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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마닐 Mar 07. 2024

50년이 넘은 스티커 사진기라니?

공원과 예술의 도시 멜버른



자유따님의 날


호주에 온 이후 두 번째 일요일이다. 일요일이면? 엄마가 성당에 가는 날. 나는 미사시간 동안 꿀 같은 자유시간을 누리는 날이다. 원래는 새벽에 일어나서 수영장에 가려고 했는데, 일찍 일어나기는 하였으나 수영장 홈페이지를 뒤늦게 찾아보니 일요일에는 자유수영 레인을 닫는단다. 아쉬운 일이다. 이렇게 된 김에 엄마를 성당에 데려다주고 카페에 가기로 했다. 자유따님의 날이라는 건 사실 별게 아니라, 남이 타준 커피를 마시면서 밀린 여행기를 쓰는 날인 것이다.


조금 일찍 숙소에서 나온 김에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두 시간. 카페로 유명한 디그레이브스 거리(Degraves St.)로 갔다. 성당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일요일 오전이라 브런치를 즐기러 나온 시민들이 많다. 좁은 거리 양쪽에 카페들이 간판을 내밀고 있고, 거리 가운데에는 파라솔과 테이블들이 놓여있다. 시끌시끌한 인파를 피해 창가 쪽에 자리가 있는 카페를 찾았다. 알고 보니 이 거리의 터줏대감인 아주 오래된 카페인 Degraves Espresso다. 멜버른 하면 매직이지. 플랫화이트보다도 진한 것이 매직의 맛이다. 물론 나는 디카페인 커피를 마시니 기분만 내는 꼴이지만. 애플워치로 2시간 알람을 맞춰두고, 키보드를 꺼내고 앞에 핸드폰을 세워두고, 커피 한 잔을 천천히 마시며 여행기를 채워나간다. 유럽여행기를 매일매일 쓸 때에는 그날그날의 짧은 메모만 남겼는데 책을 내면서 그 글을 계속해서 다듬는 작업을 하다 보니 글을 쓰는 내공도 많이 는 것 같다. 그래도 매일의 짧은 메모라도 남긴 것이 책을 내는 데 큰 바탕이 되었다. 이 글도 나중에 어떤 식으로 쓰이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엄마와의 추억을 남기는 데에는 도움이 되겠지.





50년이 넘은 스티커 사진기라니?


멜버른 여행계획은 거의 시드니에서부터 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무계획으로 왔는데, 그 와중에 일찍부터 하고 싶다고 점찍어둔 것이 있었다. 바로 50년이 넘은 스티커 사진기에서 사진을 찍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스티커’ 사진기는 아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인생네컷 스타일의 사진이 나오는데, 이제는 세계에서 단 한 곳의 공장에서만 이곳에서 쓰는 필름을 생산한다고 한다. 진짜 옛날 필름에 찍히는 즉석 흑백사진기다.


“엄마, 지금 그걸 볼 때가 아니야.” 아침부터 침대에 누워 드라마를 보고 있는 엄마를 불렀다. 숙소 거울 앞에 세웠다. “사진을 찍으러 가기 전에 포즈를 정해야 해.” 사뭇 진지한 태도다. 2년 전쯤 친구들과 첫 인생네컷을 찍으러 갔었다. 그냥 들어가면 사진을 찍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포즈를 하나도 정하지 않았더니 안에서 우왕좌왕하다가 넷 다 지쳐서 나온 경험이 있다. 그나마 한국의 즉석사진기는 잘 나온 사진을 고를 수나 있지, 이곳의 사진기는 매우 빠르게 세 컷을 찍고 그대로 나온다고 한다. 디지털 방식이 아니니 당연히 미리 보기도 없다. 여기서 찍은 사진들을 보니 아주 좁은 프레임 안에 있어 거의 얼굴만 나오는 모양이다. 결국 고민하다가 정면을 보고 한 컷, 마주 보고 한 컷, 반대로 보고 한 컷을 찍기로 했다.


성당 가기 전에 찍으려고 했더니 고장 났다는 메모가 적혀 있었다. 성당 다녀오는 길에 다시 보니 열려 있단다. 엄마랑 숙소 앞에서 만나 바로 즉석사진기로 갔다. 한 뼘밖에 안 되는 짧은 커튼을 친다. 1달러나 2달러 동전을 정확히 8달러어치만큼 넣으면 불이 켜진다. 자리는 아주 좁고 의자가 딱 하나 놓여 있어 엉덩이를 반 쪽씩 걸치고 앉았다. 벌써부터 웃음이 나온다. 집중해서 앞을 보고 표정을 지었다. 플래시가 터지며 찰칵. 또다시 마주 보고 찰칵. 반대편을 보고 찰칵. 그리고 밖으로 나와 3분을 기다린다. 그러면 기계에서 위잉 위잉 소리가 들리고 사진이 딱 한 장 나온다. 마지막 사진은 내 얼굴의 절반이 프레임 밖으로 튀어나가 있고, 사진은 여기저기 얼룩덜룩하지만 완전 옛날 감성 그대로다. 추억의 순간을 남기기에 제격이다. 잉크도 아직 덜 마른 사진을 소중하게 들고 마르기를 기다리며 이동했다.



점심은 오래간만에 포장음식이다. 쌀국수와 도넛을 포장해 왔다. 지난번에 먹었던 쌀국숫집이 아주 맛있고 가성비가 좋아 다시 찾았더니 일요일은 영업을 안 하는 모양이었다. 결국 다른 집에서 샀는데 맛은 그보다 못해서 아쉬웠다. 도넛은 꽤 맛있었다. 뉴질랜드 스타일의 크림 도넛과 딸기도넛을 각각 하나씩 샀는데 여기 딸기 도넛은 속에 제법 맛있는 딸기잼이 들어있었다. 멜버른의 명물은 아무래도 딸기 도넛인 모양이다. 크림 도넛에 든 크림도 맛있었다. 밥 먹은 자리를 치우고 숙소에서 필요한 짐만 챙겨 다시 나왔다. 오늘 오후에도 많이 걸을 예정이다.






안도 다다오가 멜버른에?


플린더스 역에서 다리를 건너 남쪽으로 내려가면 퀸빅토리아 가든(Queen Victoria Gardens)이 나온다. 여기엔 아주 특별한 파빌리온(MPavilion)이 있다. 파빌리온은 우리나라로 따지자면 정자 같은 개념인데, 지붕과 기둥으로 이뤄진 구조물을 말한다. 보통은 실외공간이지만 실내공간으로 만드는 경우도 있고, 임시 건축물인 경우도 많다. 형태나 기능에 별다른 제약이 없다 보니 작가들이 자신의 예술성을 뽐내기에 아주 적합한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곳의 파빌리온은 매해 건축가나 디자이너가 새 파빌리온을 만드는데, 우리가 갔을 때에는 안도 다다오가 만든 파빌리온이 있었다. 3월 초까지 있다가 철거하고 다음 작가의 작품을 짓을 예정이다. MPavilion의 역사도 꽤 오래되었다. 안도 다다오의 파빌리온이 10번째라고 하니 벌써 십 년째다.


엄마도 안도 다다오와는 구면이다. 1년 전에 함께 제주도 여행을 갔는데 거기서 본태박물관에 함께 갔었다. 멀리서 파빌리온을 보더니 바로 알아보신다. 분위기가 비슷하단다. 역시나 안도의 전형적인 스타일이다. 당연히 노출콘크리트를 재료로 썼다. 네모난 콘크리트 구조물 위에 공간을 두고 둥그런 지붕이 떠 있다. 한 번에 파빌리온 내부 공간이 보이지 않도록 벽을 한 번 꺾어 들어간다. 두 콘크리트 벽 사이로 들어가며 기대하는 마음이 생긴다. 위를 보니 둥근 지붕 아래로 물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들어가니 의외로 북적거린다. 소말리아 난민들을 돕기 위한 전통공예 수업이 한창이다. 바닥을 반으로 나누어 절반은 돌바닥으로 되어 있고 나머지 절반은 얕은 물이 담겨 있다. 물가에는 나무 스툴이 놓여 있어 물을 바라보며 명상을 하거나 휴식을 취하기에 좋다. 공원 한가운데 있어 계속 나뭇잎이 떨어지는지 직원 하나가 계속 물속을 걸어 다니며 뜰채를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다.







파빌리온에서 나와 공원을 빠져나왔다. 길 건너편에는 현대예술로 유명한 ACCA(Australian Centre for Contemporary Art)가 있다. ACCA로 가는 길이 모두 예술인 마을의 분위기다. 다만 일요일이라 그런지 사람은 없다. 드디어 도착한 건물은 여러 금속 판이 서로 엇갈리며 자리를 잡은 듯한 모습이다. 꽤 큰 규모의 건물인데 전시 공간으로 오픈된 곳은 규모가 크지 않다. 다른 공간은 아마도 사무 공간이나 스튜디오로 쓰이는 것 같다. 바로 옆에는 Malthouse라는 맥줏집 같은 이름의 공연장이 있다. 예술 관련 행사가 있을 때 찾아오면 좋을 것 같은 동네다.


National gallery of victoria
National gallery of victoria





다시 길을 건너 이번에는 오스트레일리아 참전기념관(Shrine of Remembrance)으로 갔다. 멀리서 웅장한 규모의 건축물을 보는데,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식민지에서 독립을 했지만, 이곳은 현재진행형 식민지다. 호주인들은 영국에 의해 전쟁에 징병당한 것이 아닐까? 아까 방문했던 공원의 이름도 퀸 빅토리아 가든, 즉 영국 여왕의 정원이고, 우리가 곧 가려는 공원의 이름은 로열보타닉 가든스 빅토리아, 즉 여왕을 위한 황실 정원이다. 모든 것이 영국을 기준으로 적혀 있다. 어쩌면 일제강점기가 끝나지 않았다면 우리나라에도 천황폐하 공원 따위가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영국인이 아닌 호주 원주민들은 이러한 역사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을까.






걷고 또 걷는 효녀의 길(?)


아무튼 하도 걸었더니 이미 지친 발을 이끌고 드디어 로열 보타닉 가든스 빅토리아, 여왕을 위한 황실 정원에 도착했다. 벌써부터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정원을 한 바퀴 도는 차를 탈까 했더니 갓 출발 시간이 지나 애매했다. 결국 걸어갈 수 있는 데까지 가기로 했다. 정원은 이색적인 식물들로 가득했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초록색으로 싱그럽다. 대부분은 열대식물로 이루어져 있어 열대지방에 온 기분이다. 그런데 활엽수보다는 침엽수가 많다. 다들 잎이 뾰족하거나 단단하거나 통통하다. 인간도 견디기 힘든 이 변덕스러운 날씨를 견디기 위해서는 물은 적게 증발하고 들어온 영양소는 잘 간직할만한 잎이어야 할 것이다.


길도 몇 번이나 잘못 들었는지. 지친 발걸음을 이끌고 집에 가려니 엄두가 나지 않는다. 트램을 타자니 시내 무료트램구간 밖이라 카드에 돈이 들어있어야 하는데 잔고가 1회 분도 채 남지 않아 난감하다. 그렇다고 충전을 하러 가자니 충전을 하러 가는 데까지 15분, 다시 트램을 타러 가는 데까지 10분이다. 택시를 타자니 가격이 나쁘진 않은데 도통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근데 공원의 가장 가까운 출구까지만 가면 집까지 걸어서 20분 내에 도착한다. 벤치에 눕듯이 앉아 “엄마, 택시 어때? 아냐. 우리 할 수 있어. 이겨내자” 등등 헛소리를 하다가 결국 10분만 더 에너지를 충전해서 일어나 걸어가기로 했다. 오늘도 2만 보는 채우겠다. 엄마의 꿀잠을 위한 특효약이다. 걷고 걷고 또 걷는 효녀의 길이란.




결국 엄마를 어르고 달래 걸어서 오는 데 성공했다. 사실 나도 엄청 지쳤다. 그래도 저녁은 안 먹을 수 없지. 오늘은 고기를 구워 먹어 보기로 한다. 마트에서 허브에 양념된 버터가 들어 있는 양고기 스테이크와 같이 구워 먹을 버섯, 양파 등의 야채를 샀다. 양고기는 초원에서 방목해서 키웠다는 마크가 찍혀 있다. 숙소에 와서 남은 브리또를 굽고, 파프리카와 야채를 얹고, 프라이팬에 구워낸 야채와 찹스테이크로 구운 양고기를 넣어 돌돌 말았다. 남은 양고기 스테이크는 따로 하나씩 집어먹는데, 지방도 별로 없는 고기가 너무 퍽퍽하지도 않고 촉촉하니 맛있다. 맥주와 무알콜 맥주 한 잔씩 하면서 만찬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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