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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는 나, 타인이 보는 나. 그 어딘가에 있는 나

내적 자기 인식 vs 외적 자기 인식

by 김경태



오늘은 좀 어려운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사실 지금 내가 쓰려고 하는 이 얘기가 오늘 받은 질문에 대한 올바른 답인지도 모르겠다. 질문이 이해가 안 되는데 질문에 대답한다는 매우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오늘 질문지를 받아 들고 고민이 많았다.


“써야 한다”라는 강박과 “쓸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 그리고 쓰겠다고 마음을 먹었을 때는 “쓴 게 맞나?” 이런 느낌적인 느낌.


리더가 건네 준 참고자료를 정독했다. 글을 읽으면서 메모했던 내용 중 “내적 자기 인식” 과 “외적 자기 인식”이라는 개념이 머릿속에 와 닿지 않았다.


단어를 바꿔 “내가 생각하는 나(내적 자기 인식)”와 “타인인 바라보는 나(외적 자기 인식)”는 어떻게 다른가? 이렇게 해놓고 보니 개념이 잡히기 시작했다. (똑똑한 분들은 항상 어려운 단어로 어렵게 표현한다.)


그래서 내가 이해한 이 개념을 기준으로 써보겠다.




내가 알고 있는 나! 그게 나야!

나는 시시각각 변한다. 내 몸속의 세포가 매 초마다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고, 내 생각도 순간순간 상황에 따라 발화와 소각을 반복한다. 나는 내가 항상 동적으로 움직이고 있고, 에너지가 넘치고, 존재감이 있는 사회적 존재라고 생각한다.


나는 혼자 존재할 수 없는 사회적 존재다. 내 생물학적 가계도 상의 위치와 내 직업과 직장 그리고 내 인간관계 속에서 위치(좌표)로 존재한다.


나는 그 위치에서 나를 아는 주변인이 예측 가능한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fit이라는 단어가 알맞겠다. 정확히 (exactly) 맞지는 않더라도 약간의 여유를 준다면 그들이 생각하는 그 박스 안에 존재하는 사람일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나 자신(ego)은 유일하게(the only one) 존재하기를 원하지만 말이다.



네가 알고 있는 너? 그건 네가 아니야!

처음 대학을 갔을 때, 과에서 나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물론 공대 건물에서도 나를 아는 사람은 딱 1명 내 고등학교 동창 녀석뿐이었다. 녀석이랑은 아주 가끔 식당이나 술집이 즐비한 거리에서 마주치는 것이 다였다. (동문회도 나가지 않았으니)

나는 우리 과 사람들에게 새로운 모습의 나를 각인시켜 나갔다. 본성은 속일 수 없겠지만 나는 한껏 나를 꾸몄다. 고등학생 때와는 다른, 부모의 품을 벗어난 새로운 나라는 존재로 나를 각인시키고 싶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성과를 보였다. 그들이 아는 나는 오랫동안 내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했던 나에 가까웠다. 마치 <빅픽쳐>의 주인공 같다고 할까?


3개월의 대학생활 후 재수를 해보겠다고 다시 고향으로 내려간 나는 금세 예전의 나로 회귀했다. 부산에서는 시시각각 내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고 있었기 때문에 18년간 살아왔던 나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재수를 실패하고 다시 돌아간 1996년 3월의 대학에서 나는 사뭇 놀라게 되었다. 작년의 나는 한껏 나의 존재감을 새롭게 각인하고자 노력했었는데, 그들이 기억하는 나는 매우 단편적으로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사람은 오랜 기간 동안 부대끼며 공감을 하지 않으면 겉보기 등급으로 기억하는구나.”라는 것을 깨우쳤다. 대부분의 동기들이 기억하는 나는 “부산에서 온 부잣집 아들 같아 보이는 날라리”였다.




나는 내가 추구하는 모습대로 사람들이 나를 인식하고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 간극은 매우 컸다. 첫인상에서 사람의 호감도가 좌우된다고 하지만 결국 첫인상과 현재가 꾸준히 일치하는 경우가 드문 것처럼, 내가 원하는 모습은 나의 단편적인 한 면일뿐이었다. 나를 하나의 온전한 인격체로 인식하게 만드는 시간이라는 함수가 끼어들게 되면 그건 나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영역에서 그들의 판단이 존재할 가능성이 크다.


앞서 간단한 예로 제시했던 대학 입학 때의 내가 추구했던 모습과 과친구들이 나를 바라보는 모습 사이의 간격은 25년이 지난 지금 많이 좁혀졌다. 이제는 그들의 판단 안에 내가 존재한다.


어쩌면 내가 원했던 나에게 내가 다가가고 있는 것일 수도 있고, 그들이 나를 보는 관점이 망원렌즈에서 광각렌즈로 변경되었을 수도 있다.


사실 내가 보는 나, 타인이 보는 나와 같은 이런 관념적인 개념의 내용은 매우 중요하게 생각되지만 또 한편 하나도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결국 내가 사는 세상이고, 타인과 더불어 살아야만 하는 세상이기에 너와 내가 생각하는 “나”가 일치하면 좋겠지만 달라도 “나”가 손해 볼 것은 거의 없다. 왜냐면 “나” 잘난 맛에 살면 그만이니까. “나”가 강한 사람들은 그렇게 살고 있으니까. 또, 수많은 책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타인의 기준과 시선에 신경 쓰지 않는 것이 진정한 나를 발견하는 길이라고”


매우 어렵다. 그래서 좀 더 오랫동안 깊이 생각해 볼 문제다. (더 생각해볼 예정)




또 하나.


오늘 받게 된 자료에서 재미있는 단어 두 개를 만났다.


“자기 수용” 과 “자존감” 이 두 단어다.


이 두 단어를 자신 있게 명확히 나에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내게로 오길 바란다. (내가 밥과 술을 대접하겠다.)


이 이상하고 모호하고 흐릿하고 어슴푸레한 두 단어를 보고 생각이 많아졌다. 나는 내가 “자존감(영어로 selfesteem)”이라는 단어와 “자존심(pride)”이라는 단어를 설명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그런데 거기에 “자기 수용”이라는 새로운 단어가 끼어들었다. 뭐지? 이거?


자료에서 “자기 수용”은 “변화와 성장이 전제조건이다”라는 문장을 봐서 뭐가 차이가 보이는 것 같은데 모호하다. <자존감의 여섯 기둥>도 읽어야 하는가 보다.


이런 형이상학적 질문은 언제나 어렵다.


- 작가 김경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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