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케터의 책 읽기
안젤리나 졸리가 방한했다.
유엔난민기구 특사의 자격으로 방한하여, 난민문제에 소신을 밝혀 온 정우성씨와 만났다.
그녀와의 대담 중, 정우성은 이렇게 얘기한다.
“난민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목소리를 크게 내는 것일 뿐, 국민 대다수는 아직 난민에 대해 잘 몰라서 의견이 없거나, 난민을 옹호하지만 상당수는 조용하기 때문”
(http://www.hani.co.kr/arti/society/rights/868785.html#csidx45d9fed9a0b555fb904484e79aa3b0c )
나 역시 그랬다. 아무것도 몰랐기에, 페미니스트에 대해 의견이 없었다.
도처에서 페미, 페미니즘, 페미니스트를 이야기 할 때 난 정확히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여성의 차별을 불쾌해하는 사람쯤으로 여겼기 때문에 어떤 자리에서도 그 화두를 내가 먼저 꺼내지도 않았다. 이미 얘기가 나온 자리에서는, 뭐랄까 나는 진보적이니까,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대접받아야 한다며 그저 막연하게 페미니스트를 '이해'해야 할 만한 사람 혹은 귀기울며 '볼 만한' 사람으로 취급하고 말았다.
이 책의 저자, 아디치에도 처음엔 그랬다. 페미니스트를 몰랐고, 사전을 찾았다. 그러나 바로 그 무지는 그녀가 느끼는 불편함이 어디서부터 출발하는지 따져 묻고 관찰하며 기록하게 만들었다. 마침내 이 기록은, 그녀나 나 같이 '잘 모르는' 이를 일깨우기 위해 테드 강연으로 세상에 소개되었고, 250만회 유튜브 조회라는 경이로운 기록과 함께 비욘세의 노래 가사로도 인용된다.
#페미니스트.
모든 성별이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평등하다고 믿는 사람.
그렇다. '모든 성별에' 방점이 있다. 그간 내가 착각한 것은 페미니스트를 마치 '여성의 인권'에만 관심이 있고 여성의 인권 신장을 위해 싸워온 사람쯤으로 생각한 것이다. 오히려 페미니스트는 어떤 의미에서는 환경운동가에 가깝다. 인류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달려있는 지구를 지키고 보존하는 것이 인류를 위한 길이라고 믿는 사람들. 우리의 후손을 위해 더 나은 환경을 물려주자고 몸소 실천하고 말하는 사람들. 페미니스트도 그렇다. 우리 아이들이 지금보다 좀더 공정한 세상에서, 좀더 행복하게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자고 말하는 이들이다. 전통적인 성역할이 신체적인 차이에서 기인한 과거와 달리 기술과 지혜, 언어가 세상을 이끌어가는 시대에 과거를 답습하는 교육은 안된다고 말하며, 우리 아이들을 다르게 키우자고 말하는 이들이다.
우리는 여자가 남자를 존중한다는 표현은 자주 쓰지만 남자가 여자를 존중한다는 표현은 거의 쓰지 않습니다. 가정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그랬어라는 말은 남자든 여자든 공히 자주 합니다. 그런데 남자들이 그 말을 할 때는 보통 어차피 해서는 안 되는 무언가를 포기한 경우입니다....(중략) 반면에 여자들이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라고 말할 때는 보통 직장이나 경력이나 꿈을 포기한 경우입니다.
나를 포함해 상당수 유부남들 뜨끔하겠다.
어차피 해서는 안되는 무언가를 포기한 경우.
보통 남자들이 습관적으로 해 온 일 중 배우자가 싫어하는 일을 포기하는 경우를 말한다. 밤 늦게까지 연락없이 술을 먹는 일, 담배를 못 끊는 일, 클럽, 나이트, 단란주점에 출입하는 일이겠다. 이런 일을 마치 가정의 평화를 위해 끊었다는 것을 '존중과 배려'로 포장해 온 것이다.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 첫 번째로 해야할 일은 배우자가 싫어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고, 이것은 배려가 아니라 행복에 따르는 의무다.
설거지는 주로 내가해
화장실 청소는 내가 도와주지
음식물 쓰레기, 재활용 전부 내 몫이지
육아 같이 하는게 당연한거 아냐
흔히 이런 생각을 밑바탕에 깔고있다. 내가 도와준다. 어째서 도와줘야 하는 일인가? 집안일에 주인이 따로 있고, 육아에 성역할이 있는가? 수유의 정의가 모유수유가 아니며 집안일의 알앤알이 엄마에게 귀속되는게 아니다. 육아와 가사일엔 여성이 훨씬 효율적이고 잘한다는 착각도 존재한다. 하지만 일류 요리사는 남자가 더 많고 환경미화원도 남자가 월등히 많다는 점에서 약간 김이 빠진다. 육아와 가사일에 적합한 성이 있다기보다 누가 더 관심을 갖고 더 많이 해왔냐에 따라 차이가 발생한다. 전통적으로 우리 아버지 세대와 달리 밀레니얼 세대의 남성은 가사일도 육아도 훨씬 더 잘 알고, 하고 있다는 점만 봐도 알 수 있다. 아마 우리 아내도 공감할텐데, 나는 결혼 후 십 년 동안 온갖 집안일을 해왔고 요리는 거의 내가한다. 물론 아내도 잘한다. 하지만 우리 둘 모두 내가 더 잘한다는데 동의한다. 그것은 내가 막내로 자라 어머님을 도와 집안일이며 청소며 이것저것 많이 해봤기 때문에 훨씬 잘하는 것 뿐이다. 그리고 요리에 관심이 많고 하는 일이 즐겁기 때문이다. (매년 백키로씩 담그는 김장에 투입되는 건 형도 누나도 아닌 나다.) 그러니까 성역할이 있다기보다, 누가 더 얼마나 많이 해왔는가와 같이 세월의 문제에 가깝다.
"니 아들도 너처럼 그러길 바라냐?"
내가 더 집안일을 많이 한다고 말하면 가끔 이렇게 얘기하는 주변 사람이 있다. 아니. 당연히 아니지. 누가 자기 자식이 '고생'하길 바라나. 그러나 그것이 '고생'이 되면 안하면 그만이다. 지친다 느껴지거나 부당하게 생각한다면 다른 방도를 찾으면 된다. 반대로 묻고 싶다. 당신 딸은 당신 같은 남편 만나 고생하면 좋겠냐고. 우리 세대가 어른이, 사회가 페미니스트를 그저 사회가 좀더 나아지길 바라는 사람, 공평하고 동등하게 세상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이로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독일은 전범국으로서의 독일을 다시 생각해보고, 다시는 독일이 그 같은 행위로 세계에 슬픔과 고통을 안겨주어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주고자 끊임없이 교육한다고 한다. 실제 살아보거나 부딪혀보지 않아서 정말 그런지, 얼마나 열심인지는 모르겠지만, 끊임없이 오리발인 옆 나라 일본하고는 사뭇 다르다. 나는 독일이 그렇게 교육하는 이유가 앞서 제기했던 '무지'와 '세월'의 문제하고 맞닿아 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고 본다. 사회가 잘못된 편견과 시각으로 국민들이 무지에 빠지지 않도록 계도하는 것은 오래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다치에의 테드 강연이 스웨덴에서 책으로 나오자, 한 스웨덴 여성로비 단체는 여러 곳의 후원을 통해 스웨덴의 모든 16세 학생들에게 이 책을 선물했다. 고등학생들이 이 책을 읽고 젠더 문제에 관해 대화를 나누기를 바라는 취지라고 했다. 스웨덴은 세계에서 성평등이 가장 잘 이뤄진 나라로 꼽힌다. (p.90) 스웨덴이 그냥 살기 좋은 나라가 된 게 아니다.
https://www.ted.com/talks/chimamanda_ngozi_adichie_we_should_all_be_feminists?language=k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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