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케터의 슬램덩크 1편>
1981년생입니다.
곧 마흔을 앞둔 아이 둘 아빠이죠. 까닭 모를 압박에 급 우울해지기 일쑤인데다가 앞으로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지, 또 무엇을 하며 사는 게 '맞는 것인지' 답이 없는 고민으로 수많은 밤을 지새는 나이입니다. 역설적이게 현실이 각박하게 느껴지고 다가올 미래가 막연히 느껴질 때마다 오히려 과거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후회 때문이겠죠. 그때 그랬더라면...... 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머릿속 시간의 역주행을 따라가다 보면 저도 미소 지을 때가 많습니다. 당시에는 그렇게 좋아했다는 사실조차 모르던 것들이 새삼 떠올라 무척 소중하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좋아하던 아이가 남겨준 141 사서함 속 메시지, 이름은 절대로 알 수 없는 01577의 1004, 왜 밤이 흐르면 누군가가 꼭 떠나야만 하는 건지 또 어떻게 떠날 걸 안다는 건지 아직도 궁금한 '난 알아요', 페이스북 따위 귀엽게 봐줄 뻔도 했는데 '아이러브스쿨과 싸이월드', 그리고 바로 이것. '슬램덩크'.
슬램덩크는 이상하게 읽고 또 읽어도 자꾸 보고 싶었습니다. 보고 또 봐도 다음 권이 또 궁금해졌죠. 누군가 학교에 신간을 가져오기라도 하는 날엔 순번을 기다리느라 애간장이 탔는데, 한 번은 제 바로 앞 차례 친구가 수업 시간에 몰래 보다 들켜 선생님께 빼앗겨 버렸죠. 그 소중했던 슬램덩크가 가차 없이 북북 찢어나가던 순간이란. 책 주인을 포함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여기저기서 한숨을 쏟았더랬죠. 그 순간이 아직도 그립습니다.
슬램덩크를 보며 처음으로 '동경'이란 단어를 알았습니다. 우리는 몸으로 익히고 경험한 것은 절대로 까먹지 않는데요, 머리로만 아는 단어와 가슴으로 이해하는 말은 구분됩니다. 그 말을 쓸 때도 그렇죠. 가슴으로 이해한 어휘를 사용할 때는 자신도 모르게 힘이 담겨, 설득력이라든지 절박함이라든지 하는 기운이 감돌게 됩니다. 마치 영혼이 깃든다고 할까요. 제가 동경한 슬램덩크 속 친구들도 그랬습니다. 슬램덩크는 아주 매력적이고 개성이 강한 인물들로 넘쳐났고, 모두 동경의 대상이었죠. 특히 팀 북산을 이루는 다섯 인물은 한두 가지로는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하게 혼재한 매력을 지녔기에 더 애틋했습니다. 포기를 모르는 남자 정대만과 꽃보다 남자 정대만, 플레이 하나로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서태웅과 채소연이 짝사랑하는 서태웅, 농구 실력보다 주장 실력이 더 뛰어난 채치수, 도저히 채치수하고 친남매라고 믿기지 않는 여주인공 채소연, 한나하고는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한 NO.1 가드 송태섭, '안한수'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던 흰머리 부처 안감독님, 그리고 바로 이 남자, 어떤 누구 앞에서도 절대로 쫄지 않고 자신감 하나만큼은 우주 최강, 단순무식 리바운드왕 자칭천재 빨강원숭이 강백호.
제가 강백호를 정말 동경하게 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입니다. 누구에게도 주눅 들지 않는 그의 당당함과 베짱이 소심한 성격에 미안하다 고맙다를 입에 달고 사는 저의 비굴함과 달라서 그랬습니다. 저 같은 사람은 시합 전 상대 골대에 덩크를 꽂기 위해 프리스로에서 뛴다든지, 평소 같지 않게 주눅 든 채치수에게 똥침을 날린다든지, "산양은 이 천재가 쓰러뜨린다"라며 운영진 테이블 위에 올라가는 행동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니까요. 돈 한 푼 없는 주제에 에어조던 신발을 사는 천연덕스러움은 또 어떤가요. 백호가 어딜 가나 함께하고, 백호가 진짜 바스켓맨으로 성장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도왔던 양호열 이하 기타 등등 '강백호 군단'만 보아도 강백호의 인간다운 매력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 뿐일까요. 제가 생각하는 강백호의 최고 매력은 그의 언어감각입니다. 그는 등장인물에 별명을 부여해 각각의 캐릭터를 한 단어로 매우 절묘하게 묘사합니다. 안감독은 영감님, 이정환은 애늙은이, 채치수는 고릴라, 신현철은 떡판 고릴라, 신현필은 시골 호박, 전호장은 야생 원숭이, 권준호는 안경 선배, 변덕규는 두목 원숭이, 황태산은 메기, (압권은 역시 시골호박). 별명을 붙이는 능력만 봐도 그의 언어 센스가 탁월함을 알 수 있는데 여기에 종종 인물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작가인 타케이코 이노우에가 작심하고 쓴 듯 울컥하게 만드는 명대사도 많습니다.
제목에 왜 슬램덩크를 다시 꺼내들었나라는 물음과 함께 시작했습니다. 슬램덩크는 한 사람의 성장기입니다.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고 조직의 일원이 되어 투지를 발휘하고 전국제패라는 목표를 향해 고군분투하는 성장 스토리 말이죠. 좀 더 세밀하게 보면, 그 안에 수많은 경영서와 자기 계발서가 꺼내드는 성공의 원칙과 이론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도저히 작가의 의도라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너무나 날카롭고 쉽게 성공의 이론을 녹여낸 '경영 서적'. 마케터인 저는 바로 그런 부분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었고 나누고 싶었습니다. 또한 국내에서보다 훨씬 인기가 없었던 농구라는 소재를 들고, 일본 만화계를 재패할 수 있었던 슬램덩크의 성공 이유를 스토리텔링 측면에서 깊숙히 탐구해보고 싶었습니다. 이 조악한 끄적임이 지금도 어디선가 고군분투하며 자신의 삶을 개척하고 있을 이들에게 미력하게나마 도움이 되길 바라면서 서문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