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작은 야생의 펭귄들
오늘은 대망의 그날, 바로 펭귄 퍼레이드를 보러 가는 날이다. 멜버른에서 야생의 펭귄을 볼 수 있다는 소식에 정말이지 설렜었다. 이곳은 남극과 가까워서 시내에서 차로 2시간만 가면 펭귄들의 서식처에 도착할 수 있다. 펭귄들이 항상 서식처에 있는 것은 아니다. 하루 혹은 이틀 사흘 간의 사냥을 마친 펭귄들이 해가 지면 한꺼번에 무리 지어 집으로 돌아오는데 그 모습이 마치 퍼레이드를 펼치는 모습 같다고 하여 펭귄 퍼레이드라고 한다. 펭귄은 총 17종이 있는데 이곳에 사는 펭귄은 리틀펭귄이라고 하여 17종의 펭귄 중 가장 작은 종이다. 그 조그만 녀석들의 퇴근길을 구경할 생각에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엄마 나는 17만 원을 태워서 펭귄들이 퇴근하는 모습을 꼭 봐야겠어.”
아무튼 투어는 펭귄에서부터 시작하지 않는다. 펭귄들은 해가 져야 퇴근하는 야근러들이다. 그렇지만 인간들은 아침 열 시에 시내 모처에서 모여 출발한다. 그러니 이 투어는 총 12시간 이상을 함께하는 장거리 투어다. 클룩을 통해서 예약했더니 한국인 투어가 아니라 호주인 운전사 겸 가이드가 함께하는 투어였다. 오히려 좋다. 한국인 투어와 현지인 투어의 장단점이 있다. 한국인 투어는 빠르고, 많은 곳을 하루 만에 돌고, 인증샷을 남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적합하며, 밥시간이 정확하다. 현지인 투어는 느긋하고, 경치가 좋은 곳은 돌아볼 시간을 비교적 충분히 주며, 자연경관을 편안하게 즐기기 좋고, 20명 내의 소규모인 경우가 많다. 다만 예정된 시간보다 버스가 좀 늦게 도착하는 경우가 많고, 승객들도 10~20분 정도 늦는 경우가 많은 ‘호주 시간형’ 투어다. 그리고 12시에 점심을 먹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다. 우리는 점심이 2시, 저녁이 5시여서 애매했다. 도시락을 싸갖고 다니는 여행객이라면 오히려 현지인 투어가 나쁘지 않다. 적당히 배고플 때 아무거나 꺼내서 먹으면서 다니면 된다. 외식파라면 한국인 투어가 오히려 잘 맞을 수 있다.
10시 집합, 10시 15분 출발이라던 버스는 10시 반이 넘어서야 도착했고 11시 즈음이 되어서야 출발했다. 첫 도착지는 퍼핑빌리다. 사실 펭귄만 예약하고 싶었는데, 펭귄 퍼레이드 투어 프로그램은 모두 이 퍼핑빌리와 함께 묶여있다. 퍼핑빌리에서는 진짜 증기기관차를 탈 수 있다. 특이점은 발을 밖으로 내놓고 탈 수 있다는 점이다. 아무튼 유치한데, 별 기대가 없었는데, 생각보다 너무 재밌었다. 역시 유치한 게 최고다. 이곳에 증기기관차가 만들어진 게 1900년대라 직원들은 아직도 그때 스타일의 유니폼을 착용한다. 원래는 역이 한 두 정류장 더 있는 모양인데 지난번 폭풍으로 철도가 일부 파손되어 지금은 단축운행을 한다고 한다. 출발할 때는 하얗게 수염이 난 할아버지 차장님이 커다란 종을 울리면서 “All aboard!”를 외친다. 그러면 기차가 진짜 칙칙폭폭 소리를 내면서 움직이기 시작한다. 엄청 신난다.
열차를 25분쯤 타고 움직이는데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제법 멋지다. 마치 열대우림 속을 달리는 것 같다. 아기 고사리와 커다란 나무 고사리, 껍질이 벗겨지고 있는 나무들, 다양한 새들을 볼 수 있다. 중간에 작은 다리가 하나 있는데 열차의 오른편에 탑승하면 기차가 휘어서 돌아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마치 호그와트 급행열차의 미니 버전 같다. 가끔 매캐한 냄새가 나기도 한다. 여기 기차는 아직도 석탄을 태워서 운행하기 때문이다. 기차에서 내려서 화장실에 갔더니 얼굴에 작은 검댕 조각이 여기저기 붙어있었다. 여기엔 불편한 진실이 하나 있다. 호주는 미국과 더불어 파리 기후협정에 서명하지 않은 국가 중 하나다. 석탄 수출량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탄소 배출량에 개의치 않고 이런 열차를 계속해서 운행할 수 있는 것이다. 여행이라는 것 자체가 이동부터 액티비티까지 탄소를 발생시키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는 행위라지만. 아무튼 역에 도착하면 열차 모형을 볼 수 있는 작은 박물관도 있으니 한번 구경해 보자.
퍼핑빌리에서 나오니 벌써 열두 시 반이다. 평소라면 열한 시에 점심을 먹고 다섯 시쯤 저녁을 먹는, 거의 사찰 공양 시간에 가까운 식사시간을 지키는데 여기서부터 한 시간 반은 더 가야 점심식사를 하는 곳에 도착한단다. 마지막 일행이 늦길래 잠깐 미니버스에서 내려서 삶아온 계란을 챙겨 먹었다. 뭐라도 가져오길 천만다행이다. 이동하는 대부분의 시간을 자면서 갔지만 눈을 뜨고 있는 시간에는 창밖을 구경했다. 경관과 농촌을 전공하신 교수님께서 수업시간에 영국식 조경(English landscape) 사진을 많이 보여주셨는데, 호주의 한적한 농촌마을 전경이 딱 그 사진들과 닮았다. 현재진행형 식민지의 모습이다. 아무튼 평화로운 풍경이다. 드넓은 초원과 완만한 언덕이 연속해서 보이고 유럽풍 회화에서 많이 보던 나무들이 일렬로 서서 땅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초원 위에는 소와 말과 양이 방목되어 풀을 뜯고 있다. 가끔 도로에는 로드킬 당한 새와 동물들이 보인다. 특히 많이 보인 새는 구스인데, 이곳 새들은 차를 무서워하지 않아 아주 느긋하게 길을 건넌다. 우리 차도 구스를 피하기 위해 잠시 세웠다가 다시 출발했다.
점심식사 장소는 필립 아일랜드 내의 초콜릿 팩토리다. 팩토리 내부는 마치 윌리 웡카의 초콜릿 공장을 생각나게 한다지만, 카페와 기념품샵까지만 무료 관람 구간이다. 우리는 일단 공장 앞 잔디밭에서 도시락을 풀었다. 오늘은 우리 둘만 온 게 아니라, 내 동네친구 언니와 그 언니의 친구까지 넷이서 함께 투어를 한다. 그러니 도시락도 두 배. 한국인은 포트럭 파티가 맞지 않는다는 얘기가 있다. 외국에서 포트럭 파티란 각자 1인분씩 싸와서 함께 나눠먹는 개념인데, 우리는 인당 2~3인분씩 챙겨 와서 결국엔 인원수의 2~3배에 해당하는 음식이 생기기 때문이다. 언니네는 김밥을 다섯 줄이나 쌌고 우리는 계란과 빵과 과일을 더 많이 준비해서 결국 한국식 포트럭 파티 같은 점심과 저녁을 먹었다. 언니네 김밥은 진짜 맛있었다. 우리 샌드위치도 맛있었고. 배고플 때 먹으니 두 배로 맛있다.
초콜릿팩토리에 할애된 시간은 단 40분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도시락을 먹고 급히 카페에 가서 주문을 시작했다. 줄이 길어 돌아가면서 기념품샵에 가서 초콜릿을 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각자 커피, 차이티, 핫초코 등을 시키고 같이 먹을 초콜릿소스를 뿌린 초콜릿케이크도 주문했다. 뒷목까지 혈당이 치고 올라오는 짜릿한 맛이다. 결국 여기서도 본래 시간보다 20분 늦게 출발했다. 이쯤 되면 늦을 것을 생각하고 일부러 시간을 여유 있게 주는 게 아닌가 의심이 갈 정도다. 우리도 호주 시간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다음 행선지는 노비스 센터(Nobbies Centre)다. 화산섬을 전망할 수 있는 데크길이 있는 관광명소다. 섬은 여러 이름이 있는데, 호주 한가운데 사막에 있는 호주 원주민들의 성지 울루루와 닮았다고 하여 울루루락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라운드 락이라고 하기도 하고, 구글 지도에는 또 바다표범 섬인 ‘Seal island’라고 나온다. 한국인들 눈에는 딱 성산일출봉이다. 까만색 화산석이 도처에 보이는 모습이나, 둥글게 부푼 수플레처럼 올라온 모습이나. 다들 각자의 문화적 배경대로 읽어내는 것이다.
아무튼 여기서 섬을 보는 것도 멋있지만, 더 귀여운 것은 섬 반대편에 있다. 노비스 센터 곳곳에 2리터 콜라병이 딱 들어갈만한 작은 나무집이 여기저기 지어져 있었는데, 알고 보니 갓 태어난 펭귄들을 보호하기 위해 인간이 지어준 집이었다. 나무집 속이나 데크길 아래 경사지 곳곳에 굴을 파고 펭귄의 집이 있다. 갓 태어난 새끼 펭귄이나 솜털을 반쯤 벗은 펭귄, 다친 성체 펭귄 등 아직 바다에 나가지 못하는 펭귄들이 이곳에서 쉬고 있다. 생각보다 너무 작은 펭귄의 모습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너무 귀엽다. 정말 귀엽다. 저녁에 있을 펭귄 퍼레이드가 더욱 기대되는 모습이다. 다 큰 펭귄도 키가 33cm에 1kg 정도 나간다고 한다. 친구네 고양이들이 작아도 3kg대였는데, 그 1/3 사이즈라고 생각하니 정말 숨이 막히는 귀여움이다. 천혜의 자연자원을 가지고, 지키고,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는 호주인들이 정말 부럽다. 도시에서 2시간만 나오면 진짜 펭귄이 있다니!
점심을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이제 저녁을 먹으러 간단다. 한국인으로서 용납이 안 되는 식사 스케줄이지만 호주 스타일이니 문화적 관용으로 포용하기로 한다. 근데 밥 먹으러 가는 길도 심장이 위태롭다. 귀여운 왈라비들로 가득한 길을 지나기 때문이다. 운이 나쁜 날에는 같은 길에서 왈라비 한 마리도 찾기 힘들다는데, 우리가 간 날은 왈라비 천국 그 자체였다. 자연환경이 좋으면 이런 식으로 야생의 동물들이 살아남을 수 있나 보다. 왈라비는 캥거루와 비슷하게 생긴 동물이지만 평균 키 90cm에 몸무게는 20kg로 매우 작다. 매우 작고 귀엽다. 시드니 동물원에서 밥을 줄 때 조심스럽게 다가와 손에서 사료 한 알 한 알 받아먹던 모습과 그 입술의 감촉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그런 왈라비가 초원에 아주 많이 퍼져 있다. 엉덩이를 하늘 높이 들고 고개를 바닥에 파묻고 뭔가를 찾아서 먹는 녀석, 마치 캥거루처럼 위풍당당하게 가슴을 부풀리고 우리를 쳐다보는 녀석, 깡충깡충 뛰는 녀석… 정말 다양한 왈라비들이 있지만 백미는 바로 티브이 앞에 앉은 듯이 퍼질러 앉아 편히 쉬는 녀석이었다. 정말 귀엽다. 자꾸 귀엽다고 해서 미안하지만 귀여운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암튼 굳이 동물원에 가지 말고 필립 아일랜드 투어에 참여해서 각종 동물을 야생 상태에서 보는 것을 추천한다.
저녁식사는 카우스 해변(Cowes Beach)에서 했다. 물이 맑고 바위가 아름다운 해변이다. 각종 레스토랑과 카페, 바가 많지만 늦은 점심식사에 디저트까지 먹었더니 별로 배가 고프지 않다. 해변가의 벤치에 앉아 바나나브레드 하나를 먹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상점가 구경에 나섰다. 각종 펭귄, 코알라, 캥거루 등등의 기념품을 파는 기념품점이 사방에 있다. 가격도 저렴한 편이다. 여기서 집에 가져갈 자석을 구매했다. 펭귄 퇴근길을 3D로 보여주는 자석이다. 암튼 머릿속이 온통 펭귄이다. 펭귄 퍼레이드가 밤늦게라 여기서 한 시간 반이나 주는 바람에 구경을 마치고도 시간이 남았다. 기사가 차에 탈 생각하지 말고 바에서 맥주나 한잔하고 오라고 해서 냉큼 근처의 바로 들어갔다. 각자 샴페인과 칵테일을 시키고 나는 아이스크림을 넣고 휘핑크림을 얹은 디카페인 커피를 한 잔 주문했다. 무알콜 맥주와 디카페인 커피와 간접흡연이 함께하는 가짜에 가까운 삶이지만 나름대로 건강하고 재밌다. 금주는 425일째 이어가고 있다.
아무튼 버스를 타고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펭귄 퍼레이드를 보러 갔다. 벌써부터 사람이 엄청나게 많다. 주차장도 많아 주차장 번호를 꼭 외우고 들어가야 한다. 나오는 길에는 반대 방향인 데다가 어두워진 후라 주차장 번호를 모르면 타고 온 차를 절대 찾을 수 없다. 펭귄 퍼레이드 입구 역할을 하는 건물은 콘크리트와 금속 패널이 날아갈 듯이 펼쳐져 멋진 형태다. 누가 설계한 것인지 찾아보니 시드니와 덴마크 호바트에 사무실을 두고 있는 건축가 그룹 Terrior가 설계했고 2019년 1월에 오픈했다고 한다. 재료의 쓰임과 구조적인 형태가 정말 아름답다.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입장하는 건물이니만큼 기둥이 없는 커다란 홀을 만드느라 그런 기하학적인 구조를 사용한 것일 테다.
여기서도 각종 펭귄 굿즈의 유혹에 흔들리다가 펭귄들이 퍼레이드를 시작한다는 8시 15분보다 30분 이르게 입장했다. 일찍 들어가야 좋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고 한다. 건물에서 나오자마자 자리가 있는 게 아니라, 기다란 데크를 돌고 돌아가야 자리가 있다. 아까 노비스 센터에서처럼 굴마다 아기 펭귄들이 엄마를 기다리고 있다. 펭귄들의 퇴근로는 크게 두 가지인데, 사람들이 앉는 자리 가운데 모랫길이나 자리에서 바다를 보았을 때 방향을 기준으로 왼쪽에 또 길이 있다. 펭귄이 지나가는 길 근처에 앉아야 가까이서 볼 수 있다. 적당히 앞자리에 자리를 잡고 기다리기 시작했다. 제법 날이 차서 옷을 따뜻하게 입어야 한다. 기다리는 동안 직원들이 앞에서 펭귄의 생태와 습성에 대한 설명을 해준다. 해가 지고 나서는 플래시 유무와 상관없이 사진 촬영이 금지된다. 대신 홈페이지에서 얼마든지 사진을 다운로드할 수 있다며 큐알코드를 보여준다.
사람들이 자리에 앉아서 한참을 기다리듯이 갈매기들도 모여들더니 해안가 쪽에 자리를 잡고 기다리기 시작한다. 낙오되는 작은 펭귄들을 잡아먹기 위해서인 것 같다. 저쪽 왼쪽에서도 맹금류들이 활강하며 바다를 살핀다. 이처럼 밝은 햇빛 아래서는 이처럼 포식자들에게 노출되니 해가 지고 나서야 펭귄들이 퇴근길에 오르는 것이다. 바다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과연 저게 펭귄인가 갈매기인가 한참을 살피다가 실망하기를 수 차례, 드디어 가로로 긴 갈매기가 아니라 세로로 긴 펭귄의 하얀 배가 검은 바다를 가르고 나타났다. 야간 시력이 좋지 않다는 것을 잊고 안경을 챙겨 오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살피는데 펭귄이 한 마리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저들끼리 모래사장으로 나오기 전에 최소 다섯 마리, 많게는 스무 마리까지도 모여서 무리 지어 나오는 게 보인다. 포식자들로부터 살아남기 위한 방법이다. 그 작은 펭귄들이 생존을 위해 뒤뚱뒤뚱 움직인다. 맨 앞에 선 가장 용감한 펭귄이 방향을 잡고 달리기 시작한다. 나머지가 뒤따라 달린다. 속도는 빠르지 않지만 기세만큼은 훌륭하다.
여기서 한 무리, 저기서 한 무리, 눈을 가늘게 뜨고 네 다섯 무리 이상 지나가는 것을 보더니 사람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한다. 이쯤 되면 데크에서 펭귄들이 움직이는 것을 더 가까이서 볼 수 있다. 우리도 일어나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상에. 아까까지는 비어 있던 데크 주변이 어디를 보아도 펭귄 천국이다. 사진을 찍지 말라고 했지만 사람들이 플래시를 끄고 조심스레 한 장씩 담아가는 게 보인다. 새끼들도 굴속에 있다가 엄마를 마중 나왔다. 몸을 가로지르는 대각선을 중심으로 아래는 갈색의 솜털이 부숭하고 위에는 제법 멋진 파란 깃털을 가진 귀엽게 못생긴 청소년 펭귄이 지나가는 펭귄마다 들여다보고 있다. 마침내 엄마를 만난 펭귄들은 소리를 내며 반긴다. 3보 1 펭귄을 하며 데크길을 즐겼다. 엄마가 나보다 더 신났다. 너무 귀엽다고 둘이 오두방정을 떨며, 추위에 떨며, 버스로 돌아갔다. 도시로 돌아오는 길은 조용하고 평화로운 잠에 빠져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