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8. <이방인> - 알베르 카뮈

죽기전에꼭읽어야할책1001 다읽기 챌린지

by 정앵무

408. 이방인(L’Étranger)

작가명: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작가 생몰연도: 1913년(알제리)-1960년(프랑스)
다른 판형 정보: 미국판|The Stranger
초판 발행연도: 1942년
초판 발행처: Gallimard(파리)

⭐️읽은 도서 정보: <이방인>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출판사 민음사

+관련하여 추가로 읽은 서적

1. <실존주의자로 사는 법> 게리 콕스 지음, 지여울 옮김/출판사 황소걸음

2.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장 폴 사르트르 지음, 박정태 옮김/출판사 이학사


★ 한줄 감상평 ★
이방인에게 '의무'란 없다. 단지 '선택'만 있을 뿐.


1001 리스트에서 시대순으로 1번부터 읽고 있긴 한데, 이번엔 약간 순서를 바꿔서 리스트 408번째 순서인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에 대해 먼저 써보려고 한다.

예전에 출국 전 공항에서 시간을 때우려고 서점에 들어갔다가 이 책을 샀었다. <페스트>를 비롯하여 카뮈의 책들이야 원래 유명하니까 전부터 알고 있긴 했지만 여행을 앞두고 있다 보니 왠지 더 읽고 싶었달까. 낯선 여행지에서 이방인이 된 나는 그렇게 '이방인'을 처음 읽었다.
그때 책을 다 읽고 느낀 점은 '아.... 묘하다... 도무지 알쏭달쏭하고 묘한 책이다.'였다. 시종일관 무미건조하게 서술되는 주인공 뫼르소의 시선만큼이나 이 책은 아주 담담하게, 혹은 불친절하다고 느껴지리만큼 이렇다 저렇다 긴 설명을 하지 않는다. 카뮈가 대체 이 짧은 소설을 통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어렴풋하게 알 것 같기도 하고 동시에 전혀 모르겠다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인터넷 여기저기에 '알베르 카뮈 이방인 해설','이방인 서평' 등을 검색해 몇 가지 글을 읽어보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알쏭달쏭할 뿐이었다. 이방인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카뮈의 철학 에세이 격인 <시지프 신화>를 함께 읽는 것이 좋다고 하는데 나는 지금까지 이 시지프 신화를 읽기 위해 두 번 시도했으나 두 번 다 처참히 실패했다. 일단 끝까지 다 읽지를 못했다. 분명히 한글로 쓰인 글자를 읽고 있는데 마치 외국어를 읽는 듯한, 아무것도!!!!한 문장도!!!!!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는 기막힌 경험을 하고 씁쓸한 마음에 결국 중간에 책을 덮어버렸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사실 카뮈의 시지프 신화를 읽게 된 계기가 바로 저 첫 문장 때문인데 안타깝게도 내가 시지프 신화를 읽고 이해한 유일한 문장도 저것뿐이다. 이후에 뒷부분을 읽을수록 머리가 몽롱해졌다. 아니, 지금 드는 생각은 나는 저 문장조차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건 아닐까?
어쨌든 카뮈의 작품들과 관련해 꼭 항상 등장하는 단어가 '실존주의'이고 이방인 해설에서도 이 '실존'이라는 단어가 자주 나오는데 그렇다면 대체 이 실존이 무엇이냐 이 말이다.
실존이 뭔데요?????????부조리는 또 뭐고요?????

국어사전에 검색한 '실존'이다. 뜻을 읽으니 머리가 더 몽롱해진다.

그래서 당시에 나는 카뮈의 이방인을 이해하기 위해서 어떻게 했느냐?

그냥 이해하기를 포기했다.^^

나중에 한 번 더 다시 읽고 그때 생각해 보자는 심정으로 그냥 그렇게 책을 덮었었다. 그러다가 이번에 다시 읽게 될 일이 생겼는데 이번에는 단순히 이방인만 딸랑 읽어서는 저번에 읽었을 때와 다를 바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카뮈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실존주의 철학에 대해서 먼저 좀 대략적으로라도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입문용으로 게리 콕스의 <실존주의자로 사는 법>과 실존주의 사상을 대표하는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를 많이들 추천하길래 이 두 권을 함께 읽었다.

외국 작가의 문학 작품을 읽을 때 '번역'을 누가 어떻게 했는가는 간과할 수 없는 아주 중요한 문제다. 하나의 언어를 다른 언어로 바꾸는 일은 단순한 치환을 넘어서서 거의 재창조에 가까운 작업이니 말이다. 하나의 문장을 두고도 10명의 사람에게서는 10가지의 각기 다른 해석이 나온다. 번역가는 마치 겨울의 끝자락에서 공기 중에 섞여있는 희미한 봄꽃의 향기 분자를 캐치해 계절의 변화를 읽어내는 꿀벌처럼 문장과 문장 사이에 떠다니는 원작자의 뉘앙스와 의도를 파악해 섬세하게 단어를 고르고 문장의 배열을 선택한다. 그렇기에 어떻게 번역했느냐에 따라 독자가 느끼는 그 작품의 분위기와 감성은 아주 달라질 수 있다. 이방인은 카뮈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널리 읽혀온 작품이니만큼 매우 다양한 번역본이 존재하고, 심지어 각 번역본에 대해 비교, 고찰한 논문까지 있을 만큼 어떤 번역본을 읽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 많은 책 중 하나다. 내가 예전에 읽었던 버전은 문예출판사에서 나온 이휘영 교수의 번역본이었는데, 다양한 번역을 보고 싶어서 이번엔 김화영 교수의 번역본으로 읽어보았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


이방인 책을 읽지 않은 사람도 이 도입부 문장은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을 정도로 소설은 독자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시작한다. 주인공 뫼르소가 양로원에서 생활하던 그의 어머니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 것에서 시작하여 뫼르소가 햇빛 때문에 총으로 아랍인을 살해하고 결국 이 사건 때문에 사형선고를 받게 되는 것으로 끝이 나는 소설 속에서 뫼르소는 "사실 이러나저러나 내게는 마찬가지"며 "삶이란 결코 달라지는 게 아니"라고 말하며 모든 것에 일관되게 무심하고 무관심한 듯한 태도를 보인다. 소설 이방인 특유의 문체 덕분에 이런 뫼르소의 태도는 이것이 그의 의도된 냉소라든지 삶에 대한 뚜렷한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그가 '진실로 원래 그런 사람일 뿐'이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 어머니의 장례식이 끝난 후 이제는 잠자리에 들어 열두 시간 동안 실컷 잘 수 있다는 것에 기쁨을 느끼는 뫼르소를 보면서 그의 이런 태도가 잘못된 것이라고 선뜻 말하기엔 어딘가 찝찝하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도 전혀 울지 않고, 자신의 살인 사건 재판을 흥미롭게 바라보는 뫼르소는 나로 하여금 분명 낯설고 불편한 감정을 불러일으키지만 그렇다고 이런 그가 잘못된 사람인가?라는 질문에는 확실히 '그렇다'라고 대답하기 어렵다. 만약 그가 잘못된 사람이라면 그렇다면 반대로 잘못되지 않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그는 자신이 바닷가에서 총으로 아랍인을 죽였고 이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고 그저 자신이 느끼는 있는 그대로를 꾸밈없이 이야기한다. 어머니의 죽음이든 살인이든 본인의 사형이든 어쩌면 이런 모든 건 뫼르소에게는 정말로 그다지 의미 있지 않은, 이러나저러나 마찬가지인 일들일 수 있다. 결국 그의 이러한 태도는 재판장에서 검사로부터 "그는 영혼 같은 것은 있지도 않고, 인간다운 점도, 인간들의 마음을 지켜주는 그 어떤 도덕적 원리도 없는 사람"이라며 사형을 받아 마땅하다는 주장을 이끌어낸다.
뫼르소가 만약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오열하고 그 충격으로 며칠간 식음을 전폐했거나 재판장에서 자신의 살인에 대해 후회와 반성, 변명의 말을 쏟아내었다면(그게 설사 진심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는 사형선고를 받지 않았을까. 그게 더 적합한 행동이었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형수가 된 뫼르소에게 찾아온 신부가 하느님께서 도와주실 것이라며 그를 위해 기도해 주겠다는 말을 하자 뫼르소는 소설 속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전까지의 무미건조하고 무심한 태도에서 벗어나 가장 인간다운 모습을 보이며 절규하듯 외친다.


나를 보면 맨주먹뿐인 것 같겠지. 그러나 내겐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이 있어. 신부 이상의 확신이 있어. 그래, 내겐 이것밖에 없어. 그러나 적어도 나는 이 진리를 굳세게 붙들고 있어. 그 진리가 나를 붙들고 놓지 않는 것만큼이나. 내 생각은 옳았고, 지금도 옳고, 또 언제나 옳아. 나는 이런 식으로 살았고, 다른 식으로 살 수도 있었어. 나는 이건 했고 저건 하지 않았어. 나는 어떤 일은 하지 않았는데 다른 일은 했어. 그러니 어떻다는 거야?


나는 소설 말미에 뫼르소가 토해내는 이 말들을 통해 그가 실존주의에서 말하는 '실존이 본질에 앞서는' 삶을 사는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사르트르가 든 예시를 보자. 종이 자르는 칼은 존재하기 이전에 장인에 의해 종이를 자르기 위한 목적으로 설계되고 그에 맞게 제작되어 그 이후에 존재한다. 즉 종이 자르는 칼은 그 본질(종이를 자르는 목적에 부합하게 생산할 수 있게 하는 제작법과 성질의 전부)이 실존을 앞선다. 그러나 인간은 먼저 세계 속에 실존하고 그 이후에 정의된다. 태초에 정해진 목적과 의미를 위해 태어난 인간은 없다. 인간이 태어난 건 우연의 결과일 뿐이며 거기에는 어떠한 고정된 목적이나 의미는 없으며 인간의 의미는 단지 인간 그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것뿐이다. 이것이 실존주의 철학의 핵심 명제인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의 의미다.


실존주의에서는 인간은 아무 의미 없고 부조리한 이 세계에 내던져지는 존재이므로 누구든지 스스로 자신의 의미를 만들고 선택할 자유를 부여받았으며, 반드시 그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은 인간의 존재가 아무런 목적이나 이유도 없이 우연적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면서 메스껍고 두려운 감정을 느낀다. 그러나 우리가 무의미한 존재라는 이 사실은 결코 허무주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의 의미를 만들어가고 그것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이다. 나의 자유에서 비롯된 이 선택에 대해 변명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그 선택을 직시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사르트르는 진정성에 도달하고 싶다면 자기 행동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영원한 윤리적 질문에 니체는 인생의 모든 순간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영원히 되풀이해서 살아가기를 바랄 수 있을 만큼 그렇게 살기를 열망하라고 했다. 니체는 우리에게 묻는다. "그 일을 다음 생에도 되풀이하고 싶지 않다면 지금 왜 그 일을 하는가?"


뫼르소는 죽음을 눈앞에 둔 사형수이다. 뫼르소와 내가 다른 점이 있을까. 어차피 모든 인간은 언젠가는 다 죽는다는 측면에서 사형수와 다를 바 없다. 단지 누군가는 좀 더 먼저 죽고, 누군가는 나중에 죽을 뿐. 뫼르소의 말처럼 사실 '이러나저러나'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그는 죽음 앞에서 본인의 행동과 삶에 대해 아무런 변명을 하지 않으며 그저 있는 그대로 모든 걸 인정한다.

이 무의미하고 생경한 세상에 갑자기 뚝 떨어진 이방인인 우리는 모두 자유로운 사람이다. '원래부터 그러해야 하는 것' 따위는 없다. 나는 나의 의미를, 나의 가치를 정할 자유가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에 따른 결과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뫼르소가 자신이 처형되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모여들어 증오의 함성으로 자신을 맞아 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말이다. 그는 그의 선택이 야기한 결과를 피하지 않고 또렷이 보기를 원한다.


사르트르가 '자기 기만'이라고 부르는, 자신의 삶에 가지각색에 변명들을 갖다 붙이며 도망치는 사람들이 많다. 그 변명들은 사회적 시선일 수도 있고 우리가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온갖 종류의 관습과 해묵은 편견, 또는 마음속 저 깊은 곳의 두려움일 수도 있다. 뫼르소는 이런 모든 이들에게 소리친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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