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트 오션 로드 투어
또다시 투어의 날이 밝았다. 그저께 있었던 펭귄 퍼레이드 투어는 느지막이 열 시 넘어서 모였지만 오늘 투어는 일곱 시 반에 모인다. 바로 그레이트 오션 로드를 보기 위한 투어다. 한국인 투어답게 모두가 정확히 일곱 시 반 전에 모여서 정시에 출발했다. 가이드 겸 운전사는 말투가 마치 가이드 일을 십 년쯤 한 것만 같은 닳고 닳은 말투지만 의외로 버스운전사를 오래 하다가 작년 즈음 가이드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과한 tmi(too much information, 과하게 많은 신변잡기 이야기들) 때문에 아침부터 두 배로 피곤하다. 차에 탄 지 얼마 되지 않아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자기 시작했다.
첫 번째 목적지는 그레이트 오션 로드라고 적혀 있는 표지판이 있는 화장실이다. 제때제때 화장실과 밥시간을 챙겨주는 것이 한국인 투어의 장점이다. 표지판 앞에서 차례로 줄을 서서 인증샷을 찍어주고(한국인 투어다운, 효율성이 극대화된 사진 찍기다) 각자 화장실을 다녀온 후, 숲길 사이로 잠깐 나가 바다를 짧게 즐기는 시간을 가졌다. 호주에 온 이래로 가장 날씨가 좋다. 너무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고, 비도 안 오고, 구름이 적절히 껴서 너무 뜨겁지도 않고, 하늘은 파아랗게 개서 해가 바다를 비춘다. 바다가 빛을 받아 투명하게 빛나면서 에메렐드 빛 색깔을 낸다. 이런 색깔의 바다는 프랑스 니스에서나 봤는데.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을 주는 바다다. 저 멀리 수평선 너머에는 남극이 있으려나.
아무튼 정말이지 잠시동안 바다를 즐기고 다시 버스에 올라탔다. 다음 정류장은 야생 코알라 서식지인 케넷 리버(Kennett River)다. 가이드는 야생을 몇 번이나 강조하며, 야생이라는 것은 오늘 코알라를 볼 수도 있고 못 볼 수도 있다는 뜻이란다. 코알라는 하루에 거의 20시간 정도를 자는데, 즐겨 먹는 유칼립투스 등을 비롯한 나뭇잎에 마약 내지는 취하는 성분이 들어있다고 한다. 동물원에서도 관람 공간에 있는 코알라의 2/3 정도가 나뭇가지 사이에서 몸을 둥글게 말고 곤히 자던 것이 생각났다. 대체 이 동물은 어떻게 야생에서 생존할 수 있는 것일까? 의외로 그 답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우리가 이곳에서 찾은 코알라는 단 한 마리. 그 한 마리를 찍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지만 대부분 둥그런 엉덩이 혹은 둥그런 털 덩어리에 해당하는 모습만 찍을 수 있었다. 거의 나무 꼭대기에 가까운 자리에서 잠들어 있어 시야에서 굉장히 멀었기 때문이다. 동물원에서는 그 높이가 시야와 비슷했지만 야생의 코알라는 실제로 엄청나게 높은 곳에서 잠을 잔다. 회색과 검정 색이 섞인 털 색은 아래에서 위를 보았을 때 해의 역광과 겹쳐 보호색이 된다. 잘 움직이지 않으니 움직임이 포착되지도 않는다. 아무튼 야생의 코알라도 몹시 귀엽다. 그저 동그랗고 털이 북슬북슬한 모습일 뿐이지만.
차를 타고 이동하는 것이 다일뿐인데 시간은 참 잘 흘러간다. 점심식사를 할 시간이 다가왔다. 식사를 하기 위해 찾은 곳은 아폴로 베이(Apollo Bay Coastal Trail) 지역이다. 해변에 산책로가 있고 그 뒤로 상점가가 있는 곳이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도시락으로 샌드위치를 싸왔기 때문에 바로 해변가로 향했다. 모래사장에서 바다를 보니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다. 바람도 시원하고 햇볕은 따사롭다. 저쪽을 보니 숲길에서 톡 튀어나온 데크 위에 벤치가 있는 것이 보인다. 점심식사 장소로 딱이다. 해변에서 나와 숲길로 들어가 데크를 찾았다. 숲길 내부는 비포장 도로인데 1.5명이 지나갈만한 폭이다. 작은 나무와 큰 나무들이 엉켜서 촘촘하게 자라고 있다. 보통 거리를 둬야 더 잘 자라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여기서 이런 식으로 자라는 식물들은 사람이 심은 것이 아니라 자생하는 경우가 많다.
데크에서 도시락을 꺼내서 먹는데 세상에서 가장 근사한 레스토랑에 온 기분이다. 파아란 하늘이 끝도 없이 펼쳐지고 그 아래로 그만큼 파아란 바다가 빛이 나고 내 손에 든 샌드위치는 신선하고 맛있는 재료로 채워져 있어 매일을 먹어도 늘 맛있다. 식사를 하는 우리 벤치 옆에 또 다른 벤치가 하나 있었는데, 그쪽 벤치 손님은 자꾸만 바뀌었다. 처음에는 아직 가슴에 보송보송한 털이 나 있는 아기 참새였다. 아기 참새는 짧은 생에도 인간에게 먹을 것을 얻어먹은 적이 많은지 가까이 다가와 고개를 갸웃갸웃하며 샌드위치를 탐냈다. 덩치만큼 뱃구레도 작은 모양인지 빵 구석을 아주 조금 떼어서 줬는데 그것도 가져다가 반을 잘라서 먹고 또 남은 반을 먹었다. 그렇게 대여섯 번을 얻어먹더니 좀 더 큰 조각을 던져주니 물고 날아가 버렸다. 다음 손님은 바로 근방에 사는 노부부였다. 그레이트 오션 로드가 집 앞 산책로라니 정말이지 부러운 삶이다. 서로 어디에서 왔는지 확인하고 나니 그 지역 뉴스를 전할 차례다. 오늘 아침 해변에 물개 한 마리가 죽은 채로 떠올라서 묻어주는 걸 보고 왔단다. 관광객으로서 보는 이곳과 사는 사람들이 보는 이곳은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음 손님은 우리와 같은 차를 타고 온 한국인 관광객이었다. 혼자 여행을 오신 여자분이다. 감사하게도 먼저 사진을 찍어주신다고 하여 이 방향 저 방향으로 모두 부탁했다. 결과물은 최고로 마음에 들었다. 그분께 우리의 벤치를 양보하고 상점가로 나왔다. 커피 한 잔을 시켜 테라스에서 나눠 마시고 다시 버스에 올라탔다. 그레이트 오션 로드의 백미, 12 사도를 보러 갈 차례다.
그레이트 오션 로드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참전 군인들과 잉여 노동력을 활용하기 위해 뉴딜 정책 조로 제안된 대규모 토목공사다. 아름다운 해안가를 따라 구불구불하게 난 도로를 따라 달리는 길인데, 한쪽은 낭떠러지고 반대편은 낙석이 우려될 만큼 가파른 경사지다. 얼마나 험난한 공사였는지 피부로 느껴진다. 환경운동과 자연보호에 대한 인식도 높아졌다. 포경과 물개잡이가 금지되자 어촌 마을에서 어떻게 생계를 이어갈까 고민하던 차에 매일 물고기를 잡으러 다니던 길에 있는 아름다운 경관을 활용하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고 한다. 해변가 침식절벽 옆에 자연이 오랜 시간을 들여 파도로 깎아낸 12개의 바위를 12 사도라 이름 붙였다. 인간이 12개로 정했다 한들 자연은 계속해서 바위를 깎고 또 깎았기 때문에 현재는 12개 중 8개만이 그 자리에 서 있고 나머지 4개는 파도에 휩쓸려 쓰러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모습은 8 사도가 되었지만 이름은 여전히 12 사도인 이곳은 헬리콥터로 돌아보는 것이 가장 유명한 즐길거리지만, 엄마도 나도 높은 곳에서 굳이 내려다보는 것에는 큰 흥미가 없어 버스에서 내려주는 키오스크에서부터 육지길을 따라 한 시간, 바닷길을 따라 30분을 쭉 걷기로 했다. 키오스크에서 나와 왼쪽으로 가면 육지길(Twelve Apostles Lookouts)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바닷길(Gibson Steps Lookout Beach)이다. 육지길은 아까 점심식사를 했던 숲길과 비슷하다. 좁고 구불구불한 비포장도로가 끝도 없이 이어진다. 그늘이 제법 있어 걷기에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다들 바닷길로 갔는지 육지길은 한산하다. 한참을 걷고 났더니 수풀 사이로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웬 주차장을 지나니 가파른 절벽을 따라 폭이 좁은 계단(Gibson Steps)이 설치되어 있다. 계단을 따라 반쯤 내려가니 12 사도의 일부인 바위 사이에 고운 모래로 이뤄진 해수욕장이 보였다. 절벽이 어찌나 높은지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미니어처로 보일 지경이다. 12 사도의 높이가 45m쯤 된다고 하니, 이곳도 비슷할 것이다. 아파트로 보면 15층쯤 된다. 절반쯤 내려가다가 다시 올라올 길이 멀 것 같아 걸음을 돌렸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서 갈림길에서 바닷길로 향했다. 육지길처럼 한참 걸어야 할 줄 알았더니 금세 바다가 나온다. 가이드가 육지길을 먼저 돌고 나서 바닷길로 가라고, 바닷길을 먼저 가면 항상 늦게 나온다고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조금만 걷다 보니 곧 바다와 12 사도가 눈앞에 펼쳐진다. 먼저 이곳을 본 상태에서 긴 길을 따라가려면 아무래도 발걸음이 더 무거울 터였다. 풍경은 아까 육지길보다 훨씬 좋았지만 그래도 두 길 중 걷고 싶은 길을 고르라면 육지길을 고를 것이다. 바닷길은 데크를 따라 사람이 가득 차 있어 사진 한 장 찍기도 힘들었다.
두 길을 끝까지 다녀왔는데도 시간이 조금 남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육지길 끄트머리에서 해변까지 다녀올걸 그랬다. 이미 다시 가긴 늦었고, 매점에서 아이스크림이나 하나씩 사 먹기로 했다. 냉동실에 있는 조그만 컵아이스크림 두 개를 골랐다. 라즈베리 아이스크림에 화이트초콜릿이 콕콕 박혀있는 팀분(Timboon) 아이스크림이었는데, 기대보다 훨씬 맛있었다. 나중에 버스를 타고 지나가다 보니 그 아이스크림 공장이 바로 인근인 팀분 지역에 있었다. 오는 길에 소도 양도 많았으니 낙농업을 하는 농장에서 만들어내거나 바로 원재료를 수급해서 만들어내는 아이스크림이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역시 괜히 맛있는 게 아니었다. 지역 특산품을 바로 근방 관광지에서 팔 수 있어 장사수완이나 아이디어가 꽤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도 지방 여행을 다니면 농협 하나로마트에 꼭 들르는데, 유제품이나 육류가 그 지역 생산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맛볼 수 없는 신선하고 맛있는 제품을 훨씬 저렴한 가격에 먹어볼 수 있는 데다, 지역 농민들에게도 큰 힘이 되지 않을까 싶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주면 더 좋을 텐데.
12 사도가 물론 가장 유명하긴 하지만, 그레이트 오션 로드에는 12 사도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지역은 포트 캠벨 국립공원(Port Campbell National Park)으로, 해안가를 따라 약 30km에 이르는 기다란 띠를 이루고 있다. 우리가 생각하기로는 호주가 자연환경이 참 좋다고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연환경이 보존되는 곳은 이처럼 국립공원을 묶여 있어 개발이 제한되는 곳이고 그 외 지역은 여전히 활발하게 도시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는 멜버른 도시가 있는 동쪽에서 서쪽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는데, 점심을 먹었던 아폴로 베이도 국립공원 영역 내에 들어와 있지는 않지만 바로 서쪽에 또 다른 국립공원인 그레이트 오트웨이 국립공원(Great Otway National Park)을 끼고 있어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인간이 자연을 보존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선의로 개발을 자제한다면 참 좋겠지만, 아무리 아름다운 자연환경이 있어도 규제와 가이드라인이 있어야 유지가 되는 법이다. 그래도 자연보존에 대한 사회적 합의와 높은 시민의식, 그리고 막대한 관광수입이 있으니 이 넓은 지역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하고 관리하는 것이 가능한가 보다.
아무튼 차는 계속 서쪽으로 간다. 이번에 갈 곳은 로카드 고지(Loch Ard Gorge)다. 거센 바람이 불고 깎아지른듯한 절벽이 많아 수많은 배들이 난파되었다고 유명한 해안가다. 항해가 위험하니 결국 항을 닫았는데, 로카드라는 배가 1878년에 가장 마지막으로 이곳에 와서 난파당했다고 한다. 로카드의 유일한 생존자였던 톰과 에바가 며칠간 해안가에 고립되었다. 둘 다 10대 청소년이었는데 (모두의 기대와 달리) 비극적인 상황에서 애정이 싹틀 만도 했건만 신분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혼에 이르지 못했다고 한다. 아무튼 이 해안에는 둘의 이름을 딴 전망대가 있다. 내가 에바였다면 내 이름 내려달라고 했다. 전망대 안내판에는 두 젊은이의 얼굴까지 새겨져 있다.
풍경은 아까 12 사도와 비슷하다. 깎아지른듯한 절벽 밑에 아름다운 해변가가 있다. 다만, 폭풍우로 일부 길이 유실되어 예전에는 해안가까지 내려갈 수 있었는데 지금은 전망대에서만 내려다보아야 한다. 톰과 에바 전망대를 갔다가 나오면 바로 옆에 레이저백(The Razorback) 전망대도 있다. 면도날로 잘라낸 것처럼 바위가 깎아지른 듯이 있어서 붙은 이름이다. 그리고 그 옆에는 아치 모양으로 바위의 일부가 잘려나간 곳을 볼 수 있는 전망대(Island Arch Lookout)도 있다. 거센 바람과 파도가 오랜 시간 동안 끊임없이 침식작용을 일으켜 만들어진 해안선이다. 과연 자연이 빚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풍경이 하나하나가 굉장하지만 역시 사람들이 기억하고 회자되게 하려면 이름과 스토리텔링이 필요한 법이다. 그렇게 그레이트 오션 로드에는 사연 많은 바위들이 가득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들를 곳은 런던브리지(London Bridge)라는 이름이 붙은 바위다. 이름부터 사연이 많아 보이지 않는가? ‘London Bridge is falling down / Falling down, falling down / London Bridge is falling down / My fair lady’라는 가사가 친숙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다리의 일부가 열리고 닫히게 되어 있어 배가 오갈 수 있도록 만든 것이 도개교인데, 다리가 열릴 때 위로 열리고 닫을 때 내리게 되어 있어 ‘falling down’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실제 런던 브리지는 당연히 영국 런던에 있는데, 왜 여기 호주에 그 이름을 붙이게 된 걸까?
런던 브리지 바위는 원래 육지에서 튀어나온 만인데, 바위 아래 두 곳이 침식으로 인해 아치 모양으로 비어 있었다. 1990년의 어느 날 두 아치 중 육지에 가까운 한 아치가 무너졌다. 다행히 무너진 바위 위에 사람이 없어 사상자는 없었지만, 런던에서 온 두 남녀가 반대쪽 아치 쪽에 있어 몇 시간 후에 헬기로 구조되었다고 한다. 아무튼 런던에서 온 사람들이 고립되었고 일부가 ‘falling down’ 했으니 런던 브리지다.
지금은 돌아가신 고모님이 패키지 투어로 우리나라 이곳저곳을 다니시는 걸 참 좋아하셨는데, 그때는 한 번씩 여행 얘기를 해주시는 걸 듣고 왜 굳이 바위를 보러 섬을 다니나 했었다. 지금 보니 그 지역이 워낙 아름다운데 특징지을 만한 것이 바위라 바위에 이름을 붙이고 홍보하는 게 아닌가 싶은 것이다. 지역마다 있는 촛대바위가 대표적이다. 우리나라는 주로 그 형태를 가지고 이름을 붙이지만 이곳은 그 바위에 얽힌 역사와 이야기를 가지고, 혹은 기존의 상징과 권위(12 사도 같은)에 빗대어 이름을 붙인다는 점이 다르다. 아무튼 이름을 불러주어야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