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언제나 칵테일은 화이트 러시안으로 합니다. 뭐 이렇게 말하면 술을 좀 아는 것처럼 보이려나요. 아니면 벌써 애송이인 게 탄로 났나요?
사실 술은 잘 모릅니다. 술도 약하고 술맛도 잘 몰라요.
화이트 러시안은 조엘 코엔 감독의 <위대한 레보스키(1998)>란 영화를 보고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레보스키 역을 맡은 제프 브리지스가 영화 속에서 계속 입에 달고 사는 술이 화이트 러시안이거든요.
색깔도 하얀 것이 참 맛있어 보였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름이 멋졌어요. 화이트 러시안이라니. 화이트 아메리칸이나 화이트 이탈리안이었다면, 글쎄요. 별로 끌리지 않았을 것 같네요.
순수함과 거침이 공존하는 그런 느낌이랄까요.
그때부터 칵테일은 화이트 러시안으로만 마시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친구들과 어쩌다 바에 가게 되면 늘 화이트 러시안만 주문했습니다. 특히, 메뉴판을 보지도 않고 주문하는 것을 즐겼지요. 그러면 왠지 술을 좀 아는 사람이 된 것 같았거든요. 사실 그 술 이름밖에 모르면서.
간혹 메뉴에 화이트 러시안이 없는 데도 바텐더가 아무렇지 않은 듯 만들어 줄 때 기분이 더 좋았습니다. 숨겨진 메뉴를 알고 있는 특급 단골이 된 것 같았죠.
그렇게 어설픈 흉내를 내고 다니다 결국, 큰코다치는 일이 있었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신촌에서 1차로 막걸리를 마시고, 2차로 창천교회 옆에 있는 '거품'이란 바에 갔습니다.
전 역시 여유로운 제스처로 화이트 러시안을 주문했지요.
한 잔을 마시고, 두 잔째를 마시는데 갑자기 몸에 피가 돌지 않는 싸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응? 제 얼굴 옆에 가게 바닥이 있고 티슈들이 흩어져 있지 않겠어요.
친구의 말에 따르면 저는 마치 친구에게 안녕을 고하듯 눈을 지그시 감고 평화로운 표정으로 천천히 쓰러졌다고 합니다. 마침 바닥에 있던 티슈 상자 위로 쓰러지면서 티슈들이 공중에 솟아올랐는데, 그 전체적인 모습이 주윤발 주위로 하얀 비둘기들이 날아오르는 '영웅본색'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했다고 합니다. (그런 장면이 정말 있나요?)
다행히 전 바로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친구 집에 가서 잘 잤습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화이트 러시안은 입에도 대지 않고 있습니다.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화이트 러시안은 깔루아와 보드카 그리고 우유를 넣어 만든다고 하네요. 보드카가 들어가서 그렇게 독했나 봅니다. 애송이가 뭐가 들어가는지도 모르고 마셨던 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