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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마닐 Feb 26. 2024

힙한 멜버른에서 더 힙한 거리

피츠로이 지역을 아시나요?


사람보다 오리가 더 많은 피츠로이의 정원


날이 시원하길래 신나서 창문을 열고 잤는데, 이렇게 시끄러울 줄은 몰랐다. 숙소 근처에 늦게까지 여는 술집이 많아 새벽이 되자 취한 사람들이 시끄럽게 소리를 질러댔다. 결국 얕은 잠을 자다가 여섯 시 반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쯤 되면 더 누워있어도 잠은 오지 않는다. 화장실에 가는 김에 샤워도 하고 들어왔다. 시드니에 있는 일주일 간은 매일같이 여행기를 올렸는데 멜버른으로 이동하며 반나절 밀리더니 진도를 따라잡기가 어렵다. 일어난 김에 글을 썼다. 방 안에 테이블이 있다는 게 너무 좋다.


아침식사로 여느 때처럼 오픈 샌드위치를 먹었다. 도시락은 닫힌 샌드위치다. 빵이 두 개니까 재료도 조금 더 들어간다. 이번에는 오이와 적양파가 추가되었다. 점점 샌드위치가 빵빵해지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일까. 그래도 점심을 먹고 3시간 후에 배가 꺼지는 것은 똑같을 것이다. 아침을 먹고 바로 채비하여 무료 트램구간 내의 동쪽 끝까지 이동한 다음 피츠로이(Fitzroy) 지역으로 이동했다.


박물관은 시드니에서도 큰 규모의 전시를 봐서 과감히 생략하고, 공원이 아름답다는 피츠로이 공원으로 향했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사람이 많지 않다. 트레져리 가든스(Treasury Gardens) 가운데에 있는 분수가에 잠깐 앉아 커피타임을 즐기기로 했다. 가만히 앉아있으니 인구밀도보다 조류밀도가 더 높아진다. 온갖 오리들이 우리를 둘러싼다. 한 발을 몸 아래로 숨기고 고개를 뒤로 돌려 기대고 자는 오리, 분수대의 물에 뛰어들어 유유히 떠다니는 오리, 열심히 털을 고르는 오리, 그냥 뚜벅뚜벅 걷는 오리, 깃 사이에 청록색의 예쁜 깃털을 숨긴 오리, 다이빙을 시도하는 오리, 아직 솜털이 남아있는 청소년 오리, 아기 오리 네 남매, 오리 사이에 서 있는 다른 새, 이 오리, 저 오리… 아무튼 그 동네 오리가 다 모인 분수대는 알고 보니 미국의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을 기리는 곳이었고, 그 옆에는 화재를 진압하다가 사망한 용감한 사람들을 기리는 공간이 따로 있었다.



트레져리 가든스에서 북동쪽으로 걸으면 좀 더 큰 규모의 피츠로이 정원이 나온다. 세련되지는 않지만 꽃으로 가득 찬 작은 규모의 식물원, 영국인의 집을 그대로 옮겨둔 쿡스 코티지(Cooks’ Cottage), 우리가 지금 보는 피츠로이 정원의 모습을 만든 정원사인 싱클레어의 집이었던 싱클레어스 코티지(Sinclair’s Cottage) 등을 볼 수 있다. 물론 가장 유명한 것은 소인국 마을인 모델튜더빌리지(Model Tudor Village)다. 나무를 보던 시야에서 조금만 아래로 내리면 밑에 자그마한 주택 모형들과 주택 사이즈에 맞춘 작은 나무들이 심겨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굶주리던 영국에 식량을 보내준 것에 대해 감사하는 의미로 선물해 준 마을이라고 한다.



피츠로이 정원에서 북쪽으로 나오면 바로 서쪽에 세인트 패트릭 대성당(St. Patrick’s Cathedral)이 있다. 멜버른 시내에서 보던 세인트 피터 대성당보다 훨씬 규모가 크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노란빛이 실내를 감싸 따뜻한 느낌이 드는 성당이다.




힙한 멜버른에서 더 힙한 지역, 피츠로이


성당에서 북쪽 길을 따라 걸으면 피츠로이 상점가다. 작고 개성 강한 가게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각종 편지지와 노트를 파는 종이가게, 밖에서 보는 사람도 단박에 기분이 좋아지는 꽃가게, 커피가 맛있어 보이는 카페, 화장품 가게 등등.. 호주의 유명한 차 브랜드 T2의 매장과 세계적인 업사이클링 브랜드 프라이탁의 매장도 있다. 선물을 사기에 좋은 거리다. 비록 우리의 짐은 7kg으로 한정되어 있어 많은 걸 사진 못하지만.



멜버른에서 유명한 것은 도넛이다. 한번 먹어보고 싶던 차에 찾아보니 비스트로 모건(Bistro Morgan)의 스트로베리 도넛이 맛있단다. 커피와 함께 주문했다. 보기에는 그냥 던킨도넛의 도넛과 비슷하다. 필링 없는 도넛 빵 위에 분홍색 딸기 크림을 올리고 스프링글을 뿌렸다. 근데 맛은 아주 상큼하고 신선하다. 딸기 크림의 레시피가 궁금할 정도였다. 배불러서 별 생각이 없다던 엄마는 도넛을 한입 드시더니 시나몬롤도 시키자 하신다. 주문했더니 딸기도넛이 더 맛있다고 하셨지만. 내 입맛엔 둘 다 맛있었다. 그렇지만 시나몬롤은 전날 먹는 룬 크루아상이 훨씬 맛있긴 했다.





아무튼, 수영


샌드위치에다가 도넛까지 먹었더니 엄청 배부르다. 배부를 때는 움직이고 운동을 해야 한다. 피츠로이 수영장 바로 근방에 대형 수영복 할인매장이 있다. 바다수영만 염두에 두고 수영안경을 안 가져왔더니 정작 제대로 된 수영장에서 수영을 못해서 아쉽던 터였다. 스피도 브랜드의 수영안경을 하나 사서 나왔다. 우리나라 동네 수영장은 25미터 풀에 레인 끝에서 끝으로 가도 대부분 바닥이 발에 닿지만 여기는 50미터 풀에 가장 깊은 곳은 2.2미터에 달한다. 엄마는 깊은 게 무서워서 수영을 안 한다고 하여, 시내로 다시 나가고 나는 한 시간 반 동안의 꿀 같은 수영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보통은 2km 정도를 수영하는데 레인 길이가 길어지니 체력 소모도 심하다. 그래도 대여섯 바퀴가 지날 무렵부터 몸이 적응하는 느낌이다. 접영은 25미터를 완주하는 것도 힘들더니 50미터는 언강생심, 마지막 깊은 구간에서 간신히 자유영으로 바꿔서 끝에 도착했다. 그래도 오래간만에 마음껏 몸을 움직이니 몸도 마음도 가볍다. 혼자 여행 다닐 때에는 신경 쓸 것이 오로지 나뿐이었는데 엄마와 다니니 장점도 많지만 그만큼 체력도 정신력도 좀 더 빨리 닳는 느낌이다. 여행한 지 일주일이 되니 나도 모르게 자꾸 짜증이 났다. 수영으로 스트레스가 풀리고 나니 뒤늦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엄마에게 더 잘해줄 수 있을 것 같다.



원래는 저녁식사를 피츠로이의 명물인 트램 식당에서 하려고 했는데 동네 구경은 진작 끝났고 예약 시간까지는 한참 남아 결국 예약을 취소하기로 했다. 대신 걸어서 밖에서 트램식당을 구경했다. 멋진 그라피티가 그려진 골목에 있다. 건물 옥상 위에 트램 세 대를 올려서 영업 중이다. 마치 달리는 트램 안에서 식사하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는 곳이다. 시나몬롤까지만 안 먹었어도 한 끼 먹고 갔을 텐데 조금은 아쉬운 마음이다.



벌써 한참을 걸었더니 다리가 아프기 시작한다. 여기는 유료트램구간에 해당하는 곳이라 멜버른의 교통카드인 마이키 카드를 사기로 했다. 세븐일레븐에서 판다고 했는데 카드 값만 7달러다. 일단 카드 당 10달러씩만 충전했다. 무료트램 구간이 있다는 것은 유료트램 구간 비용이 비싸다는 뜻이었나 보다. 내릴 때 보니 5달러 넘게 찍혀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구간별 가격이나 거리별 가격도 없고 그냥 일괄 가격으로 비싸게 받는다고 한다.




여행지에서는 역시 1일 1 마트


돌아오는 길에 마트를 또 들렀다. 숙소에서 해 먹고 도시락을 싸 먹으니 마트에서 많은 시간과 돈을 쓰게 된다. 오늘은 마감 세일로 양념된 닭구이를 한 팩에 1달러 대에 판매하고 있다. 횡재했다. 토르티야 한 팩을 같이 사서 아보카도, 채소, 닭구이를 같이 넣어 싸 먹었다. 아주 별미다.



이른 시간이라 숙소에서 잠깐 쉬다가 다시 야경을 보러 나가기로 했다. 어제 언니와 본 멋진 야경을 엄마에게도 보여주고 싶었다. 사진을 정리하다가 엄마 사진만 따로 추려서 보내드렸다. 여행 초반 사진은 정말 행복해 보였는데 내가 지친 그 시점부터 바로 표정이 어두워진 것이 보여 마음이 영 안 좋았다. 사진을 찍을 때 표정을 더 밝게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숙소에서 나왔을 때에는 아직 해도 지기 전이었는데 벌써 거리는 사람으로 넘친다. 시드니에서도 그러더니 금요일 저녁은 정말 불태우는 사람들인가 보다. 강가의 식당마다 사람이 가득가득이다. 우리도 맥주 한 잔 할까? 하는 엄마의 제안에 돌아오는 길에 리쿼스토어에 들렀다. 여기는 마트에서 맥주를 팔지 않고 따로 주류점에서 사야 한다. 앞에 가드가 서 있어서 앞서 들어간 애들은 다 신분증 검사를 하더니 내가 가방에서 여권을 찾으니까 그냥 들어가란다. 하긴 유럽여행을 다닐 때부터 술 살 때 신분증 검사를 한 적이 없었다. 그래도 꺼내려고 했는데. 아무튼 여느 때와 같이 엄마는 맥주, 나는 무알콜 맥주. 안주는 감자와 토란을 얇게 튀겨낸 과자. 숙소 공용공간의 떠들썩한 분위기에서 맥주를 마시고, 아침에 저며놓은 감자를 가지고 올라가 탄 얼굴에 팩을 하고 나니 밤이다. 감자 한 알을 사는 게 마스크팩보다 저렴한 데다 진정, 쿨링 효과가 뛰어나다. 엄마의 삶의 지혜란. 물론 감자칼로 일일이 얇게 저미는 건 내 팔근육이 힘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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