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이라!!! 어렵다.
정체성 (identity, integrity)
어떤 존재가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특징
오늘의 질문 “당신의 정체성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나요?”라는 질문을 받아들고는 침대에 기대어 앉았는데 멍해지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매일 새벽, 잠에서 깨면 카톡으로 오늘의 질문지를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다. 질문을 한 번 두 번 읽어보고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속옷을 챙겨들고 욕실에 간다. 양치질을 하고 면도를 하고 몸에 뜨거운 물을 맞으며 계속 그 질문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보이차를 한잔 내리며 생각 정리를 끝낸다. 그리고 잠시 명상을 하고서는 글쓰기를 시작한다.
이게 보통의 내 루틴인데 오늘은 질문을 받자마자 내 머릿속에 받아들여지는 어떤 의식(감이라고 해야 하나?)이 없었다. 그냥 멍했다.
‘나의 정체성이라?’
내 존재의 이유라고 할까? 아니면 내 본성을 써야 할까? 난 뭘까? 난 누구일까?
“이름”이라는 것으로 내 정체성을 이야기해보기로 했다.
나는 “김경태”이다. 나는 태어났을 때부터 누군가가(부모님이겠지, 할머니였거나) 나를 그렇게 불렀고 그때부터 나는 세상에 김경태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아마도 처음 태어났을 때는 내 이름이 없었을 것이다. 부모님께서 어느 철학관에서 지었다는 얘기를 해주셨던 기억이 난다.
내 기억 속에서 나는 태초부터 김경태였고, 항상 김경태로 살았다. 김경태가 아닌 적은 없었다. 미국에서 생활할 때는 경태 대신 kennie라는 이름을 썼는데, 미국서 나를 만난 사람들은 내 이름이 경태인 것을 모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내 자아가 김경태를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김경태 = kennie 와 동일 존재다.
내가 이름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계기는 내 아들 녀석 때문이다. 결혼을 하고 1년이 되던 날 아들이 태어났다. 아내와 나 모두 태명에 대한 생각이 없었기에 복중에 있을 때는 그냥 “아가야”라고 불렀다.
사내아이가 태어났고, 생년월일시를 받아서 엄마가 아시는 철학과 교수님께 부탁해 아들의 이름을 지었다. 이름 몇 개를 받고 아내와 상의해서 그중 하나를 골랐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 사내아이는 “MJ”라고 불리게 되었다.
난 너무 어색했다. 이름을 붙여준다는 것, 무명의 존재에게 이름을 붙여주는 것이 이상했다. 그런데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너무나도 입에 착착 붙게 그 이름을 불러댔다. 난 이상함을 느꼈다. 그리고 생각했다.
“저 아기를 MJ라고 부르는 게 맞을까?”
그런데, 자꾸 부르는 걸 듣게 되고 나도 부르다 보니 녀석이 진짜 MJ라고 느껴지는 순간이 있었다.
“이름에 걸맞은 존재가 되어간다.”라는 말이 맞는 것처럼.
그때부터 아들 녀석은 내게 완전한 MJ가 되었다.
내가 내 정체성을 이야기하면서 아들 녀석 이름을 이야기한 것은 바로 내 정체성은 내 이름으로 모든 게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김경태이다. 나는 내 직업이나 내 출신, 내 나이, 내 부모, 내 학교, 내 친구 ... 그 어떤 것과 상관없이 오롯이 “김경태”라는 이름으로 온전한 나다. (너무 자신감 있게 말했나?) 아니 그러길 바란다. ㅎㅎㅎ
내가 소개할 때 “작가 김경태입니다.” ,”회사원 김경태입니다.”라고 말하는 이유는 이름 앞에 붙는 명사를 통해 나의 현재 상황을 설명하기 쉽기 때문이다.
역할로서의 내가 아닌 존재로서의 나를 소개해야 할 자리에서는 난 내 이름만 이야기하며 한마디를 거든다.
“안녕하세요. 김경태입니다. 제 호는 인간입니다.” 이렇게 말이다.
나는 내 존재 안에서 역할을 정의해왔다. 아들, 아빠, 가장, 회사원, 조직의 리더, 작가, 유튜버 ... 이것들은 모두 나를 수식하는 수식어일 뿐이라고 생각해왔고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없다.
내 삶을 지탱해가는 것, 목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암튼 그것은 바로 “즐거움”이다. 나는 매우 이상적이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꿈을 꾼다. 그리고 그 속에서 즐거움을 찾는다.
내 주관적인 생각으로 나를 표현하는 가장 적당한 단어는 “꿈꾸는”이다. 나는 꿈꾸는 소년이었고, 꿈을 찍는 사진사였고, 꿈을 쓰는 작가이고, 꿈을 이야기하는 스피커다. 내가 꿈을 꾸는 이유는 꿈을 꾸는 동안 즐겁기 때문이다. 내가 상상하는 것들로 인해 내가 즐겁다.
즉, 내가 추구하는 삶은 바로 “즐거운 삶”이다. 내가 꿈꾼 것들을 현실적으로 이루는 방법을 찾고 그것을 이루어가는 것이 즐겁니다. 나는 그 과정 속에서 내 삶의 의미를 찾는다. 목표를 이루어서 의미를 찾는 것이 아닌 목표를 이루는 과정에서 즐거움을 찾는 것이 바로 나다.
그 과정은 꾸준함과 지난함이 공존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과정이 즐겁니다. (변태?)
분명 성과에 집착할 때가 있었다. 조급했고, 오늘 잠을 줄이면 내일 무언가를 손에 쥘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의 시간이 있었다. 그 기간동안 피로감이 높았고 공포와 두려움이 잦았다.
공자가 마흔을 불혹이라고 한 게 참으로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걸 실감한다. 정확히 마흔은 아니었지만 그 즈음에 조급함과 두려움은 서서히 고개를 숙였다.
불같았던 열정은 온종일 지필 수 있는 은은한 화로로 변했다. 그러면서 나는 고요해졌다. 바쁨을 디테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그러면서 오래도록 헝클어져있던 퍼즐이 조금씩 맞춰지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1000 피스 퍼즐을 맞춰본 분들은 알 것이다. 처음 퍼즐을 맞출 때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맨 가장자리를 맞추는 것뿐이다. 가장자리를 맞추고 나면 그다음 할 수 있는 것은 특정한 사물이나 특징지을 수 있는 컬러를 모아서 그 부분을 맞춰가는 것이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부분 부분을 맞춰나가다 보면 작은 부분끼리 연결이 되는 경우가 생긴다. 그 연결이 잦다보면 어느 순간 전체 퍼즐의 윤곽이 드러나게 된다.
우리의 삶도 이 퍼즐을 맞추는 것과 똑같지 않을까? 내 정체성은 바로 퍼즐의 그림이다. 그리고 나는 여러 과정을 거치며 조각을 맞춰가는 것이다. 학창 시절의 12~16년을 가장자리를 맞추는 시기라고 비유하고 싶다.
일을 갖고, 생각에 따라 계획하고. 행동하면서 조금씩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다 보면 어느 순간 전체 그림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퍼즐 속에는 아들로서의 나, 아빠로서의 나, 남편으로서의 나, 가장으로서의 나, 작가로서의 나, 회사원으로서의 나... 수많은 내가 있다. 그리고 결국 다 맞춰갈 때 즈음에 내 이름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다.
과장된 비유일지는 모르겠지만, 내 삶은 이와 비슷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퍼즐을 맞추는 것은 꾸준해야 하고, 지루하고 다리 저리고 목이 뻐근한 과정이 있지만 하나씩 맞출 때마다 즐겁다는 것이다. 그 즐거움에 퍼즐을 지속하는 이유가 있다.
마지막으로 이걸 생각해보자. 퍼즐을 맞출 때는 밑그림을 알고 맞춘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을 모른 채 자신을 알아간다. 다르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이것도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한 번도 자신이 아니었던 적이 없다. 우리는 태어나서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처음 불러준 그 순간부터 오롯이 자신의 이름 안에서 존재하고 있고 그것은 변하지 않는 진리다.
...
쓰다 보니 길어졌는데, 즐거운 생각 정리였던 것 같다.
공감은 둘째치고 일단 즐거우니 좋은 글이라고 생각한다.
- 작가 김경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