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보내며

by 매니아


아파트 상가 길을 건너는 너를 봤다. 우린 서로 눈이 마주쳤는데 반갑게 인사하는 나와는 달리 너는 어색한 표정으로 지나쳤다. 외면하듯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이상하게 보였던 건 나만이 아니었던지 옆에 있던 아들이 “엄마 아는 사람이야? 그런데 왜 대답도 안 하고 그냥 가?”라고 물어왔다. 어린아이 눈에도 어색하게 보일 만큼 너는 자연스럽지 않았다. 또다시 시작한 거니?





K를 알게 된 건 13년 전, 첫째가 네 살이던 해였다. 딸이 다니던 어린이집에서 처음 마주친 우리는 매일 인사를 나눴다. 그녀는 연년생인 남매를 같은 어린이집에 보내고 있었다. 집도 같은 방향이라 자연스레 하굣길을 함께 하면서 친해지게 되었다. 아이들이 친하게 지낸 것도 우리가 가까워진 계기였다. 그녀와 나는 비슷한 점이 많았다. 우린 동갑이었고 결혼 전에 간호사로 일했으며. 같은 해, 같은 달에 결혼을 했다. 그다음 해에 딸을 출산한 것도 같았다. 둘 다 결혼을 하면서 이 지역으로 오게 됐고, 어느 해인가 보건 교사 준비를 했었다. 이 많은 우연도 신기했지만 그보다 우린 서로 말이 잘 통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우리는 아이들을 핑계 삼아 서로의 집을 오가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매일 만나면서도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은지 헤어지는 시간을 아쉬워하곤 했다. 서로의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그녀가 곁에 있다는 게 참 좋았다.





시간이 흘러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1학년 반 배정은 신입생인 우리에게 최고의 관심사였는데, 같은 반이 된 걸 알고 뛸 듯이 기뻐했던 기억이 난다. 낯설고 긴장되는 초등학교생활을 든든한 친구와 함께 할 수 있다는 게 마음이 놓였다. 늘 붙어 다니는 우리를 보고 같은 반 엄마들은 사귀는 사이냐며 놀리기도 했다. 적어도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모든 게 이전과 같았다.





어느 날 K는 냉랭해진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평소와는 다른 건조한 말투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봤지만 그녀는 별일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혹시 내가 무슨 실수라도 한 건지 꺼림칙했지만 되짚어 생각해 봐도 짐작 가는 건 없었다. 그 후로 몇 번이나 같은 상황이 반복됐다. 그녀가 마지못해 전화를 받는 느낌이 들자 나도 더 이상 연락하기가 망설여졌다. 그렇게 (적어도 내 입장에서는) 영문도 모른 채 우리 관계는 끝이 났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꿈을 꿨다. 누군가 앞에 서 있는 것 같은데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어떤 말도 들리지 않고 내 입도 뗄 수 없었지만 나는 울음을 삼킨 사람처럼 목이 멨다. 흠칫 놀라 눈을 떴을 땐 주위는 새까만 어둠 속이었다. 오늘도 꿈을 꿨구나. 몇 달이 지났는데도 반복되는 꿈이었다. 누군가와 함께했던 일상에서 혼자가 된 기분은 마음 한구석이 텅 비어버린 것 같이 허전했다. 어떤 것도 흥이 나지 않고 무기력한 상태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어쩌다 K의 지인들을 길에서 마주칠 때면 그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곱지 않다는 걸 느꼈다. 그런 날이면 도대체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끊임없이 생각해야 했다. 차라리 화를 내고 절교를 당했다면 받아들이기 쉬웠을 텐데, 마치 잠수 이별을 당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3학년 학부모 총회 날이 되었다. 강당에서 총회가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앞이 흐려졌다. 누군가 내 눈을 두 손으로 가리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에 놀라서 고개를 돌리는데, 눈을 가리던 손이 풀리면서 시야에 들어오는 얼굴이 있었다. 활짝 웃고 있는 모습, 마치 늘 그래왔던 것처럼 다가온 사람, 그녀였다. 어…어… 순간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은 우리를 향해 있었고, 어느 쪽으로든 나는 선택을 해야 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그녀를 외면하기는 쉽지 않았다. 이 상황을 받아줘야 할 것 같이 느껴졌다. “ 어, 왔어?” 겨우 그렇게 한마디를 하고 그녀와 나란히 앉았다. 그런 내가 바보 같았지만 그건 내가 그토록 오래 그리워하던 온기이기도 했다.





K는 그동안 나를 오해했었다며, 미안하다고 했다. 그 한마디가 그녀에게 어떤 무게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날 갑자기 봉변을 당한 나로서는 그 말이 너무 가볍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그녀가 나를 외면하게 된 사건은 나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일어났다. 그때 우리 아이들은 같은 수학 학원에 다니고 있었다. 그곳은 정기적으로 레벨테스트를 해서 반을 배정했는데, 그 무렵 최상위반을 가르는 시험이 있었다. 딸아이는 시험을 잘 봐서 최상위 반으로 올라갔고 K의 딸은 남은 한자리를 두고 다른 아이와 경쟁을 하고 있었다. 그때 내가 K의 딸을 그 반으로 올리면 학원을 그만두겠다는 말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 상황 자체도 처음 들은 나는 당황스러웠고, 나를 외면한 이유가 겨우 이것이었다는 사실이 허탈하게 느껴졌다. 한 번만 나에게 물어봤으면 해결됐을 일을 도대체 왜.





이전과 같다고는 할 수 없지만 우리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 듯 보였다. 하지만 조금 더 민감하게 그녀의 표정을 살피고 그럴 때마다 묘한 긴장감이 생겼다. 그때 내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명확하게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녀로 인해 외롭고 고통스러웠던 시간을, 미안하다는 한마디에 나는 용서했다. 그녀의 말을 모두 이해해서가 아니라, 사과도 받아주지 못하는 나를 보기가 힘들었던 것 같다.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다고 여겼다. 내 감정을 들여다보기보다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일처럼 생각해 버렸다. 그런 내가 쉬워 보였던 건지 그녀는 점점 연락이 뜸해졌다. 그런 그녀가 더 이상 궁금하지 않았다. 불면의 밤을 보내며 나를 괴롭힐 만큼 더 이상 그런 존재가 아니었다.





내 감정을 파악하지도 못한 채 섣부르게 관계를 회복했지만 그녀는 또다시 아무 이유 없이 나를 외면했다. 이상하게도 이번에는 아프기보다 오히려 홀가분하게 느껴졌다. 오래 지고 있던 짐을 내려놓은 듯 마음이 가벼웠다. 사람의 마음은 모두 다 다르다. 내가 온전한 마음을 다 내어주면서 상대를 대한다고 해도 그도 같은 마음일 수는 없다. 친해지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지만 막상 친해지고 나면 마음을 다하는 나는 정작 나를 먼저 돌볼 줄 몰랐다. 그녀에게서 나를 지키지 못한 채 돌아가는 길 끝에서야 알았다. 그녀와 나 사이는 멀어졌으며 그건 다시 가까워질 필요가 없는 거리였다. 나는 마음이 가벼워졌다. 시원한 바람이 부드럽게 등을 미는 것처럼, 한 걸음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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