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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2년 차, 갑자기 눈 앞이 하얘졌다.

소포모어 징크스(Sophomore Jinx)가 내게도 찾아왔다.

by 김경태

(* 이 글은 지난달 “나의 번아웃 증후군 보고서”라는 글을 다시 보완하여 쓴 글입니다.)




나는 쓰러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얻었기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글을 쓸 수 있다.





그 날, 참 좋았던 그 날


모든 게 순조로웠다. 일정에 맞춰 하나씩 딱딱 들어맞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한껏 여유를 부려도 괜찮겠다 싶었다. 그랬다.


2018년 6월 25일 첫 책 <일년만 닥치고 독서>를 출간하고 나는 한껏 고무되어 있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이름 대신 “작가님”이라며 추켜세워줬다. 단지 책 한 권을 썼을 뿐인데, 책이 잘 팔리는 것도 아닌데, 매스컴을 탄 것도 아닌데 나는 자주 발개진 얼굴로 손사래를 치며 어설픈 작가인 양 겸손을 떨었다.


단지 책 한 권은 아니었다. 40년 내 인생의 기억들을 죄다 훑었고, 몇 번을 울컥하며 자판을 눌렀다. 내가 직적 겪었던 일들을 매우 주관적으로 엮었다. 글 속의 주인공은 나였고, 내 일기였고, 내 역사였다. 그렇게 몇 달간 내 노력의 8할 이상을 짜넣어 만든 책이었다.

함께 책을 준비하던 사람들이 내 속도에 놀라곤 했다. 일주일에 한 번 만나는데 만날 때마다 나는 그들보다 몇 배는 더 진도가 나가 있었다. 나는 배운 대로 납기를 정하고 그 납기에 맞춰 하루의 진도를 나갔다. 잘 쓰고 못쓰고를 떠나 일단 나와 약속한 분량을 채웠다. 매도 맞아본 놈이 잘 맞는다고 글도 쓰다 보니 더 많은 기억들이 고구마 줄기처럼 엮여 나왔다. 책상에 앉아 두 시간만 집중하면 A4 두장은 너끈히 채웠다.


그렇게 급히 쓴 첫 책이었지만 칭찬 일색인 주변의 인사에 나는 더 좋은 성과물을 빨리 내고 싶어 결심을 서둘렀다.


“매년 1권의 책을 내겠습니다.” 내 질렀다.


첫 책이 출간되고 몇 개월 동안 바빴다. 몇 개의 강연과 칼럼, 그리고 더 바빠지는 회사일. 어느 하나 놓칠 수 없었기에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보니 12월이었다.


‘더는 미룰 수 없겠다. 약속도 했는데 어서 준비해서 두 번째 책을 써야겠다.’


첫 책은 전문가의 도움을 받았으나 아쉬움이 많았다. 그래서 두 번째 책은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내 손으로 해보고 싶었다. 그래야 평생 책을 쓰면서 밥 벌어먹고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오롯이 나 혼자서 모든 걸 해보기로 했다.


그리고 두 달...


모든 게 순조로웠다. 그동안 제목과 목차를 확정했고, 총 5장으로 계획한 것 중에 1장을 거의 다 썼다. 매일 하루 1 꼭지씩 계획대로 채워나가고 있었다. 주말이면 2~3 꼭지를 더 쓸 것이니 이대로라면 한 달 안에 초고가 완성될 것이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회사를 마치고 퇴근길에 도서관을 찾았다. 컨디션도 좋았고 겨울답지 않게 따뜻한 날씨는 더없이 좋았다. 열람실에 앉아 어둑어둑해지는 창밖을 바라보며 노트북을 열었다. 그리고 글을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눈앞이 하얘졌다. 그리고 나는 멈출 수밖에 없었다.




뭐지?


열심히 두드리던 키보드를 멈췄다. 갑자기 시력을 잃은 것처럼 화면 속 글자들이 모두 점으로 보였다. 눈이 나빠졌나? 얼굴을 모니터에 더 들이밀었다. 글자가 뿌옇게 보였다. 피곤해서 그런가? 일단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서관 앞 벤치에 앉아 어두워진 하늘을 보며 가로등 불빛을 응시했다. 가로등 불빛도 뿌옇게 보였다. 뭔가 이상했다. 분명 눈앞에 사물들이 보이는데 자세히 집중해서 쳐다보면 흐릿해졌다. 집중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걱정이 되었다. 너무 집중해서 작은 글씨를 쳐다보다 노안이 온 것인가? 이런저런 생각들로 벤치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나는 점점 걱정에서 절망으로 기어들어가고 있었다.


시간이 없는데, 오늘 하루 일정에서 벗어나면 내일 두배를 써야 하는데 어쩌지? 모르겠다 일단 집에 가자. 곧바로 짐을 싸서 열람실을 나왔고, 차를 몰아 집에 왔다. 8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나는 곧바로 샤워를 했고, 아내에게 피곤하다 말하고서는 침실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그리고 다음 날, 그다음 날... 도 나는 책상 앞에서 집중할 수 없었다. 회사일은 상관이 없었는데 노트북을 마주하고 있으면 가슴이 답답했고 머릿속에 아무런 생각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냥 화면을 쳐다보기 싫었다.


뭐지? 난 멈춰버렸다.



멈춤(STOP)


2019년 2월 어느 날 내 글쓰기는 멈춰버렸다. 며칠 쉬면 괜찮아질 줄 알았지만 착각이었다. 휴식은 충전이 아닌 고갈을 부추겼다. 난 점점 더 조급해했고, 쉼이 불편했다. 자꾸 책상에 앉아서 뭔가를 쓰려고 시도했지만 쓸 수 없었다. 내가 쓰고 있는 글들이 모두 누군가의 글을 베껴 쓰고 있는 것 같았다. 내 머릿속에서 나오는 내 스토리인데도 어느 책에서 읽었던 것 같고, 첫 책에서 언급했던 내용 같았다. 자꾸만 자기 검열이 강해지면서 정말 쓸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멈췄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 내가 겪은 그 상황이 “번아웃”이라고 불리는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번아웃 증후군 (Burnout Syndrome)

의욕적으로 일에 몰두하던 사람이 극도의 신체적/ 정신적 피로감을 호소하며 무기력해지는 현상
<네이버 지식백과>




초조함 그리고


불안했다. 내가 계획해 두었던 일정이 틀어진다는 것이 불편했다. 이대로 놓으면 영원히 쉬게 될 것 같았다. 머리가 복잡했다.

<아주 작은 습관의 힘>의 저자 제임스 클리어는 "하루는 쉬어도 이틀은 절대 쉬지 마라"라고 했는데, 어떡하지. 가슴이 답답했다.

주말을 이용해 부산을 찾았다. 부산은 어릴 때부터 자라온 고향이다. 아직 양가 부모님이 부산에 살고 계셔서 일 년에 네댓 번 들른다. 부산은 언제나 내게 피난처나 안식처 같은 포근함과 따뜻함을 동시에 느끼게 해주는 곳이다. 그래서 기분전환이 필요하거나 새로운 무언가를 시도하는 순간에 나는 습관적으로 부산을 찾는다. 부산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먹고 마시며 보내는 며칠의 시간은 항상 내게 엄마의 품 같은 느낌을 선물하곤 했다.


지금 내게 생긴 이 문제도 부산에 가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운전대를 잡았다. 차를 몰고 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 계속 "왜?"를 고민했지만 답을 찾지는 못했다.

부산에 가면 나는 항상 새벽에 황령산에 오르는 습관이 있다. 그곳에서 바라보는 광안리 앞바다의 전망은 그 어느 것보다 최고이기 때문이다. 피톤치드 가득한 나무 냄새와 함께 폐부 깊숙이 들어오는 차가운 공기는 내 육체를 넘어 정신을 정화시키는 느낌이다. 난 그 느낌에 취해 20년 가까이 매번 부산에 올 때면 일출 전에 황령산을 오른다.


그날도 어김없이 새벽에 황령산을 올랐다. 그곳에 가면, 그곳에서 뻥 뚫린 부산 바다를 바라보면 달라질 거라 기대했다. 황령산은 너무 추웠다. 매서운 칼바람에 머릿속에 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15분쯤 바다를 보았을까? 추위를 피하고자 차로 돌아와 시동을 걸었다. 음악이 듣고 싶어 졌다. 이곳에 올 때면 항상 듣게 되는 러브홀릭스의 "Butterfly"를 눌렀다.

두두 두둥~~~~ "심장의 소릴 느껴봐!! ~~~ 벅차도록 아름다운 그대여, 이 세상이 차갑게 등을 보여도~~~ 눈부신 사람아 난 너를 사랑해~~~"

뭔가 탁하고 팽팽했던 실이 끊어지는 느낌! 음악을 켜면서 보았던 마크가 내 생각을 잡았다. 가운데 있는 저 두 줄( || ). PAUSE. 그래 저거다.

사실 그때 난 내 작가로서의 삶이 멈춰버릴 거라는(STOP) 불안함에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 마크를 보게 되면서 잠시 멈춤(PAUSE)를 발견했다. 그렇다. 잠시 쉴 수 있는 거다. 잊지 않고 유념하고 있으면 된다. 저 버튼을 누르면 처음이 아닌 내가 멈췄던 그 지점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 아니던가. 이걸 머릿속에서 떠올리게 되자 갑자기 내 정신은 엄청난 청량감을 맛본듯했다. 그리고 더 이상 두려움에 나를 가두지 않고 '잠시 멈추게 되었는데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라며 쉼을 계획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채움 (REFILL)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4개월이 훌쩍 지난 뒤였다. 그 기간 동안 나는 모든 걸 멈추고 쉬었다. 책을 읽었고, 영화를 보고, 재미있는 드라마를 보았다. 오래도록 참아왔던 비디오 게임 몇 편의 엔딩도 보았다. 정말 신나는 시간이었다. 그동안 달콤한 미래를 위해 현재를 인내하며 지냈었다. 바짝 조였던 허리띠를 풀었고 무릎이 쑥 나온 츄리닝을 입었다. 책도 배울 것이 있는 지식교양서적 위주의 편식만 하다가 오랜만에 무협지와 판타지 그리고 유명한 소설을 읽었다. 독서가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몇 개월을 쓰는 걸 멀리한 채 나중에 하자며 미뤄두었던 예전에 즐기던걸 하면서 시간을 채워가다 보니 어느 날부터 글이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처음 계획은 다 틀어진 상태였기에 천천히 시간을 충분히 가지고 다시 시작하자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연초에 썼던 원고를 다시 읽어 나갔다. 썼던 글 대부분을 지웠다. 나는 완전히 새롭게 다시 쓰기를 계획했다. 그때부터 4개월간 다시 책을 쓰기 시작했고, 결국 A4 용지 120매의 초고를 완성했다.

초고를 완성하고 다시 한 달을 또 쉬었다. 그동안 음악을 듣고,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여행을 했다.

한 달 뒤, 썼던 원고를 읽으며 퇴고를 시작했다. 완벽하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자꾸 욕심이 났다. 썼던 글을 계속 고치고 있던 시기에 아내가 그만 고치고 투고하라고 말했다.
​난 고치기를 중단하고 출판사에 투고했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


이런 일을 계기로 쉼이라는 것의 의미를 조금 알게 되었다.

컴퓨터 펑션키 F5번. 새로고침.


쉼 없는 달리기는 없다. 일하기 위해 쉬는 것인지, 쉬기 위해 일하는 것인지 아직 모호하긴 하지만 현재를 인내한다는 건 나 자신을 갈아 없애는 것 같다는 걸 느낀다. 지금이 즐겁지 않은데 미래가 즐거울 수 있을까? 과정이 만족스럽지 않은데, 결과에 만족할 수 있을까?

그래서 이제 가끔 새로고침을 한다. 아주 가끔은 전원을 끄고 재부팅을 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다시 새것처럼 쌩쌩한 나를 발견한다.

그때는 알아채지 못했는데 지나고 나서 나는 내가 겪었던 일이 <번아웃 증후군>과 <소포모어 징크스>라는 걸 알았다. 물론 모두에게 이런 현상이 오는 것은 아니다.


내 작가로서의 두 번째 삶을 살고 있던 2년 차에 겪게 된 이 사건은 “나는 쓰러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얻었기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글을 쓸 수 있다.”라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참 다행이다.


- 작가 김경태 -


소포모어 징크스 (Sophomore Jinx)

‘전편만 한 속편 없다’라는 말처럼 전편의 성공에 힘입어 속편을 제작했다가 기대만큼 흥행하지 못한 경우에 쓰는 말이다. 흔히들 2년생 징크스라고 부른다.
처음 1년간은 활력과 패기에 넘쳐 긴장을 풀지 않고 있다가 2년 차가 되면 그 텐션을 지속하기 힘들고 자못 우쭐해지거나 기대를 부담스러워해 부진하는 경우다.
이 슬럼프를 극복하는 방법은 개인에 따라 다르며 뛰어넘게 되면 오히려 장기적인 발전에 도움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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