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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마닐 Feb 25. 2024

시드니에서 멜버른으로

달라도 너무 다른 두 도시


공항으로


아침 여덟 시 십분 비행기라 새벽에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니 도리어 새벽 세 시부터 한 시간 간격으로 깨기 시작했다. 결국 원래 계획했던 새벽 다섯 시 반에는 엄청 피곤한 상태가 되어 간신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여행지에서 어디서든 깊이 잠드는 편이지만 이런 식으로 긴장되면 자꾸 잠을 설친다. 30분 만에 샤워, 짐 챙기기, 방 정리를 모두 마치고 체크아웃까지 완료했다. 데스크에 있던 직원은 어디로 가냐고 묻더니 멜버른에 여러 번 갔지만 미국 친구들이랑 같이 갔을 때 그들이 가진 가이드북을 따라 간 식당에서 굉장한 식사를 했다며 자랑했다. 그런데 가이드북 제목을 기억하지는 못했다. 어느 가이드북에나 있을 거라나. 어딜 가든 상냥하고 여유 있고 위트 있었던 시드니의 사람들을 절대 잊지 못할 것 같다. 여행하면서 살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도시는 여기가 처음이다.




미션 임파서블, 14박 15일에 단 7kg


숙소가 시내 한가운데에 있어 공항까지 지하철로 단 네 정류장. 30분이면 도착한다. 국내선 터미널이라 짐 검사는 허술하다. 기껏 보안게이트 앞에서 챙겨 온 후무스, 차자키소스와 크래커를 먹고 들어갔는데 텀블러 안에 든 커피도 개의치 않고 들여보냈단다. 티켓은 가져온 e-티켓으로 충분했다. 문제는 탑승 게이트 앞에서 갑자기 짐 무게를 재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7kg 이하로 줄이느라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애썼는데, 정작 한국에서 시드니에 올 때는 짐 무게를 재지 않아 엄마는 계속해서 끊임없이 마지막에 짐을 빼지 않았어도 되었다며 아쉬워했다. 옆 사람부터 차례차례 짐 무게를 재는 걸 보고 가방에서 맨투맨을 꺼내 입고, 신발도 다시 운동화로 갈아 신고, 아무튼 가방 안에 있는 웬만한 것을 몸에 걸치려 애썼다. 옆을 보니 외국인들도 똑같이 옷을 열심히 겹쳐 입고 있다. 사람 사는 거 다 똑같다. 아무튼 직원이 카메라며 휴대용 키보드까지 전부 올리라고 하며 꼼꼼하게 무게를 재더니 그냥 지나갔다. 짐을 줄인 보람이 있다. 엄마한테 “거봐 내 말을 듣길 잘했지”라고 말을 안 하고 지나갈 수는 없었다. 한 한국 청년이 우리에게 다가와 혹시 노트북을 잠깐 맡아줄 수 있냐고, 짐 무게가 1kg가 늘었는데 무려 75달러를 요구했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그걸 갖고 들어갈 수는 없으니 잠깐 내 가방 아래 숨기라고 해서 맡아주고 다시 짐무게를 재러 가는 걸 봤다. 다행히 무사히 통과한 모양이다. 저가항공사다 보니 이런 식으로 추가로 받는 수입이 꽤나 짭짤할 것이다. 짐 무게 잴 때는 그렇게 꼼꼼하더니 비행기 탈 때는 신분증 검사도 안 했다. 그래도 자자한 악명과는 다르게 비행기는 제시간에 활주로를 떠났다.


시드니를 떠나 멜버른까지는 1시간 반. 도착지는 멜버른 시내에서 가까운 멜버른 공항이 아닌, 근교의 아발론 공항으로 되어 있었다. 공항에서 시내까지는 스카이버스로 이동해야 하는데, 도착시간으로부터 30분 후에 출발하는 버스에 타지 못하면 4시간을 기다리거나 택시를 타야 했다. 다행히 비행기가 연착되지 않은 덕분에 아발론 공항에도 제때 도착했다. 공항 규모는 아주 작아서, 계단을 따라 비행기에서 내려 걸어서 시외버스터미널 규모의 공항을 통과하자 곧바로 버스가 보였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다시 공항 안에 있는 키오스크에서 스카이버스 탑승권을 끊어 버스에 올랐다. 2층 버스 맨 앞자리가 비어있어 그곳에 앉아 경치를 구경하다 졸다를 반복하다 보니 한 시간이 금세 지나 멜버른 시내에 도착했다.





호주 하면 역시 햄버거


멜버른은 트램이 유명하다. 시내 구간에서는 트램이 모두 무료라 티켓을 찍을 필요가 없다. 스카이버스는 시내에서 가장 큰 역인 사우던크로스 역에 내려줬다. 우리는 점심을 역에서 먹고 숙소까지 이동하기로 했다. 아침을 매일 든든하게 먹다가 크래커만 먹었더니 이렇게 배고플 수가 없다. 점심 메뉴는 햄버거다. 동생이 호주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 그릴드(grill’d)의 햄버거는 매일 먹고 싶은 정도라고 했는데, 시드니에서는 한 번도 시도해보지 못했었다. 마침 역 안에 지점이 있어 들어갔다. 가장 유명한 메뉴는 Mighty Melbourne인데, 이게 도시마다 메뉴가 있단다. 우리는 양고기 버거가 궁금해서 내용물이 다른 양고기 버거 두 개와 펩시 한 병, 작은 사이즈의 감자튀김을 주문했다. 역시 호주는 햄버거다.




하루 안에 사계절을 느낄 수 있는 도시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치고 나와서 숙소까지 무료트램을 타고 이동했다. 길을 걸을 때에도 트램을 탈 때에도, 단 1시간 반 거리의 도시가 이렇게나 다를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 우선은 날씨부터. 시드니는 항상 습한 날씨였는데, 지나치게 덥거나 지나치게 추운 적이 거의 없었다. 일교차도 심하지 않아 얇은 바람막이 하나를 햇빛을 피하는 용도, 가는 비를 피하는 용도, 바람을 피하는 용도 등등으로 쭉 쓸 수 있었다. 반면 멜버른은 잠깐 사이에도 하루에 몇 번씩 날씨가 바뀐다. 알고 보니 남쪽의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북쪽의 사막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있어 이 바람이 바뀔 때마다 날씨가 바뀌고, 두 공기가 만날 때 비가 내린다고 한다. 그래서 멜버른은 하루 안에 사계절을 다 맛볼 수 있는 도시라고 한다. 낮에는 건조하게 타는 듯이 덥더니 밤에는 선풍기를 다 껐는데도 추울 정도다.


사람들도 다르다. 시드니에서는 항상 사람들이 여유 있고, 따뜻하고, 위트가 넘치고, 눈만 마주치면 웃어 보였다. 도시 자체도 항상 정장을 차려입은 멋쟁이 깔끔쟁이 인상이었다. 멜버른은 그에 비하면 훨씬 정신없는 도시다. 햄버거 집에서 나오자마자 길을 건너는데 다가오던 자전거 운전자가 하필 횡단보도 켜지는 타이밍에 횡으로 건너느라 눈을 마주치면서 “shit, shit, shit, shit” 하면서 다가오는 것이다. 오, 시드니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도시 전체의 분위기가 자유분방하고, 다채롭고, 모두가 각자의 색깔을 진하게 가지고 살아가는 느낌이다. 시내 한복판에 그라피티 거리가 있고, 작은 카페가 모여있는 카페거리가 있고, 어딜 가든 무지개 깃발이 휘날리고, 젊은이들은 격하게 감정을 토해낸다. 정돈되지 않은 편안함이 있는 도시다.


숙소에 짐을 내려놓고 유명하다는 크루아상 집에 갔더니 점심시간이라 사람이 바글바글하다. 알고 보니 한국인이 사장이라고 한다. 한국 음식이 너무 맛있다 보니 세계 어디를 나와도 외식에 대한 효용을 느끼기가 참 어려운 것 같다. 그나마 20대에는 입맛이 덜 까다로웠던 것 같은데 30대 중반이 된 지금은 맛있는 걸 너무 많이 먹었고, 너무 느끼한 것도 잘 받지 않고, 너무 짜거나 단 것도 싫고… 점점 먹을 것에 대해 만족하기가 어렵다. 어렸을 때 용돈을 모아 부모님께 맛있다고 소문난 디저트를 사다 드리거나 학생들이 진짜 좋아하는 식당에 한번 모시고 가면 이걸 왜 이 돈 주고 사 먹냐는 식으로 핀잔을 듣고 상처받았던 적이 있는데, 이제는 그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가는 것이다. 그래도 어린아이에게 조금은 더 따뜻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도 동시에 생기면서도. 아무튼 한국 사람이 외국에서 연 식당은 마치 도시 속에서 유명 건축가가 지은 건축물을 찾듯 낭중지추로 한눈에 보기에도 빼어난 것이다. 혹은 줄이 길거나. 아무튼 앉아서 먹을 자리도 없는 그 크로와상은 돌아오는 길에 테이크아웃으로 주문하기로 하고 멜버른 최초의 로스터리 카페를 찾아갔다.




멜버른 최초의 로스터리 카페와 ‘매직’


이곳은 멜버른 최초의 로스터리일 뿐 아니라 최초로 에스프레소 머신을 들여놓은 가게이기도 하다. 콜드브루 라테 한 잔과 디카페인 ‘매직’ 한 잔을 시켰다. 매직은 멜버른에서만 먹을 수 있는 커피인데, 이름 그대로 마법처럼 눈이 떠진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그렇다. 디카페인인데도 카페인이 느껴지는 강한 맛이었다. 우리나라는 요새 인당 2만 원이 넘는 식사를 해도 식기류, 물이 셀프서비스인 것은 물론이고 로봇이 가져다주는 식사를 직접 내 자리로 내려서 먹어야 하는데, 이렇게 비싼 인건비에도(물론 외식비가 2배다) 커피든 식사든 무조건 직원이 자리로 가져다주는 문화가 있어 너무 좋다. 최저임금이 우리나라의 두 배 정도이니 외식비가 두 배인 것도 이해가 간다. 그렇지만 배율로 커지는 것이라면 서비스는 무슨 일일까. 물론 여기 식자재 값은 우리나라의 거의 절반 수준이다. 아낀 식자재비로 서비스비용에 더 많은 할애를 한다고 봐야 할까? 효율성과 인간 대 인간의 서비스 가운데서 무조건 후자를 선택하는 문화 때문이지 않을까.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 무례가 되는 문화권과 눈을 항상 마주치며 대화를 나누는 문화권은 인간을 어디까지 비인간화할 수 있는지가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엄마를 위해 숙소 옆 대성당에 들렀다. 19세기 네오고딕 양식의 세인트 폴 캐시드럴(St. Paul’s Cathedral), 우리말로 하자면 성 바오로 대성당이다. 대도시의 중심부에 있는 것 치고는 규모가 작은 편이다. 이 동네는 천주교보다 개신교 신자들이 더 많은지 바로 근처의 침례교 교회(Collins Street Baptist Church)와 성공회 멜버른 교구(Anglican Diocese of Melbourne)가 더 규모가 크다. 내부가 어떻게 다른지 궁금하지만 성당과 달리 교회는 다녀본 적이 없어 들어가기가 조금 겁난다. 시간이 나면 한번 도전해 볼 생각이다.



돌아오는 길에 잊지 않고 크로와상 하나와 시나몬롤 하나를 사 왔다. 숙소로 오자마자 접시를 준비하고 망고 하나를 썰어 곁들였다. 엄마가 “우리 1일 1 망고 하네 “하고 말씀하신다. 나는 가끔 엄마의 요샛말 실력에 놀랄 때가 있다. 저런 건 어디서 배우셨지. 숏폼은 우리만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엄마도 유튜브를 통해서 열심히 보시더라. 엄마 또래 분들 중에는 숏폼 동영상을 보느라 밤을 새우는 분들도 있단다. 신기한 일이다. 도파민은 연령대에 무관하게 작동하는 모양이다. 우리 다음 세대는 부모 세대가 sns에 모든 것을 전시하는 것에 지쳐서 반-sns 세대가 될 것이라는 얘기를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데, 숏폼은 그때까지 계속 유행할까? 아무튼 숏폼을 그렇게 많이 보지는 않는 나로서는 방금 사 온 크로와상과 시나몬롤이 최고의 도파민이다. 특히 크로와상도 크로와상이지만 시나몬롤이 최고였다. 반으로 가르니 내부가 장미꽃 모양처럼 펼쳐지는데 겹겹이 들어간 시나몬과 설탕이 짜릿하다. 한동안 설탕과 밀가루를 끊은 적도 있었는데 도대체 어떻게 한 것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도시를 이동한 데다 멀리까지 나갔다 왔더니 일찍 피곤하다. 저녁 전까지 잠깐 숙소에서 쉬기로 했다. 시드니 숙소에서는 방이 좁아 매번 공용공간에 나가 여행기를 썼는데, 여기서는 방에 테이블까지 있어 작업하기가 훨씬 수월하다. 엄마는 누워서 디즈니플러스를 보고, 나는 사진을 정리하고 여행기를 쓴다. 짐무게 때문에 독서안경도 못 챙겨 오셨단다. 같이 노래나 틀어놓고 각자 책 읽고 글 쓰면 좋으련만. 엄마에게 잔소리하고 싶어 진다는 것은 나도 어른이 되었다는 뜻이겠지.



한국인은 국물이지


유럽여행을 다닐 때에도 국가를 넘어갈 때 꼭 국물이 있는 아시안 음식이 당겼는데, 여기서는 도시 하나를 옮겨왔다고 국물이 당기는 모양이다. 시드니에서 그렇게 라면을 먹었는데도. 엄마는 저녁으로 베트남 쌀국수가 어떠냐고 하신다. 근처 쌀국숫집에서 큰 쌀국수 한 그릇을 포장해 와서 숙소 안의 공용공간에서 같이 먹기로 했다. 쌀국수 고명을 세 개 고르라고 하여 두부 하나와 느낌 가는 대로 소고기 두 개를 주문했더니 그게 스지와 비계가 붙은 살코기였던 모양이다. 맑은 국물에 쫀득한 고기와 두부를 먹으니 피로가 싹 풀리는 느낌이다. 엄마도 만면에 미소가 가득하다. 성공적인 저녁식사다.



서울 살 때 동네친구였던 언니가 멜버른에 와 있어 잠깐 만나기로 했는데, 엄마는 숙소에서 쉬기로 했다. 쌀국수를 다 먹고 바로 나가려고 했더니 갑자기 폭우가 내린다. 스콜 같은 비가 호주에도 내린다니 신기하다. 약속시간을 30분 늦추고 걸어서 딱 중간인 사우던 크로스 역(Southern Cross Station)에서 만나기로 했다. 크리스피크림에서 각자 커피를 골랐다. 확실히 프랜차이즈라 그런지 이 지역 개인 카페보다는 훨씬 연한 커피가 나온다. 연하든 진하든 어쨌든 내 커피는 디카페인이지만. 사실 언니를 만난 이유는 아직도 멜버른 여행 일정이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드니만 생각하고 지도를 늘렸다 줄였다 해봤는데 자연환경은 딱히 특징적인 곳이 없어 난감하던 터였다. 멜버른은 자연보다는 도시를 좋아하는 사람들, 특히 도시의 작고 아기자기한 창의적인 공간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도시 같다. 물론 자연환경을 볼 수 있는 투어는 따로 마련되어 있다.




멜버른의 밤


계획이 얼추 마무리되고 나서 언니와 함께 강변을 따라 걸었다. 하루 종일 뜨겁다가 비가 미친 듯이 오더니 또 밤이 되니 쌀쌀하다. 반팔만 입고 나온 게 후회될 정도다. 대체 무슨 날씨가 하루도 안 돼서 이렇게 바뀌는지. 그래도 시원해지니 도시에 정감이 간다. 사실 깔끔하고 상냥한 시드니에 그새 익숙해졌는지 멜버른에 와서 도무지 정을 붙이지 못하고 있었다. 시끄럽고 정신없을 거라면 차라리 서울에 있고 말지! 하는 생각이 드니 확실히 여독이 쌓였나 싶기도 했다. 밤에 강가에서 보는 멜버른은 또 다른 느낌이다. 공기가 습하지 않아 쾌적하고 도시는 아름답게 빛난다. 중간 즈음에서 언니와 헤어져 플린더스 스트릿 역 지하 통로를 따라 나와 숙소로 돌아왔다. 혼자만의 산책을 즐기느라 무료 트램도 마다하고. 가끔은 혼자 있는 시간이 있어야 함께하는 여행도 즐거운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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