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년의 일탈, 타협의 17년 그리고...
대학생 때 좋아했던 그룹 <자우림>의 노래 중 "일탈"이라는 곡이 있다.
매일 똑같이 굴러가는 하루 지루해 난 하품이나 해
뭐 화끈한 일, 뭐 신나는 일 없을까~~~
할 일이 쌓였을 때 훌쩍 여행을, 아파트 옥상에서 번지 점프를, 신도림 역 안에서 스트립쇼를.
야이 야이 야이 야이야~~!!
하는 일 없이 피곤한 일상 나른해 난 기지개나 켜
뭐 화끈한 일, 뭐 신나는 일 없을까~~~
머리에 꽃을 달고 미친 척 춤을, 선보기 하루 전에 홀딱 삭발을, 비 오는 겨울밤에 벗고 조깅을
야이 야이 야이 야이야~~!!
모두 원해 어딘가 도망칠 곳을, 모두 원해 무언가 색다른 것을, 모두 원해 모두 원해 나도 원해.
약 10년가량 대학생이었던 나는 20대의 10년을 정말 아낌없이 소비했다. 위 노래 가사처럼 매일 똑같았던 입시생의 삶을 벗어던진 그 순간부터 나는 완벽한 "일탈"을 꿈꿨다. 그렇게 내 일탈은 10년간 계속되었다.
물론 노래 가사처럼 화끈한 일탈은 아니었지만, 돌이켜보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일탈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다시 예전의 입시생 같은 틀에 짜인 직장인의 삶을 시작했다. 올해로 17년째 그 삶을 지속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그 10년의 즐겁고도 짜릿했던 기억과 추억들이 지금까지 내가 삶의 방향성을 잃어버리지 않고 꾸준히 걸어가게 만드는 힘이 되어주고 있다. 당시의 내 결정들이 모두 옳을 수는 없었겠지만, 적어도 그 결정들의 집합이 현재인 것을 감안해 본다면 썩 괜찮은 결정이었다고 자찬해본다.
나의 20대는 꿀같이 달콤했다. 걱정이 없었고, 미래를 계획하지도 않았다. 현재에 충실했고, 기분에 충실했다. 하고 싶은 것이 생기면 최대한 해보려고 애썼다. 단, 공부는 가장 후순위였다.
난 그때 뭘 했을까? 오늘을 그때 내가 했던 사소한 일탈 몇 개를 소개해보려고 한다.
사소한 일탈들
1. 학교를 안 갔어!
초중고등학교를 개근했다. 흔히들 12년 개근이라고 한다. 그 당시는 이런 친구들이 많았다. 그래서 요즘 내 아이들이 아프다며 학교 안 가는 것을 보면 좀 이상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도 꼰대인가 보다.
12년간 열심히 학교를 다녔고, 그 기간 부모님께 가장 많이 들었던 "대학 가서 너 하고 싶은 거 해라."라는 말을 실행해보기로 결심했다. 나는 3월에 대학교에 입학해서 2주 정도 학교를 나가다가 학교를 안 가기 시작했다. 사실 이게 가능했던 것이 부모님과 떨어져 학교를 다니고 있어서였다.
내가 가진 웃픈 기록 중 하나가 처음 기숙사를 배정받고(4인실), 기숙사에서 선배들과 인사를 나누며 함께 입방식을 거~하게 치른 뒤 다시는 그 방에서 잠을 자지 않았다는 거다. 가끔 방에 들러 옷을 갈아입었고, 짐을 싸서 친구 집에 가기를 반복했다. 훗날 그 방 선배형을 만났을 때 "덕분에 책상에 있던 식권으로 밥 잘 먹었다."라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왜 나는 학교를 가지 않기로 결심했을까?
당시 나는 공부가 싫었다. 공부를 못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고등학교까지 노력했으면 대학은 그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나는 그 보상을 방종 같은 자유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듣고 싶지 않은 수업 대신 그동안 내가 하고 싶었던 것들을 해보기로 결정한 것이다.
나는 부산에서 함께 서울로 유학 온 친구들의 하숙집과 자취방을 전전했고, 친구 학교의 과친구들과 친하게 지내며 그들과 안면을 텄다. 여러 학교의 온갖 행사를 찾아다녔으며 그러면서 새로운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다. 부산에서 온 촌놈이 전국 각 지역의 여러 사람들을 만나 그들과 밥과 술을 마시게 되니 그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즐겁고 행복했다.
그렇게 나는 거의 1년을 학교에 가지 않았다. 물론 학점도 없었다.
훗날 군 제대 후 복학생이 되어서도 자주 학교를 가지 않았다. 이러한 일탈 덕분에 부모님은 정규 학비 외에 많은 금액의 계절학기 수강료를 납부하셔야 했다. 결국 나는 꾸역꾸역 학점을 모으고 모아 딱 졸업 이수 학점에 맞춰서 졸업을 하게 되었다.
대학생이 전공 공부 대신에 사람 공부와 내가 관심을 갖던 온갖 것들을 보고 듣고 경험하러 다녔다. 지금 생각해보면 약간 모골이 송연해지는 느낌이다. 지금의 나라면 그럴 수 있었을까? 내 아들이 나처럼 저런다면 나는 과연 어떻게 대처할까? ㅎㅎㅎ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 덕분에 이것저것 많은 것을 익히게 되었고, 넘치는 시간에 책을 많이 읽었으며 (대중교통으로 다니는 시간에 소설책을 많이 읽었더랬다.), 여러 방면의 사람들을 많이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까지 연락이 닿는 사람들은 거의 없지만 그때의 추억으로 행복하고, 길을 가다 우연히 마주쳐도 서먹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다.
2. 미친 듯 오락하기
어릴 때부터 오락을 무척 좋아했다. 엄마 몰래 오락실을 들락거렸다. 50원 하나면 엔딩을 보는 오락도 몇 개 있었다. 내 실력을 키우기보다는 친구들의 멋진 실력을 감상하기 위해서 오락실을 자주 들렀다. 중학교 2학년 때 스트리트 파이터 2라는 오락이 나왔다. 정말 학생들에게는 신의 선물 같은 오락이었다. 수업이 파하면 학생들의 거의 모두는 그 오락기를 빙 둘러싸고 실력 좋은 친구들의 대전을 구경했다. 가끔 오락의 내용이 실사가 되기도 했다.
컴퓨터 오락을 알게 된 것은 중2 때였다.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페르시아의 왕자>라는 오락을 보았다. 몇 번 해봤는데 딱~ 내 스타일이었다. 녀석이 <원숭이섬의 비밀>과 <LOOM> <인디아나 존스> 같은 오락도 보여줬다. 집에 돌아와 컴퓨터가 없는 우리 집을 한탄했다. 하지만 컴퓨터는 너무 비쌌다. 그리고 내가 컴퓨터를 사야 할 이유를 들어 부모님을 설득할 자신도 없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컴퓨터 잡지를 사서 모았다. 잡지 속에는 컴퓨터 오락에 관한 소개와 공략이 들어있었다. 그것을 읽으면서 나는 오락을 하는 것처럼 즐거워했다. 언젠가 내 컴퓨터를 가지게 되면 미친 듯 오락을 하겠다는 생각을 품으면서...
누나가 대학생이 되면서 아빠가 컴퓨터를 사주셨다. 덕분에 나는 가끔씩 누나 컴퓨터를 만져볼 수 있었다. 누나는 오락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 몇 가지 문서 작업을 위한 활용이 전부였다. 그 컴퓨터는 나를 만나 날개를 달았다. 나는 오랜 기간 컴퓨터 잡지로 축적해온 머릿속 컴퓨터 실력을 그 기계를 통해 뽐내기 시작했다.
당시는 DOS 시절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구입한 <마이컴>이라는 잡지의 첫 표지가 카스텔라 빵을 잘라서 MS-DOS라는 로고를 찍은 사진이 담겨있는 것이었는데 그 책을 통해서 나는 처음 MS DOS를 만든 빌 게이츠라는 형을 알게 되었다. 물론 스티브 잡스도.
암튼, 그 컴퓨터로 나는 DOS라는 운영체제를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다. 압축을 하고 압축을 해제하고 배치파일을 만들고 바이러스를 치료하는 가장 초보적이지만 지금은 대부분이 할 줄 모르는 그런 Command 창에서 컴퓨터를 다루는 기술을 익혀갔다. 그때 가장 핫했던 오락이 Doom, 삼국지 2, 프린세스 메이커, 엑스윙이었다. 더운 여름 새벽 컴퓨터 불빛이 밖으로 새 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 담요를 덮고 땀을 쏟아가며 오락했던 기억이 선하다.
그렇게 오락에 열정적이었기에 나는 대학생이 되어 미친 듯 오락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처음 대학생이 되어서는 컴퓨터보다 재미있는 것들이 많아서 컴퓨터에 빠져들지 못했다. 대학생이 되어 본격적으로 컴퓨터에 빠지게 된 것은 PC 통신을 하게 되면서였고, 군대를 다녀오자 ADSL이라는 초고속 인터넷 망이 세상에 깔리게 되었다. 그래서 대학 복학을 하게 되면서 나는 미친 듯 오락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내 컴퓨터 오락은 <디아블로 2>에서 절정을 찍었다. 학교의 중간고사도 빼먹고 피시방에 앉아서 오락을 했다. 식음을 전폐했고 딱 죽지 않을 만큼 먹고 오락에 열중했다. 지금 내 아들 녀석이 주말이면 하루 10시간이 넘게 오락을 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자니 피가 거꾸로 솟는데 사실 내가 욕할 입장은 못된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걸 확인할 뿐이다.
미국에서 공부했을 때는 플레이스테이션 2에 미쳐있었다. 내게는 그 오락이 또 하나의 영어공부였다. 모두의 골프 3을 거의 신급 수준으로 쳤고, 온갖 액션 오락을 섭렵했다. RPG오락을 하다 막혔던 어느 날 그 비싼 콜렉트 콜로 여자 친구(지금의 아내)에게 전화해 공략집을 사서 읽어달라고 했던 기억도 난다. 그렇게 나는 완전히 오락에 빠져 지냈다. 다시 한국에 귀국했을 때 지금의 아내가 내 손을 잡고 용산으로 가서 플레이스테이션을 사줬다. 자기가 오락기를 사줬으니 오락한다고 연락 끊지 않고 전화를 받겠다는 조건이었다.
정말 미친 듯 오락을 해보았기에 지금은 참아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
물론 은퇴 후 내 삶에는 온종일 오락하는 것도 포함되어있다. 참 할 것 많아서 좋다.
오락을 통해서 내가 얻은 것은 집착하여 목표를 달성해내는 것(하나를 시작하면 끝장을 보겠다는 마음)과 어려운 것들도 시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너무 미화시킨다. ㅋㅋㅋ) 지금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오락들은 <다크소울> 같은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오락과 멋진 스토리가 있는 오락이다. 어쩌면 요즘 내가 여러 가지 무모한 도전을 겁 없이 시도하는 것이 이런 오락들 덕분 아닐까?
3. 훌쩍 떠나기
휴대폰이 없던 시절이 있었다.
생각해보니 휴대폰이 없던 시절이 내 인생의 절반 가량된다. 제대 후 처음으로 휴대폰을 구입했다. 대학생이 되면서 처음으로 삐삐를 샀다. 사실 삐삐와 전화기가 있었지만 활용도가 높지는 않았다. 당시 우리들은 약속을 정하면 정한 시간에 약속 장소에 나타나는 것이 당연했다. 지금의 시간 약속과는 개념이 많이 달랐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10분 정도 늦으면 미안해서 어쩔 줄 몰랐다. 요즘은 "도착하면 전화해."다. 그래서 더욱 요즘의 시간에 대한 개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물론 업무적인 시간 개념은 여전히 예전의 시간 개념과 같다.
그때 나는 가끔 혼자 어디론가 떠나곤 했다. 친구들과는 약속한 날짜의 시간에 맞춰 만나면 되는 것이었기에 그 외의 시간에 훌쩍 어디론가 떠나곤 했다. 타본 적 없는 버스를 타고 가본 적 없는 동네를 가보기도 하고, 책에서 읽었던 곳을 찾아 떠나기도 했다. 연애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를 찾는 사람이 드물었다. 고향집에는 가끔 전화를 한 번씩 드리면 되었기에 나는 이런 "사라짐"을 자주 시도했다.
딱히 목적 없이 새로운 곳을 가서 걷다 보면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게 된다. 특히, 부산에서만 자랐던 놈이라 서울이나 그 외 다른 도시의 모습은 두렵지만 신선했다. 처음에는 새로운 서식지 근처의 반경을 늘려가는 방식이었지만 어느 날 전혀 외딴곳을 한 번씩 가보는 것 그것이 참 좋았다.
지금처럼 모든 것이 네트워크로 연결된 세상이 아니었고, 지도도 없었다. 걷고 있는 길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막다른 길인지 알지 못한 채 걷는 것은 나를 긴장하게 했고 내 온몸의 촉수를 섬세하게 만들었다.
이런 행동이 습관이 되어 지금의 아내와 연애를 할 때 연락이 두절된 경우가 가끔 있었는데 아내는 그것을 인내하기 힘들어했다. 이런 떠남과 돌아옴에 아내도 익숙해졌는지 이제는 내가 어디에 있든 별 상관하지 않고 잘 지내고 있을 거라고 믿는다.
전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이렇게 혼자 보내는 시간 동안 나는 참 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처음 가본 동네 길가에 우두커니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몇 시간을 보냈다. 그냥 그들의 걷는 모습과 가는 길을 보며 그들이 어디로 가는지, 누굴 만나러 가는지 상상했었다. 또 내가 앉아있는 이 동네에 숨어있는 이야기가 없을까 생각하며 이리저리 둘러봤다.
몇 년 전, 알쓸신잡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전문가들이 나와 그들의 방식으로 세상을 보는 눈을 소개했었는데 그 프로그램을 보면서 나는 그 시절 생각이 자주 떠올랐다. 그리고 지금 다시 가보게 된다면 훨씬 더 새롭고 다양한 것들이 눈에 들어올 거라고 기대해보았다.
조금씩 시간 날 때 예전에 훌쩍 들렀던 그곳을 찾아가 볼 계획이다. 그 첫 번째 장소는 아마도 부석사 무량수전이 될 것 같다. 대학생 때 최순우 씨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를 읽고 훌쩍 떠나서 가보았던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또 어떤 새로운 생각이 자라날지 궁금하고 기대된다.
이 글을 쓰면서도 다시 일탈을 꿈꾼다.
일탈은 갇혀있다는 생각이 만들어낸 반응의 단어다. 자유하는 삶이라고 생각하지만 아직 자유하지 못하다는 속내가 드러난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일탈을 꿈꾼다.
- 브런치 작가 김경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