 하느님에 관한 실재론뿐만 아니라, 창조, 부활 등의 주요 교리를 반박하는데 힘을 기울이는 한편, 저자 자신이 생각하는 종교적 관심, 즉 하느님이 인간의 내면에 있다고 주장한다. 즉 돈 큐핏에 따르면 하느님은 종교적 관심이며 인간 내면의 자율성이다.
3. 그리스도교를 버려야 하는가.
저자의 말대로라면 그리스도교를 내다 버리는 일만 남은 게 아닐까. 우리 바깥에서 높임을 받는 하느님이 실재하지 않는다면 예배는 폐지되어야 하지 않을까. 전통적인 교리는 터무니없는 거짓이니 이제 내던져야 하는 게 아닐까. 그리스도교를 비롯해 신의 실재를 바탕으로 한 종교는 이제 수건을 던져야 하지 않을까.
돈 큐핏은 실재하는 하느님에 관한 전통적인 믿음과 신념, 이론 등을 온 힘을 다해 반박한 후, 종교적 형식에 대해 말한다. 그리스도교의 형식을 이루는 예배와 교리, 그것들이 향하는 하느님의 의미와 신앙 등을 차근차근 해체한 후, 의미를 새롭게 불어넣는다. 이를테면 저자는 예배에 관해 말한다.
“예배 가운데 나타나는 언어와 다양한 표현과 몸짓들은 하느님을 향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 예배의 격식은 인간의 현재 상태와 회복되어야 할 인간의 상태 차이를 반영해 준다.”(129)
다시 말하면 예배는 인간의 자율성 혹은 의지가 추구하는 이상을 드러내 주는 종교적 형식이라는 것이다. 돈 큐핏에 따르면 예배는 현실과 도덕적 이상의 간격을 드러낸다. 예배라는 종교적 형식 안에서 우리는 인간이 추구해야 할 ‘사심 없는’(목적 없는) 도덕적 이상과 현실의 간격을 확인한다. 신앙은 예배의 격식 안에서 확인된 도덕적 이상과 현실의 간격을 좁히려는 자율적 의지이다. 타율적 존재로부터 주어진 명령이 아니라 내면화된 새 계명을 따르려는 주관의 자율적 의지가 신앙인 것이다.
또한 돈 큐핏은 교리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는 일이 종교적 가치를 지키기보다는 파괴한다고 주장한다. 타율적 권위가 강제함으로써 종교가 추구해야 할 자율적 ‘사심 없음’(특정 조건이나 타율적 명령에 얽매이지 않는)을 방해하거나 훼손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교리를 비판하는데 그치지 않고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
“종교적 교리들은 논거들이 아니고 단순한 예화들이다. ... 이 이야기들은 우리의 상상력을 촉발시키고 종교적 심성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이다. 교리는 합리적인 동기로서 작동하는 것이 아니고, 자율적인 종교적 요구를 생생하게 강화시키기 위한 것이다.”(149)
이와 같은 주장을 반복하며 돈 큐핏이 사용하는 방법론은, 흥미롭게도 종교나 철학, 혹은 역사적 지식에만 제한되지 않는다. 그는 성서 전통에도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가 있다고 책 전반에 걸쳐 강조하는데, 주로 예언자들을 소환한다. 예를 들면 고대의 ‘거룩’의 의미가 바뀌게 된 과정을 저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고대의 경우에 종교적 개념의 내면화는 좁은 종교적 영역으로부터 사회 윤리의 영역으로 옮겨가는 효과를 주었다. 이스라엘 예언자들은 거룩의 개념을 바꿔놓았다. 거룩이라 본래 종교적 용어로써 결코 윤리적인 의미가 아니었다. ... 거룩이란 종교적으로 불경건한 자들의 더럽힘으로부터 종교적인 것들을 보호하였던 성스럽고도 위험한 힘의 충전이었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점차 거룩의 의미를 바꾸었다. 하느님께 속한 이스라엘은 그 자체가 윤리적 의미에서 거룩한 것으로 이해되고, 적합한 윤리적 표현을 요청하는 것이 되었다.”(153)
4. 나가며
돈 큐핏은 그리스도교와 그 전통을 폐기하자고 주장하지 않는다. 하비콕스가 『세속도시』에서 주장하듯 종교성은 폐기될 것이고 세속화로 향하게 될 거라고 그는 예언하지 않는다. 실재하는 하느님에 대한 전통적인 믿음을 온 힘을 다해 부정하고 비판하면서도, 그는 그리스도교가 거짓 종교라고 말하지 않는다. 돈 큐핏은 근대 이성을 지나온 현대에 그리스도교가 지니는 의미를 묻고 답한다. 여기에 긴장이 있다. 그의 주장과 교회는 화해할 수 있을까. 교회는 돈 큐핏의 주장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까. 신의 실재를 부정하면서도 종교의 가능성과 의미를 긍정하는 그의 주장은 과연 타당하며 실효성이 있을까.
몇 가지 물음이 생긴다. 그는 종교를 윤리적 가능성으로만 환원시켜 버린 게 아닐까. 신의 실재에 관한 돈 큐빗의 논의를 따라가더라도, 종교의 가능성을 윤리 문제로만 이야기하는 것은 종교를 축소시키는 게 아닐까. 그 방향이 ‘사심 없음’이라는 윤리적 이상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세속도시』 이후 하비콕스가 자신의 견해를 수정하여 『종교의 미래』에서 세계가 오히려 종교적인 방향으로 갈 것이라고 말했을 때, 그는 종교가 지닌 ‘신적 윤리’의 가능성만을 언급한 것이 아니라, 보다 ‘종교적’이 되어가는 세계에 대해 말한다. 윤리와는 무관한 ‘종교적 인간’ 자체에 대해 언급한 것이다.
또한, 돈 큐핏이 말하는 ‘주관적 자율성’은 서구 철학이 말해온 ‘주체의 가능성’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만약 큰 차이가 없다면, 그가 말하는 주체적 자율성이 누구나에게 가능한 제안일까? 주체와 자율이란 개념 자체가 식민 지배를 바탕으로 한 서구 중심적인 사고는 아닐까? 인간 실존을 무한하게 긍정하는 근대적인 합리성만을 바탕으로 한 사고와 돈 큐핏의 주장은 무관할까? 돈 큐핏의 주장이 이론적으로 타당하다고 해도 그가 제안하는 윤리적 당위만으로 주체의 자율적 의지와 종교가 계속 한 배를 탈 수 있을까.
출간된 지 40년이나 지난 돈 큐핏의 책이 위의 모든 질문에 답할 책임은 없을 것이다. 그에게 책임을 떠넘기기보다, 그 사이 우리는 어디까지 걸어왔는지 뒤를 돌아보는 게 더 현명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가 근대적이고 합리적이며, 책이 한계를 지녔다 한들 무슨 잘못이겠는가. 우리는 고대를 사는 걸.
서평28. 떠나보낸 하느님/돈 큐핏/한국기독교연구소/19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