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시드니 건축 투어
시드니에서의 마지막 날이다. 사실 서큘러키와 오페라하우스 부근, 페리를 타고 건너가는 북쪽 지역, 시드니 동부 해안가 지역을 모두 돌아보았기 때문에 어디를 가야 하나 고민이 많았다. 구글 지도를 확대했다가 축소해 보니 달링하버와 그 아래 대학가가 있는 지역에는 가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특히나 이곳은 유명 건축가가 설계한 건물들이 많아 건축공부를 하는 사람이라면 꼭 들러야 하는 지역이다.
아침에 평소와 마찬가지로 식빵에 아보카도와 상추, 치즈를 넣어 먹고 망고 하나를 통째로 썰어 디저트로 먹었다. 아침을 든든하게 먹어야 하루가 힘찬 법이다. 숙소 근방에서 버스를 타고 달링하버로 이동했다. 달링하버의 명물은 해양박물관인데, 시드니 해양박물관(Sydney Heritage Fleet)과 오스트레일리아 국립 해양박물관(Australian National Maritime Museum)이 나란히 붙어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국립해양박물관 오픈 시간인 10시를 기다리며 시드니 해양박물관을 둘러보았는데, 규모가 작지만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던 배와 더불어 여러 척의 요트가 전시되어 있어 꽤 볼만했다. 박물관 바로 앞에 정박되어 들어갈 수 있는 배도 있길래 탔더니, 입장료를 따로 내야 한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박물관 바로 앞 부두에 작은 배, 큰 배, 잠수정 등 여러 배가 정박되어 있다. 배에 타서 구경할 수 있는 입장료는 유료고, 해양박물관만 보는 것은 무료다. 배를 좋아하는 어린이라면 천국과 같은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일주일간 끊임없이 걸었던 30대와 60대는 배에 들어가 보는 것은 고사하고 박물관만 보기로 했다.
오스트레일리아 국립해양박물관은 건물 안팎으로 MU/SEA/UM이라고 한 줄씩 바꿔가며 쓰여있었는데, 가운데 SEA로 바다를 표현한 게 천재적이었다. 로비 공간 천장에는 그물로 만든 작품이 걸려 있었다. 폐그물에 걸려서 괴로움을 겪는 바다생물들을 표현한 작품이라고 한다. 사막화되는 바다 환경을 위해 3D 프린팅 기술로 바닷속에 인공산호를 만들어주려는 프로젝트, 호주 어린이들의 국민동화 Blueback에 대한 전시, 아름다운 등대 구조물 등이 인상 싶었으나 특히나 기억에 남는 것은 바로 세계일주에 대한 전시였다.
세계일주를 버킷리스트에 담고 있는 사람은 많지만, 육로나 비행기, 혹은 도보가 아니라 배 한 척에 의지하여 오로지 혼자만의 힘으로 지구를 한 바퀴 횡단하는 것은 또 다른 일이다. 이런 세계일주(Circumnavigation)에 처음으로 성공한 여성은 호주인 Kay Cottee이며, 1987년에 출항하여 1988년까지 쉬지 않고 단 189일 만에 출발지로 돌아와 최단기간으로 성공한 여성이 되었다. 배 위에서 그의 하루 일과는 항로 확인하기, 타륜 확인하기, 돛 바꾸기, 일기예보 확인하기, 항해일지 작성하기, 라디오로 본부와 소통하기, 배 유지와 관리, 요리, 식자재 관리하기, 테이프 듣기, 책 읽기, 코바느질하기, 대바느질하기, 요가하기, (날씨에 따라) 목욕하거나 샤워하기, 라디오로 언론매체와 인터뷰하기 등등…이었다고 한다. 코바늘로 뜬 십수 개의 코스터와 대바늘로 뜨다 만 담요, 그리고 외로움을 달래주기 위한 커다란 곰인형도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우리는 버스도 타고 트램도 타고 비행기도 타니 얼마나 호강하는 여행인가. 인생 또한 언젠가는 끝날 거대한 항해인데 나는 키를 제대로 쥐고 방향을 바르게 하여 가고 있는가.
건축물 하나로 도시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리는 만무하지만, 그 건물이 도서관이라면 확실히 동네 사람들의 삶의 질은 올라간다. 어린 시절 우리 가족이 집 밖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장소는 도서관이었고, 빈곤한 공간에서 살고 있는 서울사람이 된 지금 책이 집을 장악하지 않도록 도와주는 것 또한 도서관이다. 도시재생의 측면에서도 공공도서관은 중요한 장소다. 사람들이 무료로 모여서 다양한 문화체험을 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시간을 오래 보내도 눈치 보이지 않는 몇 안 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많은 도시에서 도서관과 상업시설을 융합하는 시도를 하고 있다. 공공시설을 임대하여 수익을 거두어 더 많은 복지를 할 수 있고, 사람들을 더 적극적으로 모이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드니에서도 같은 시도가 있다. 일본 건축가 겐고 구마가 설계한 “The Exchange”가 그것이다. 외부에서 바로 접근 가능한 그라운드 레벨(Ground Level)에는 식당가가, 그 위 중층(Messanine)에는 중국음식점이, 1~2층에는 도서관인 Darling Square Library가, 3~4층에는 어린이집이, 5층에는 한국에서도 유명한 훠궈집인 하이디라오가 있다. 이 건물에 도착한 것은 점심 즈음이라, 우리는 식당가에서 식사를 하고 도서관으로 올라가기로 했다.
수플레 팬케이크로 유명한 The Brothers에서 클래식 햄버거 하나와 타이 티 수플레 팬케이크를 주문했다. 커피는 디카페인 옵션이 없어 주문하지 못해 아쉬웠다. 햄버거는 번을 버터에 구워 맛있었다. 수플레 팬케이크는 공기층을 아주 많이 넣어 퐁신퐁신한 팬케익 세 조각 위에 타이 티 소스를 뿌려서 딸기, 아이스크림, 그리고 화이트초콜릿 팀탐이랑 같이 먹었다. 엄마는 수플레 팬케이크가 아주 새롭고 맛있다며, 한국에서도 팔면 좋겠다고 하셨다. 오, 엄마는 새로운 음식을 시도하는 걸 좋아하시는구나. 이번 여행을 통해 엄마의 취향에 대해 알아가는 중이다. 다음에 서울에서 맛집에 한번 모시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시드니의 공공건축물은 나무와 쨍한 컬러를 조합하여 인테리어 한 경우가 많다. 호주야 워낙 목재 생산량이 많은 데다, 날씨가 좋아서 원색 계열을 쓰는 데 거침이 없다. 여기 도서관도 그렇다. 실내는 짙은 파란색을 주조색으로 하여 나무 벽면과 포인트 벽면이나 계단을 제외하고는 콘크리트를 노출하거나 깔끔한 회색으로 마감했다. 크지 않은 규모의 도서관이지만 어린이 도서 코너는 무조건 마련되어 있다. 책장 사이에 공간을 두어 벽감소파 같은 공간을 만들었더니 그 안에서 할머니와 손녀가 함께 책을 읽는다.
테라스로 나오니 또 다른 독서 공간이 있다. 이 건물은 원형의 통유리 건물을 둘러싸고 목재로 휘감아도는 형태다. 건물 유리창에 덧창을 대어 뜨거운 햇빛을 막는 것은 시드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태의 실용적인 디자인이지만, 덧창을 새로운 방식으로 재해석하여 난간이자, 차양이자, 건물의 아이덴티티로 만든 것은 건축가의 능력이라 할 수 있다. 건물은 위로 올라가며 점점 면적이 넓어져 위층이 아래층테라스의 지붕 역할을 하고 있다.
목재 차양은 지상으로 내려가면서 세로로 서 있던 형태가 가로로 자연스레 누우며 바깥 길의 그늘막 역할을 한다. 시드니 도심의 대형 건물들이 제각기 창의적인 방식으로 바깥의 마당과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보는 게 또 하나의 재미다. 마당을 둘러싸고 카페와 레스토랑들이 실내외 테이블을 두고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다. 우리도 플랫화이트 한 잔을 주문하여 미리 준비해 온 복숭아, 자두와 함께 여름을 만끽했다.
The Exchange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약 10분 간격으로 유명 건축가들의 건축물을 볼 수 있다. 특히 시드니 공대(University of Technology Sydney, UTS)의 건축물들이 멋진 게 많다. 이곳 대학은 캠퍼스가 따로 구획되어있지 않고 도시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다. 원래 대학이 자리 잡은 곳에 도시가 형성된 것인지, 아니면 건축물을 하나 둘 늘려가며 캠퍼스가 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래서 도시를 걷다가 갑작스레 프랭크 게리의 비정형 건축물과 마주친 것은 당연하다. 시드니 공대의 Building 8, 경영대 건물(Dr. Chau Chak Wing Building at UTS)이다.
건축가들이 도면을 그릴 때 흔히 쓰는 프로그램은 캐드(Auto CAD)인데, 프랭크 게리는 무려 캐드가 개발되기 전부터 비정형 건축물을 설계하기 시작했다. 건축계의 얼리어답터인 셈이다. 직각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자유분방한 입면과 마찬가지로 내부 공간 또한 이 매스(건축에서 ‘건축물의 덩어리’를 뜻하는 말)와 저 매스가 겹쳐지고 만나며 재미있는 공간들을 만들어낸다. 이 건물의 마감재의 주재료는 바깥에서 보면 유리와 벽돌이고, 안에서 보면 나무와 반사성이 있는 스테인리스다. 유리와 벽돌은 이 지역 주택과 대학에서 많이 쓰는 재료이니 건축가 나름대로 주변과 조화를 이루려고 한 셈이다. 다만 형태는 누가 봐도 게리의 것이다. 한화 5천 원 권에서 율곡 이이가 쓰고 있는 정자관을 연상케 하는 곡선이 위로 갈수록 펼쳐지듯 날아간다.
프랭크 게리의 건물에서 또다시 10분을 걸어 남쪽 방향으로 가면 이번에는 건축가 장 누벨이 설계한 주상복합 건물인 센트럴 파크 시드니(Central Park Sydney)가 나온다. 그라운드 레벨과 그 위층, 그리고 지하는 상점가가 있고 그 위로 공동주택이다. 멀리서도 검은색 프레임의 건축물에 지상층부터 꼭대기층까지 벽면녹화가 되어있는 것을 보고 엄마가 “우와 저 건물 좀 봐봐 “라고 먼저 말한다. 낭중지추라고, 엄마 눈에도 장 누벨의 건축물은 특별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 날카로운 눈은 금세 건축주의 눈으로 돌변한다. 저 식물들을 관리하는 데 엄청 힘들겠다며 훈수를 둔다. 가까이 다가가 식물이 어떤 베이스 위에서 자라고 있는지 확인하기까지 한다. 도시농부이면서 건축주인 사람의 시선이다. 앞서 SANAA의 시드니 아트 갤러리에서는 데드스페이스가 많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나는 옆에서 “잉여 공간에서 예술이 발생하는 법이죠”라고 방어하는 역할을 했었다.
장 누벨의 정원은 그라운드 레벨에 하나, 지하에 하나, 그리고 낮은 건물의 옥상에 하나 있다. 건물 위에 있는 것은 거주민 전용이라 올라가지 못했다. 지하에 있는 것은 천장이 위로 뚫려 마찬가지로 상점가가 조성되어 있다. 이런 형태를 썬큰가든(Sunken Garden)이라고 하는데, 뜨거운 햇빛을 피하고 서늘한 공기를 유지하는 외부 공간을 만들면서 동시에 지하층 환기를 유리하게 하기 위한 방법이다. 그라운드 레벨에서는 썬큰가든의 전체 모습이 다 보이지 않을 정도로 수목이 빽빽하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우리나라야 연교차가 워낙 커서 외부에서 쾌적하게 식사나 커피를 즐길 수 있는 날씨가 많지 않으나, 시드니는 쏟아지는 햇빛만 덜어준다면 거의 일 년 내내 외부공간을 사용할 수 있어 이런 식으로 최대한 바깥과 닿는 면적을 늘리는 것이 임대료를 더 받을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장 누벨의 센트럴 파크 시드니에서 다시 서쪽으로 꺾어 이동했다. 이번 목적지는 빅토리아 공원을 옆구리에 끼고 위치한 시드니 대학교다. 시드니 여행계획을 짜면서 숙소를 구할 때, 에어비앤비 숙소들이 대부분 달링하버 근처와 그 남쪽에 있었다. 이곳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작은 규모의 주택들이 많고 시내에서 멀지 않아 교통이 편리했던 것이다. 길가에 귀여운 가게와 맛있어 보이는 카페, 오래된 건축물과 아름다운 장식물이 가득했다. 시드니 시내보다는 확실히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동네다. 시드니 공대와 시드니 대학교, 두 대학교 사이에 끼워진 작은 동네다 보니 가게마다 학생 할인 요금이 적혀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시드니 공대가 화려한 현대건축의 향연이라면, 시드니 대학교는 비교적 차분한 고전양식의 건축물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우리가 방문하려는 곳은 법대 신관 건물이며 FJMT라는 건축가가 설계했다. 공원을 가로질러 저 멀리 기다란 건물이 보인다. 건물 두 동이 가운데 커다란 창을 내고 나란히 서 있는 모양인데, 가까이 다가가니 그 창 속으로 기존의 고전적인 건물이 담긴다. 건축가들은 건물을 세우기 전의 경관을 보고 접근하는 방향에서 가려서는 안 될 중요한 건물이나 물체, 혹은 풍경이 있으면 도리어 강조하여 이런 식으로 액자 속에 넣고는 한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가운데 커다란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남산과 남산타워가 건물 두 동 사이의 액자 속에 담기도록 한 것도 같은 방식이다.
두 건물 가운데 빈 공간에 튀어나온 고깔이 하나 보인다. 보통 이런 공간은 내부에서 바라보면 엄청 근사하다. 깊고 둥근 내부에 천창이 있는 구조다. 이걸 보기 위해 건물 내부로 들어갔다. 도서관을 지나서 있는 스터디룸인 모양이다. 가운데 바닥에 또다시 둥글게 바닥이 뚫려 있어 아래층에서도 천창을 통해 자연광이 들어오게끔 되어 있다. 바닥을 뚫은 보이드(void) 공간을 내려다보는 방향으로 둥글게 책상이 배치되어 있어 학생들이 공부를 하고 있었다.
사실 빅토리아 공원은 대학보다는 수영장으로 유명한 공원이다. 단돈 8.5달러를 내면 깨끗한 야외수영장에서 수영을 즐길 수 있다. 수영복을 가져올 걸,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이런 도시에선 서핑이나 스쿠버 다이빙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지만 나는 그보다 빠른 속도로 수영장을 왕복하는 것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다. 25미터 레인에서 왕복하는 데 1분 정도 걸리는 속도로 연달아 열 바퀴를 돌고 수면 위로 올라오면 어깨에서 뜨끈뜨끈 열이 나는 감각이 좋다. 마지막에 무게를 덜어낸다고 수영모와 수경까지 내려놓은 게 두고두고 아쉽다. 시드니 시내의 세인트 메리 대성당 앞에도 지하에 커다란 수영장이 있어 정말 가보고 싶었다. 멜버른에서는 수경을 하나 사서 시립수영장 한 군데라도 갈 수 있으면 좋겠다. 안되면 바다수영이라도.
시드니에서의 마지막 날이니 저녁에는 특별한 곳에 가고 싶어졌다. 하루종일 걸어 다니니 지치고 힘든데 저녁을 먹고 나니 시간이 오후 다섯 시밖에 안 됐다. 지도를 괜히 확대했다가 축소했다가를 반복하는데 낯익은 이름이 보인다. 바로 에이스 호텔. 브랜딩, 디자인, 도시재생 등등 여러 분야에서 끊임없이 언급되는 이름이다. 미국 시애틀에서 처음 시작된 이 호텔은 그 지역의 예술가, 배우, 작가 등의 이른바 창조계급을 불러들이며 금세 지역의 명소가 됐다. 호텔 1층에 카페를 만들어 외부인들도 얼마든지 쓸 수 있게 한 시초가 바로 에이스 호텔이다. 호텔 1층이 지역의 문화살롱 역할을 하는 것이다.
엄마와 함께 글 쓸 도구들을 싸들고 에이스 호텔로 이동했다. 흑맥주 한 잔과 디카페인 플랫화이트 한 잔을 주문하고 자리를 찾아 앉았다. 다소 시끌시끌하고 어두운 분위기라 확실히 조용한 호텔을 찾아온 점잖은 어르신들보다는 파티와 힙함을 찾아온 젊은이들이 더 좋아할 것 같은 분위기다. 엄마는 초대받지 않은 곳에 들어온 기분인지 이렇게 자리를 차지해도 되는 거냐고 재차 묻더니 곧 이어폰을 끼고 디즈니플러스를 보기 시작했고, 엄마에게 뽀로로를 쥐어준 나는 그제야 여행기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시드니에서의 마지막 밤이 저물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