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연구소 선정 최고의 책 100
작가명: 에우리피데스(Euripides)
작가 생몰연도: 기원전 480년경~기원전 406년(고대 그리스)
언어: 고전 그리스어
최초 발행일: 기원전 431년
⭐️읽은 도서 정보: <메데이아> 에우리피데스 지음, 김기영 옮김/출판사 을유문화사
★ 한줄 감상평 ★
여성에 관한 낡고 지루했던 옛 신화는 메데이아의 칼자루 끝에서 마침내 전복된다. 이 짜릿한 카타르시스
날이 점점 선선해지며 아름다운 독서의 계절!!!!! 가을이 다가오고 있다.

근무가 끝나고 집으로 올라오는 고속버스에서 책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10월부터는 다시 본원 근무라 당분간 고속버스 탈 일이 없을 텐데... 은근 아쉽네 이거. 이번에 올라올 땐 고대 그리스 비극을 대표하는 시인인 '비극의 이단아'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를 읽었다. 에우리피데스는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와 함께 그리스 3대 비극 작가로 일컬어진다.
고대 그리스 비극은 고대 그리스와 그리스인이 거주했던 아나톨리아 지방(오늘날 튀르키예 지역에 속하는 반도)에서 유래한 세 가지 주요 연극 장르 중 하나다. 인간의 운명이나 신들의 의지, 도덕적 갈등 같은 엄숙하고 진지한 주제를 다룬다. 주로 신화나 영웅 서사에서 소재를 취했고, 엄격한 형식이 존재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따르면 비극의 목적은 관객으로 하여금 공포와 연민을 불러일으켜 카타르시스(정화)를 제공하는 것이다.
다른 두 가지로는 희극과 시티로스극이 있다. 희극은 사회, 정치 풍자, 일상의 소소한 문제 같은 주제들을 자유로운 형식으로 유쾌하게 전달한다. 시티로스극은 비극 공연 뒤에 이어지는 짧고 익살스러운 연극으로, 비극과 유사한 신화적 소재를 사용하지만 가볍고 익살적인 분위기에서 풀어내어 긴장감 높은 비극 공연 후 관객에게 웃음, 해방감을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내가 읽은 을유문화사의 <메데이아>에는 메데이아와 함께 에우리피데스의 또 다른 비극 작품인 알케스티스, 힙폴뤼토스까지 총 세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세 작품 중에는 역시 메데이아가 가장 극적으로 느껴졌는데 '자식 살해'라는 소재 자체가 주는 충격이 일단 크다. 이 작품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이아손과 메데이아의 이야기에서 유래되었다. 메데이아의 이름은 '계획자, 음모가'라는 뜻으로 미디어(Media)의 어원이기도 하다. 메데이아는 태양의 신 헬리오스의 손녀이자 흑해 연안의 콜키스라는 나라의 왕 아이에테스의 딸이었다. 그녀는 황금 양털을 얻기 위해 아르고 호를 타고 콜키스에 온 이아손을 보고 사랑에 빠져 물심양면으로 그를 돕는다. 그녀는 이아손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데, 심지어 자신의 혈육들을 배신하거나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그러나 헌신하면 헌신짝이 된다고 했던가.... 이렇게 가족까지 내팽개치며 이아손에게 올인했건만 이아손은 메데이아를 버리고 코린토스 왕 크레온의 딸 글라우케와 결혼한다.
이아손에게 버림받은 메데이아는 복수를 결심한다. 메데이아는 쥰니 무서운, 아주 개무서운 언니였던 것이다...이아손 너는 이제 아주 jot 된 거임 그녀는 독약을 바른 금관과 옷을 결혼 선물이라며 이아손의 새 신부가 된 글라우케 공주에게 보낸다. 선물을 받은 글라우케는 아무것도 모르고 룰루랄라 금관을 머리에 쓰고 옷을 입어보는데....
메데이아의 독이 묻은 옷과 장신구를 입자마자 순식간에 불이 붙어 글라우케를 태워버린다. 아버지 크레온 왕이 딸을 구하려 하지만 그도 이 독약에 오염되어 결국 함께 죽음을 맞는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닌가 보다. 후덜덜.....그러나 개무서운 메데이아 언니의 복수는 이게 끝이 아니다.....
그녀는 복수의 피날레로 자신과 이아손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들을 직접 죽여버린다.
친구들이여, 내 결심은 확고하오. 빨리 내 자식들 죽이고 이 땅에서 도망치는 것. 여유 부리다가, 아이들을 다른 적의 손에 넘겨주어 죽게 해서는 안 돼. 아이들이 반드시 죽어야만 한다면 아이들 낳은, 바로 내가 죽일 것이다. 자, 무장하라, 담대한 마음이여. 왜 주저하느냐? 무시무시한 불행이지만 반드시 감행해야 한다. 자, 불쌍한 나의 손이여, 검을 잡아라, 잡아서 고통에 찬 삶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라.
- 메데이아 126p
자신이 낳은 아이들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죽인 메데이아는 괴로움에 통곡하는 이아손에게 보란 듯이 "너에게 고통을 주려고"라는 말을 남기며 아이들의 시체를 뱀 수레에 태우고 날아가 버린다. 이토록 강렬한 여성 캐릭터라니...문학사적으로도 그녀의 존재는 아주 센세이셔널하지 않은가?!!
본래 그리스 신화 원전에는 메데이아가 직접 아이들을 살해하는 내용은 없다고 한다. 메데이아가 남편 이아손에게 복수하기 위해 친자식을 살해하는 내용은 에우리피데스가 이 작품에서 창작한 것이다. 이 새로운 설정으로 작품 속에서 메데이아는 자신이 받은 모욕에 대해서라면 무섭도록 냉정하게 복수하고야 마는, 이전의 여성 캐릭터들에게서는 쉽게 볼 수 없었던 아주 강렬한 인물상으로 완성된다. 남편에게 배신당한 그녀는 극 초반부에 평정심을 유지한 채 당시 고대 그리스에서 남성 중심의 가부장 사회에서 여성이 겪는 보편적 운명을 이야기한다.
숨이 붙어 있고 판단력 있는 모든 생명체 가운데 우리 여자들이 가장 비참한 존재랍니다 ......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경주의 성패는 좋은 남편을 얻느냐, 나쁜 남편을 얻느냐에 달려 있지요. 여자들에게 이혼은 명예롭지 않고 남편을 거절하는 것도 불가능해요 ...... 남편은 안사람과 함께 지내다 싫증이 나면 바깥으로 나돌며 마음속에 쌓인 구역질을 떨쳐 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 사람만 쳐다봐야 하지요. 남자들은 우리가 가정에서 위험 없는 삶을 산다고 말합니다. 한편 남자들은 창으로 싸운다고 분별없이 떠벌리지요. 즉 아이를 한 번 낳느니 전장에서 세 번이라도 방패 들고 맞설 마음 있어요.
- 메데이아 81~82p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놀라웠는데 이 작품이 쓰인 시기가 기원전 5세기경이었다는 점이다. 이 당시 고대 그리스에서 여성의 지위는 자신의 아버지 또는 남편에게 속한 재산과 같은 개념으로 노예나 외국인에 비해 나을 바가 없었다. 고대 그리스에서 '시민'의 자격은 남성에게만 제한되어 있었으며 여성은 시민이 아니었다. 이런 시대에 가부장적 사회의 불합리함을 말하는 여성 캐릭터라니. 심지어 이 작품의 작가인 에우리피데스는 남성이다!
메데이아는 극 속에서 모든 상황을 자신의 계획 하에 주체적으로 이끌어나간다. 그녀에게서는 가족을 향한 지고지순한 사랑, 모성이 충만한 자애로운 어머니, 절망과 슬픔의 감정에 휩싸여 주저앉는 여성적 자아 같은 것은 상당히 배제되어 있다. 그녀는 자신이 당한 모욕의 대가를 계획대로 대갚음해간다. 이는 흡사 <일리아스> 속 남성 영웅들의 성격을 닮았다. 그리스 상고기 시대(기원전 8세기~5세기경) 영웅의 가치관이 '명예를 손상한 적에게는 반드시 복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는 측면에서 볼 때 복수의 전형이자 모범이라 할 수 있다. (274p) 이아손은 새 장가를 드는 자신의 결정에 대해 메데이아에게 말 같지도 않은 핑계를 늘어놓으며 궁색하게 자신을 변호한다. 그는 자신이 이 새로운 결혼을 함으로써 명예와 재물을 얻어 메데이아와의 사이에서 난 자식들에게도 풍족한 미래를 누리게 해주기 위함이라고 변명한다. 비겁한 이아손의 모습에서 영웅적 모습이란 찾아볼 수 없다. 이는 메데이아의 대담함, 결단력과 더욱 대비를 이룬다. 물론 그녀의 자식 살해는 도덕적으로 결코 용납될 수 없는 부분이라 영웅적 측면이 상당 부분 퇴색되긴 하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그녀가 본인의 손으로 자신의 아이들을 직접 죽임으로써 메데이아는 단지 한 여인이 아닌, 그리스 비극의 히로인이라는 확고한 지위를 획득한다.
이 책에 실린 에우리피데스의 또 다른 작품 <알케스티스>에는 이아손과 유사한 느낌의 비겁한 남성 캐릭터 아드메토스가 등장한다. 아드메토스는 페라이의 왕으로 그의 아내 알케스티스는 죽을 운명이 정해진 남편을 살리기 위해 그를 대신해 죽는다. 아내의 죽음으로 명을 연장하게 된 아드메토스는 자신의 아버지 페레스에게 삶을 거의 다 누린 아버지, 어머니가 만약 자신을 대신해서 죽었다면 젊은 아내가 죽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그들이 죽기를 거절해서 알케스티스가 죽었다며 아버지를 비난한다. 이런 비겁한 그의 모습은 남편을 위해 기꺼이 죽음을 택한 알케스티스의 모습과 대비된다. 남성과 여성, 남편과 아내 사이의 전복된 영웅적 모습이 드러난다.
이러한 맥락에서 마지막 세 번째 작품인 힙폴뤼토스에서도 인상적인 여성 캐릭터 파이드라가 등장한다. 파이드라는 아테나이와 트로이젠의 왕인 테세우스의 아내다. 테세우스에게는 아마존 여전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힙폴뤼토스가 있었는데 그는 아프로디테 여신을 섬기지 않은 휘브리스(hybris, 윤리와 종교를 무시하는 자만 또는 교만. 신성모독의 범주에 들어감)를 저질러 여신의 미움을 받는다. 아프로디테는 힙폴뤼토스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 파이드라에게 에로스의 화살을 쏘아 그녀가 자신의 새 아들 힙폴뤼토스에게 사랑을 느끼게 한다. 파이드라는 자신의 잘못된 애욕을 잠재우기 위해 홀로 괴로워하던 중 계속 추궁하는 유모에게 어쩔 수 없이 이를 털어놓는다. 유모는 이 사실을 힙폴뤼토스에게 전하고, 이를 들은 힙폴뤼토스는 노발대발하며 '여성은 커다란 재앙'이라며 여성의 존재 자체를 비난한다. 힙폴뤼토스의 이러한 반응을 본 피아드라는 그에게 복수하여 그의 오만함을 일깨우고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그가 자신을 겁탈하려 했다는 거짓 증언을 서판에 적어놓고 자결한다. 이 거짓 증언을 믿은 테세우스는 아들 힙폴뤼토스가 파멸하게 해달라고 포세이돈 신에게 소원을 빌고 결국 힙폴뤼토스는 죽게 된다.
책에 실린 세 가지 극의 공통점은 모두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대담한 결정을 내리고 이를 실행하는 입체적인 '여성' 캐릭터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자신의 아이들과 남편을 위해 대신 죽음을 택하는 알케스티스, 복수를 위해 자신의 아이들까지 살해하는 메데이아, 그리고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자살하는 파이드라.
여성이 단지 조연, 혹은 그보다도 보잘것없는 존재감의 평면적 인물로만 잠시 등장했다 사라지는 남성 중심의 고대 영웅 서사들 속에서 여성과 인간의 심리를 깊이 있게 묘사한 상당히 시대를 앞서간 흥미로운 작품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전적이면서 동시에 아주 현대적이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2400여년 전 사람이지만 시대를 뛰어넘는 에우리피데스의 문학적 감각이 놀라울 따름이다.
끝으로 메데이아 극 중 코린토스 여인들이 자식과 관련해 말하는 부분이 공감이 되어서 옮겨 적어놓는다. 나는 왜 자식도 없는데 이 말이 이렇게 와닿는지..ㅋㅋㅋ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식을 낳아 기르는 것은 평생 기쁨과 걱정과 행복과 고통이 함께 따르는 일인가 보다. 그러니까 다들 정말 신중하고 신중해서 내가 과연 한 인간을 잘 길러서 이 세상에 건강하게 날려보낼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 숙고해서 낳았으면 좋겠다. 낳아놓으면 애는 알아서 큰다는 그딴 무책임한 말 좀 제발 하지 말고. 메데이아처럼 애가 무슨 자기 소유물인 것 마냥 본인 살기 막막하다고 애까지 죽이고 자살 어쩌고 하는 혐오스러운 자식 살해 뉴스도 더는 안 들렸으면 좋겠다. 이 세상에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사람이 누가 있는가. 결국 본인 욕심으로 죄 없는 영혼 하나 세상에 소환해놓고 대체 뭐 하는 짓인가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나는 주장하노라. 사람들 가운데 아이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고 아이를 낳은 적 없는 자들이, 아이를 낳은 자들보다 더 행복하다고. 무자식인 자들은 경험이 없으니 아이들이 인간에게 어떤 달콤함이고 어떤 쓰디씀인지 알지 못하니 많은 고통에서 벗어나 있다네. 반면 집 안의 아이들이란 달콤한 축복을 누리는 자들은 평생 내내 걱정으로 마모되어 가는 걸 목격하는데 어떻게 아이들을 훌륭하게 키울지, 또 어떻게 아이들에게 재산을 물려줄지 걱정한다네. 더구나 이후, 부모가 노고를 다한 결과가 좋은 아이를 위해서인지, 나쁜 아이를 위해서인지 분명하지 않다네. 이제 모든 불행 중 마지막 불행을 모두에게 말하고자 한다네. 어떤 자들은 충분한 재산을 소유했고 그 아이의 몸이 성년에 도달하여 쓸모 있는 사람이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하지만 죽음이 아이의 몸을 하데스로 데려가서 사라지게 하는 운명이 닥쳐온다면 그럼 무슨 이득이 있을까? 많은 고생에 덧붙여 아이들 때문에 가장 뼈아픈 고통을 신들이 더하게 된다면 말이네
- 메데이아 120~121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