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을 주저하는 나에게 던져준 메시지의 힘!
졸속(拙速)이 지완(遲完)을 이긴다.
몇 년 전 우연히 누군가의 블로그에서 본 이 한 줄의 문장이 내 사상을 변화시켰다.
나는 준비가 철저한 사람이었다. 피곤할 정도로 몰입해 사전에 가능한 많은 자료를 확보하고 검토하고 시뮬레이션을 하는 습성이 있었다. 이러한 준비 덕분에 실행을 하는 그 순간은 오히려 쉬웠다. 이런 습관은 학창 시절부터 계속되어오던 것이었다.
특히 실기시험을 보는 과제에 공을 많이 들였다. 피아노 치기, 노래 부르기, 리코더 불기, 영어책 외우기, 배구, 농구, 축구 등과 같이 몸을 써서 하는 모든 것들은 내 몸에 익숙해져야만 제대로 된 실력이 나왔기 때문에 연습을 많이 했다. 아마 연습을 이끄는 힘은 성적이라는 결과에 대한 집착 때문이었으리라.
대학을 가고 공부와 성적을 내 삶에서 뚝 떼어버리고 난 뒤, 나는 노력할 일이 없었다. 시험은 안 보면 그만이었고, 성적은 못 받으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9년간 대학생으로서 살았다.
생각해보니 초중고 12년간은 열심히, 대학 9년간은 느긋하게 삶을 관조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9년 중 열심히 했던 기간도 조금 있다. 미국에 가고 싶어 발악하던 시기에 터졌던 911 때문에 미국 비자를 받으려고 영어 인터뷰를 준비했던 때, 미국에서 계속 머무르고자 혼자 편입을 준비하던 때가 그랬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던 대부분의 시간을 나는 흘러가는 대로 흘러보내며 내가 원하던 것들을 유유히 체험해보는 기간으로 보냈다.
그리고...
다시 열심히 무언가를 시작해야겠다고 결심했던 순간, 바로 어제 글에서 언급했던 자기 계발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그때 나는 다시 예전처럼 철저하게 준비하기 시작했다.
시작은 서재를 정리하고 읽을 책을 선택하는 것이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나는 시험공부하듯 책을 읽어야만 성과가 나온다는 생각에 점점 빠져들었다. 읽어야 할 책의 권 수를 정하고, 목표했던 기간 동안 그 책을 읽어야 했고, 다른 일 때문에 목표를 놓치면 다시 계획을 수정했다. 예전에 공부를 하며 성과를 보았던 그 방법대로 나는 기보를 보고 바둑을 두듯 짜 맞춰진 순서대로 하나씩 하나씩 차곡차곡 준비했던 대로 해 나갔다.
성과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자기 계발서를 읽을수록 해야 할 과제는 많았고, 배워보고 싶은 관심분야도 늘었다. 시간을 쪼개어 조금씩 새로운 것을 늘려가면서 점점 겁이 나기 시작했다. 해보고 싶은데 사전 준비에 다시 공을 들여야 한다는 생각에 시도를 주저한 것이다. 그런 식으로 미룬 것들이 하나 둘 쌓여갔다.
물론 몇 개는 새롭게 시작했다. 독서를 하면서 메모를 시작했고, 시간계획표를 쓰고 독서노트를 만들었던 것과 같이 제법 많은 일을 차례차례 하고 있었고 결과물도 쌓고 있었다. 하지만 먹어치우는 속도보다 먹지 못하고 쌓이는 그릇이 더 많았다. 버려야 채운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무엇하나 놓치기 싫었던 욕심에 버리지 못하고 내 시간을 더 쪼개 보려 고민했지만 시작은 못한 채 자꾸 쌓기만했다.
그때 “졸속은 지완을 이긴다”라는 문장을 만났다.
처음엔 시큰둥했는데 자꾸만 그 문장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관심이 생기자 찾아보게 되었고 <손자병법>에 있는 문장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디테일, 세련미, 완벽을 꿈꾸는 내게 어울리지 않는 말이라 치부하고 한쪽으로 던져놓은 문장이었는데 자꾸만 이 문장이 내 눈에 걸렸다. 그때 나는 운동을 주저하고 있었고, 책 쓰기를 주저하고 있었고, 유학을 주저하고 있었고, 내 삶에 대한 목표 설정도 주저하고 있었다.
이유는 앞서 말했듯 내 준비가 완벽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운동을 계획할 때도 나에게 맞는 운동이 무엇인지에서부터 장소와 시간, 그리고 장비까지 사전 준비와 탐색의 시간이 필요했기에, 시간 날 때 준비를 마치고서 시작해도 된다는 자기 관대함에 빠져 지금 당장 시작하지 못하는 이유를 타당하다 여겼다.
책 쓰기도 마찬가지였다. 죽기 전에 내 이름으로 된 책 한 권 쓰겠다는 결심은 아주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었지만 그건 단기 목표가 아닌 먼 미래에 어쩌면 이뤄질 희망사항 같은 것이었다. 매년 초 연간 목표를 세우면서 빠지지 않고 썼던 게 “올해는 꼭 책을 쓰기 위한 준비를 마친다.”였다. 아마도 그 목표를 5~6년째 쓰고 있을 때였다.
“졸속”이라는 단어에는 부정적인 느낌이 있었다. 하지만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스피드와 납기를 중시하는 내 업무 스타일을 볼때, 졸속이라는 단어는 어울릴 것도 같았다. 졸속에 있어 졸이 아닌 속을 우선으로 놓으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다. 나를 마취시켜 완벽하려는 내 집착을 속이고 일단 시작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으로 내가 졸속으로 시작한 것이 바로 대학원에 지원을 한 것이었다.
30대 중반부터 아내에게 대학원에 가겠다고 말했고, MBA는 미국에서 해야겠다는 욕심에 제대로 하지도 않는 영어책만 몇년째 붙들고 있었다. 매년 아내가 대학원 언제 가냐며 물어봐도 “준비가 덜되었다”, “최사가 바쁘다” “내년에 진급이라 올해는 좀 그렇다”라며 핑계를 대고 있었다. 그러다 나는 갑자기 일단 외국이 아니라 우리나라라도 가보자 생각했고 (석사 두 번 하면 된다라고 생각했다.) 그날 바로 몇 군데 대학원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집 요강을 확인했고 시험이 필요한 학교를 리스트에서 지웠다. 당장 지원이 가능한 학교를 추려서 두 곳에 원서를 냈다. 졸속으로 해버린 것이다.
한 달 뒤 두 곳에 면접을 보았고 두 곳 모두 합격했다. 일단 시도하다 보니 빠른 결과를 얻게 되었다. 이제는 내가 주도권을 쥐고 등록을 할지 말지 결정하면 되는 것이었다. 막상 졸속으로 추진했지만 결과가 좋아서 비슷한 방법으로 다른 몇 가지 해보고 싶은 것들도 시도해보기 시작했다. 드디어 시도를 주저하지 않게 된 것이었다.
학창 시절 선생님께서 질문을 하면 대답을 할까 말까 고민할 때가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답이 맞는 답이라고 생각했지만, 머릿속으로 몇 번의 자기 검열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다른 친구가 대답을 하거나 선생님이 기다리다 못해 답을 알려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틀린다는 것이 부끄럽고, 나선다는 것이 두려웠다. 하지만 주저함은 나를 더욱 주저하게 만들었지 나를 성장시키지는 못했다.
시도는 시도일 뿐이다. 시도가 곧 결과는 아니다. 시도해서 실패할 수도 있고 상처를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시도는 시도를 했다는 과정과 결과가 남는다. 그게 바로 경험이다.
머릿속 수많은 도전은 허상이다. 몸을 통해 드러나지 않는 것들은 모두 형체가 없는 연기일 뿐이다. 과정을 이끌고 성과를 만드는 것은 모두 행동이 만드는 산물이다.
RE : 다시, 한 번 더
이 접두사에 주목하자.
삶은 딱 한 번만 주어졌지만, 그 속에는 엄청나게 방대한 시간이 존재한다. 시간은 빈부귀천을 떠나 모두에게 공평하다. 우리는 이 시간이라는 가장 공평하고 귀중한 자산을 철저하게 활용해야 한다. 시간은 흐르고 있고 존재하지만 축적하지는 못한다. 시간은 인격을 가리지 않고, 기억력도 없다. 인간 자신만이 그 시간을 주관적으로 기억할 뿐이다.
나는 생각만 조금 바꿨다. 그러면서 좀 더 빨리 변하기 시작했다. 졸속(拙速)이었지만 졸(拙) 이 아닌 속(速)에 방점을 찍었다.
실패했다고 창피해하지 말자. 어설프다고 주저하지 말자. 시작보다는 결과가 중요하다. 100미터 달리기도 출발을 1등으로 한 사람을 기억하지 않는다.
다시 하면 어떤가? 아니 다시 하는 것이 얼마나 멋진가?
실패를 두려워 하고 완벽에 매몰되어 시도를 주저하지 않기를 바란다.
내가 경험을 통해 확실히 알게 된 것은 졸속이 지완을 이겼다는 것이다.
여러분도 졸속에 승부를 걸어보자.
건투를 빈다.
- 작가 김경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