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의 시드니 도시 산책
여행하면서 돈을 흥청망청 쓰지 않는 편인데도 시드니의 물가를 과소평가한 덕분에 환전해 온 돈이 거의 다 떨어져간다. 카드로 결제하면 결제할 때 아예 결제금액에 1.5% 정도를 더 붙여서 받기도 하고, 카드 수수료나 환율도 걱정이라 원화 환전이 가능한 곳을 찾았다. 다행히 시드니에 하나은행, 우리은행, 신한은행이 있어 환전이 가능할 거라 생각하고 아침 일찍 은행에 갔다. 은행들은 시드니 시내 증권가에 있는 커다란 오피스 빌딩의 십몇 층에 있었다.
처음으로 방문한 곳은 신한은행이었는데, 개점 시간인 아홉 시가 되어도 문이 열리지 않아 좀 기다려야 했다. 뒤늦게 나타난 직원은 여기는 환전 업무를 하지 않는다고 했다. 해외에 있는 한국 은행이 환전 업무를 하지 않는다면 대체 어떤 업무를 한단 말인가? 아마도 개인이나 기업을 상대로 프라이빗 뱅킹 업무를 하는 것 같았다. 아무튼 직원 왈, 여기는 환율이 한국과 달라 환전소를 찾아도 아주 비싸, 차라리 카드로 결제하는 게 나을 거란 얘기였다. 아쉬운 마음으로 걸음을 돌렸다.
시드니 수산시장(Sydney Fish Market)은 수산물의 질이 좋고 저렴하기로 유명하다. 해산물을 좋아하는 한국인이면 놓칠 수 없는 관광지다. 전날 먹은 초밥에 들었던 연어와 회가 아주 싱싱했던 것으로 보아 수산물 시장도 기대되었다. 블루마운틴 투어가이드에 의하면 이곳은 12시부터 중국인들이 인해전술로 밀고 들어오니 10시 반에 도착하는 것이 좋다 했다. 은행을 들렀다가 수산시장에 도착하니 아침 열 시였다.
그런데 생선을 파는 사람도 사는 사람도 모두 동양인인 진귀한 풍경이다. 이쯤되면 영어로 메뉴가 적힌 마트 해산물 코너라고 해도 믿을 정도다. 우리나라 수산시장은 물탱크 속에 살아있는 생선을 놓고 즉석에서 잡아 요리해준다면, 여기는 생선이 모두 죽은 채로 얼음 위에 놓여 있고 게 정도만 살아서 묶인 채 플라스틱 통에 담겨 있다. 죽은 생선이라도 한눈에 보기에도 신선해보인다. 한바퀴 돌아보고 맘에 드는 메뉴를 몇 개 골랐다. 며칠 전 시도했지만 동태전 맛이 나서 ‘이게 진짜 맛있는 피시앤칩스일리가 없어’하는 마음으로 재시도한 피시앤칩스, 랍스터를 반으로 잘라 치즈를 올려 구운 것, 모듬회 한 팩, 회에 올려먹을 날치알 한 팩, 조개살 샐러드 한 팩, 그리고 와사비가 든 간장 한 통. 전부 다 해서 91.99달러. 한화로 약 8만원이니 나쁘지 않은 금액이다.
회는 정말이지 신선해서 값이 아깝지 않았고, 피시앤칩스는 생선 반 토막이 그대로 들어있어서 엄청 컸다. 동태전 맛은 나지 않았다. 아마 생선 종류가 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 값이 레스토랑에서 먹은 가격의 1/3 수준이었는데 훨씬 맛있었다. 랍스터는 위에 모짜렐라 치즈만 얹은 줄 알았더니 그 안에 감자로 만든 크림이 한 겹 더 들어있는 맛이었다. 맛이 나쁘진 않았지만 랍스터는 생각보다 뻑뻑하고 치즈는 너무 많았다(60대와 30대의 입맛이라 그러려니 해달라. 맨날 Low G.I. 빵에다가 야채 잔뜩 끼워먹는 사람들이다. 나도 치즈와 크림을 좋아하는 20대를 지나 건강식을 사랑하는 30대 중반이 되었다. 엄마와 음식 취향이 비슷해지니 여행다니기가 참 좋다). 조개살 샐러드는 살짝 새콤한 맛이 나서 느끼할 때마다 한 입씩 먹어주면 딱 좋았다. 둘이서 배터지게 먹고 감자튀김만 조금 남겨왔다. 식사가 끝나갈 때 즈음 중국인들이 엄청나게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일찍 온 보람이 있다. 더 북적이기 전에 수산시장을 빠져나왔다.
아침부터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다시 트램을 타고 시내에 들어갈때 즈음엔 아예 쏟아지기 시작했다. 뜨거운 햇빛 때문인지 아케이드가 있는 건물이 많았지만 비를 아예 안 맞고 다닐 수는 없었다. 아름다운 인테리어로 유명한 퀸빅토리아 빌딩에 도착했다. 원래는 건물 내에서 커피를 한 잔 마시려고 했는데, 너무 사람이 많아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한 바퀴 돌아보고 나와서 근처의 카페를 찾았다.
엄마는 시드니에 도착한 첫 날 레스토랑에서 마신 아메리카노에 충격을 받아 그 이후에 커피를 사마시지 않는 상태였다. 한국 커피도 진하다고 물을 두 배로 타서 마시는 분인데, 시드니 커피는 연하게 해달라고 한 게 한국 커피보다도 진했던 것이다. 엄마가 성당 간 사이에 혼자 카페에 가서 플랫화이트를 마셔보고는 이건 꼭 한번 사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크리미한 커피가 정말 맛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찾은 카페는 내가 갔던 카페는 아니지만, 구글 지도에서 평점이 꽤 높은 카페였다. 비오는 풍경을 볼 수 있는 창가 바에 자리를 잡았더니 테이크아웃 가격을 받았다. 따뜻한 플랫화이트를 마시며 비 내리는 풍경을 보는 것은 정말이지 행복한 일이었다. 12시에 정점을 찍은 비는 서서히 그쳐가기 시작했다. 그 틈을 타서 오스트레일리아 박물관(Australian Museum)으로 이동했다.
오스트레일리아 박물관은 호주에서 가장 오래된 박물관이다. 호주의 미술관과 박물관의 좋은 점 중 하나는 무료로 짐을 맡아주는 서비스가 있다는 것이다. 가방을 카운터에 맡기고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박물관을 돌아다녔다. 전시공간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곳은 새를 전시한 공간이다. 호주의 길에서 보던 다양한 새들의 이름을 알 수 있다. 오기 전 탐조를 좋아하시는 분이 런칭한 ’버더러브스버즈(@birderlovesbirds.shop)‘라는 브랜드에서 호주새 티셔츠를 사왔는데, 이름을 알고 나니 좀더 친숙하게 느껴졌었다. 시드니에 처음 도착한 날 하이드 파크를 가로지르며 이국적인 새들을 조우하고 바로 이곳에 왔어도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보다도 인기 좋은 곳은 사실 공룡관이다. 엄청난 크기의 공룡 화석 모형, 뼈 모형, 하다못해 내장 모형까지 있다. 공룡관을 둘러보고 나오면 호주 역사관이 나온다.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호주의 역사와 변화를 볼 수 있다. 인상깊었던 것은 호주 원주민들의 악기와 전통 의상이었다. 처음에는 우리나라 장승 같은 기둥인줄 알았는데, 세계에서 가장 큰 악기 중 하나라는 것이다. 무시무시한 얼굴이 그려진 악기를 채로 두들겨서 소리를 낸다고 한다.
여행 6일째인 오늘, 매일 8~9천보를 걷던 나도 슬슬 힘든데 엄마는 여기 오기 전 하루 3천보 정도를 걸었다고 한다. 작은 농사 수준으로 텃밭을 가꾸시는데 여름보다 겨울의 활동량이 적다보니 갑자기 움직이는 게 영 힘든 모양이다. 그래도 체력이 좋으신 것을 알아 하루 만 오천 보에서 이만 보를 걸어다녔는데, 이제는 힘에 부치시는 모양이다. 박물관을 돌아보는 중간중간 벤치에 앉아 “너 다녀와~” 하시는데 사실 다녀오는 나도 힘들었다. 오늘 하루는 일찍 숙소에 들어가서 첫 빨래를 하기로 했다.
시드니 수산시장 peter’s 모짜렐라 랍스터 32.5달러, 피시앤칩스 14.5달러, 와사비간장 1.5달러, 조개샐러드 5.99달러, 사시미믹스 32.5달러, 날치알 5달러
카페 LIVELO 플랫화이트 디캎 2잔 9.6달러
마트 자두 2알, 복숭아 2알, 망고 1알
세탁비 16달러(세탁기 4달러*2회, 건조기 4달러*2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