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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마닐 Mar 18. 2024

없는 게 없는 퀸 빅토리아 마켓

그리고 캥거루 고기 시식기


방사형의 웅장한 도서관


건축 전공자가 아닌 사람에게 멜버른에서 꼭 보아야 하는 건축물을 묻는다면, 바로 이곳을 뽑을 것이다. 바로 빅토리아 공립도서관(State Library Victoria)이다. 아무튼 현재진행형 식민지라는 것은 온갖 곳에 영국여왕의 이름이 붙어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멜버른이 있는 주 이름이 빅토리아주이기도 하다). 원래는 서울 2호선처럼 시내를 한 바퀴 도는 35번 트램을 타고 올 계획이었는데, 오늘따라 운이 좋지 않은지 트램이 영 오질 않아서 결국 이래저래 다른 트램을 갈아타면서 갔다. 이상하게 방향도 잘 맞지 않아 찾기 어려운 곳에 있지 않은데도 한참을 빙글빙글 돌다가 겨우 찾았다. 여행지에서 꼭 이런 날이 있다. 그렇지만 도시는 헤매야 제맛이니까. 헤맨 곳만큼 내 영역이 넓어진다. 덕분에 멜버른 시청 근처에 쨍한 색깔의 모자와 가방과 옷을 파는 가게를 하나 발견하고, 다이소도 발견하고, 옷 쇼핑을 즐길만한 거리도 발견했다. 그제 펭귄투어를 같이 간 친구들이랑 저녁을 먹으러 나가기 전에 다시 들러 쇼핑을 하자고 했다.


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찾아간 도서관은 기대대로 꽤나 웅장했다. ‘The Dome’이라고 써진 표지판을 따라가니 대략 3~4층 높이의 뻥 뚫린 둥근 공간 위로 돔이 올려져 있었고, 그 둘레를 따라 아래를 내려다보거나 전시를 관람하도록 되어 있었다. 돔 아래에는 열람실이 있는데 책상이 방사형으로 되어 있어 내려다보면 제법 멋지다. 이 도서관은 1854년에 지어졌는데, 호주에서 가장 오래된 도서관이자 전 세계적으로 대중에게 무료로 문을 연 최초의 도서관 중 하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맨 꼭대기층으로 올라가 한 층 씩 내려가면서 열람실과 전시실을 구경했다. 어느 나라나 도서관 열람실에서 숙면을 취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 사는 모습이 다 거기서 거기다.


아침부터 너무 헤맸는지 벌써부터 배가 고프다. 도서관에서 나오니 오전 11시다. 도서관 앞 벤치에서 싸 온 샌드위치를 꺼내먹었다. 야외에는 커다란 체스판과 어린아이 만한 크기의 말이 있어 누구든 체스를 즐길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유럽에서도 미국에서도 많이 본 형태다. 우리나라 탑골공원에 가면 할아버지들이 그렇게 바둑을 많이 두고, 도림천에만 가도 어르신들이 모여서 장기를 두는데, 이곳은 성별과 나이를 불문하고 함께 즐기는 것이 체스인 것이다. 바로 옆에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유아차에 손녀를 태우고 나와 벤치에서 쉬고 있다. 엄마한테 "여기도 할머니 할아버지가 애를 많이 봐주나 봐" 했더니 "네가 낳기만 하면 내가 다 키워줄 텐데" 하신다. 오, 나의 기억력에서 방금 한 말과 상반되었던 엄마의 옛날 어록이 소환되기 시작했다. 줄줄이 읊었더니 갑자기 침묵의 식사 시간이 되었다. 에이, 낳을 생각이 있을 때 잘해주지 그러셨어요.





자유분방한 멜버른의 자유분방한 공과대학


도서관에서 퀸빅토리아 마켓으로 가는 길에 대학교가 하나 있다. 하나 있다고 표현하기도 애매한 것이, 우리나라처럼 캠퍼스가 구획된 것이 아니라 거리 혹은 블록에 있는 건물 몇 동이 한 대학의 영역이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대학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멀리서 보기에도 이상한 초록색 머리를 얹은 건물이 있어 이곳 근방이 바로 그 유명한 로열 멜버른 공과대학(RMIT University)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호주에도 물론 우리에게 익숙한 건축가가 지은 건축물들이 있지만, 역으로 호주에서 유명한 건축가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들이 실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적도를 중심으로 북쪽의, 특히 유럽과 미국 중심의 디자인 교육을 받기 때문이다. RMIT만 보아도 굉장히 독특하고 멋진 디자인을 한 건축물들이 많은데, 대부분 이곳 졸업생들이 설계한 작품들이라고 한다.


멜버른은 시드니에 견주어도 굉장히 자유분방한 도시다. 우리에게는 소지섭과 임수정이 주연으로 나온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그라피티 거리가 있는 도시로 알려져 있는데, 도시 전체가 그런 뒤죽박죽 하고 모든 것이 섞여 있는 듯한 모습이다. ‘미안하다 사랑한다’를 모른다면 미안하다. 2004년도 드라마라 90년대생 이전 출생자들에게는 익숙하고, 2000년대 이후 출생자들에게는 낯설 것이다. 아무튼 이 대학도 멜버른만큼이나 자유분방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브로콜리처럼 동글동글한 초록색 모자를 쓴 빨간 벽돌 건물에 들어가니 재료도 제각각, 분위기도 제각각이고 눈 씻고 봐도 통일성이 없다. 통일성이 없으니 이상할 법도 하지만 아예 엉망으로 섞여있으니 오히려 어우러져 보인다. 오랜 세월을 거치며 많은 디자이너들이 리모델링에 손을 대 강한 색채를 남기고 간 듯한 모습이다.


건물에서 나와 좀 더 걸으니 동글동글한 유리창이 모여 외피를 만든 듯한 건물이 하나 보였다. RMIT의 건축과 건물인 Building 100이다. 전에 시드니 공대도 건물명 대신 건물번호를 붙여 부르더니 여기도 그런 모양이다. 아직 학기가 시작되지 않았는지 건물 내부는 고요했다. 이곳에서 설계를 배운다면 디자인이 나를 다른 곳으로 데려다줄 수 있을까. 건축학과에서는 방학 동안 해외에서 지내며 설계 수업을 진행하기도 하는데, 이번에는 한국에서 스튜디오를 진행하는지 ‘Seoul Studio’라는 제목의 포스터가 곳곳에 보였다.






드디어 시장


RMIT에서 북쪽으로 조금만 더 올라가면 우리의 목적지인 퀸빅토리아 마켓이 나온다. 멜버른에서 가장 큰 시장이다. 호주답게 오후 네다섯 시면 거의 모든 점포가 문을 닫는데, 수요일에만 야시장이 열린다고 한다. 웃긴 게 야시장이면 밤에 열려야 하는데 여기는 네다섯 시를 넘어가면 저녁으로 여겨서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때 야시장이 열린다는 것이다. 식사나 길거리 음식을 즐기고 싶다면 수요일 저녁에, 식자재 구경을 하고 싶다면 주중 주말 아무 때나 오전부터 낮 사이에 방문하면 된다. 우리가 간 날은 수요일 점심 이후였다.


빅토리안 마켓이 워낙 크니 어류와 육류가 있는 동, 과일을 파는 곳, 치즈와 소시지 등을 파는 곳 등이 나뉘어 있다. 우리가 가장 먼저 들어간 곳은 어류와 육류를 파는 동이었다. 호주에서 꼭 먹어보아야 할 음식으로 굴이 있는데, 해산물 비린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시도해보지 않고 있었다. 먹어보려면 오늘이 마지막 기회라 한번 먹어보기로 했다. 보통 굴은 6개나 12개 단위로 팔지만 여기서는 하나씩도 구매가 가능하다. 굴 하나에 레몬 한 조각 얹어서 3달러에 구매했다. 우리나라 굴은 대부분 양식이고 양식장 위생이 그다지 좋지 않아 탈이 날 것을 각오하고 먹어야 한다. 오죽하면 러시안룰렛에서 딴 ‘러시안 굴렛’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여기 굴은 전부 자연산이라 탈이 나지 않는단다. 먹어보니 역시 비린내가 거의 나지 않고 아주 고소하고 신선하다.


다음으로 넘어간 곳은 치즈와 소시지 등을 파는 곳이다. 커피와 빵, 원두, 올리브 등도 살 수 있다. 여행 와서 우리 엄마가 시나몬롤을 그렇게 좋아하는지 처음 알았다. 베이커리에서 시나몬롤 하나를 사고 카페에서 디카페인 플랫화이트 한 잔을 시켜서 바깥에 있는 벤치에서 나눠먹었다. 한참을 걷다 보니 다리가 아픈데 구경하는 재미에 아픈 줄도 모르고 계속 다녔다.


호주는 인건비가 비싸서 식사나 공산품은 비싸지만 농산물은 정말 저렴하다. 땅이 넓으니 대규모로 농사를 지을 수 있어 그런 것이다. 마트에서 파는 과일도 저렴하고 품질이 좋지만 시장에 나오니 더 저렴하다. 내일모레면 새벽 비행기를 타고 이동해야 하는데 과일이 떨어졌다며 자꾸만 지갑이 열린다. 블랙 사파이어 한 봉지, 아보카도 한 알, 백도 두 알, 황도 두 알을 샀다. 저쪽에 보니 봉지마다 조금씩 상처가 난 사과 몇 알, 오렌지 몇 알씩 들어있는 게 봉지당 1달러밖에 안 한다. 다니면서 간식으로 먹으면 된다고 오렌지와 사과가 섞인 봉지도 샀다. 우리나라였으면 10배의 가격이어도 저렴하다면서 샀을 것이다. 동네 주민들도 동전을 짤짤 모아서 여기 시장에서 장을 본단다. 과일 좋아하는 사람들의 천국이다.


퀸빅토리아마켓 구매내역 : 오이스터 3달러 / 시나몬번 6달러 / 커피 4.5달러 / 복숭아 4.5달러 / 아보카도 1달러 / 블랙사파이어 3.20달러 / 사과+오렌지 1달러 (요새 한국에선 사과 한 알에 14,900원이던데...)


결국 양손 가득 짐이 생겼다. 숙소에 돌아가서 과일들을 냉장고에 넣어두는 등 정리를 마쳤다. 저녁 약속이 여섯 시 반인데 아직 두어 시밖에 되지 않았다. 지친 엄마는 잠시 쉬시라고 숙소에 두고 혼자 카페에 글 쓰러 나왔다. 일요일에 갔던 디그레이브스 에스프레소에 또 갔다. 여행지에서 좋은 곳을 발견하면 몇 번이고 가게 된다. 두 번째 방문인데 점원이 알아보고 내가 주문했던 메뉴까지 기억해 준다. 고마운 마음에 같은 메뉴로 또 시켰다. 멜버른에서는 역시 매직이지. 내 메뉴는 디카페인이지만. 창가자리는 역시나 글이 잘 써진다.





그래도 쇼핑은 해야지


엄마도 나도 쇼핑을 즐기는 편은 아니다. 마트 구경이라면 몰라도. 그렇지만 해 쨍쨍한 나라에 온 이상 멋진 모자 하나쯤은 사고 싶은 마음이다. 게다가 내일 야외온천 투어를 예약해 놨는데 폭염에 해가 쨍쨍할 예정이란다. 마지막 날이라 좀 늦은 감이 있지만 아무튼 아무렴. 아까 지나가면서 보았던 쨍한 패턴이 인상적인 옷가게를 다시 들렀다. 다른 가게들도 여러 곳 들어가 봤는데 여기만큼 알록달록한 패턴은 보지 못했다. 머리 둘레가 큰 편이라 한국에서 프리사이즈로 나오는 모자들을 거의 다 못 쓰는데, 여기는 비교적 다양한 사이즈의 모자들이 나와서 정말 행복하다. 온갖 과일이 커다란 챙에 그려진 화려한 모자를 샀다. 턱끈까지 달려있어 바람이 불어도 끄떡없다. 엄마도 고민고민하며 온갖 모자를 써보다가 하나를 골랐다.


환전해 온 현금이 부족할 줄 알았는데 점심은 거의 샌드위치로 해결했더니 추가로 환전을 하지 않았는데도 현금이 꽤 남았다. 남은 현금을 쓰고 가려고 계산을 하는데 점원이 동전이 없어서 카드결제를 해달란다. 모자 두 개에 89.7달러가 나왔는데 90달러를 냈더니 0.3달러를 거슬러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0.3달러는 팁으로 줄 테니 그냥 현금으로 계산해 달라고 했다. 팁이 작아서 미안하다고 웃으니 점원도 따라 웃는다.


모자를 사고 다이소도 들렀다. 여기는 다이소 재팬이다. 1000원 2000원짜리 물건이 있으려나 기대하고 들어갔는데 여기는 공산품 기준 3.5달러가 체감상 천 원쯤 하는 것 같다. 긴 비행을 앞두고 엄마를 위한 3.5달러짜리 목베개와 내일 있을 온천 투어를 위한 슬리퍼 하나를 8달러 주고 샀다. 그래도 마트나 신발가게보다는 저렴한 가격이다. 숙소로 돌아와 쇼핑한 짐을 놓고 나니 저녁시간이다.





캥거루 고기를 먹어봤나요?


북반구와 식생이 다르니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동물들이 많다. 소나 양은 흔하지만 캥거루, 왈라비, 알파카 등이 그렇다. 마트에서 양고기는 한번 사 먹어봤지만 역시 호주 하면 캥거루 고기를 먹어봐야 하지 않을까. 캥거루 고기는 소고기와 비교했을 때 지방 함량이 낮고 철분이 많아서 보양식으로 꼽힌다. 다만 잘못 조리하면 냄새가 나기 쉬워서 손질하는 데 공을 들여야 한단다. 열악한 환경의 게스트하우스 주방에서는 해 먹을 수 없으니 레스토랑에서 맛을 보기로 했다.


멜버른은 날씨가 하루 안에도 사계절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자주 바뀐다지만 그래도 햇빛만 피하면 시원하고 추울 때에도 영하로 내려가는 일이 많지 않다. 때문에 식당마다 야외테이블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사람들도 실내보다 야외 테이블에 더 많이 앉아 있다. 약속 장소에 시간 맞춰 오니 이미 언니네 일행은 도착해 있었다. 카페 골목만 그런 줄 알았는데 이곳 골목 하드웨어 레인(Hardware Ln)도 차들이 지나가지 못하게 막고 도로까지 테이블들을 내놓았다. 조명도 반짝반짝하게 달려있어 거의 주말 저녁 느낌이 난다.


네 명이 모인 만큼 다양하게 주문할 수 있어 좋았다. 립아이 스테이크, 캥거루 스테이크, 바라문디(Barramundi)라는 생선요리, 시저샐러드 하나를 주문하고 각자 술과 음료를 골랐다. 무알콜 칵테일을 찾으니 여기는 먹테일(Mocktail)이라고 부른단다. 과일을 잔뜩 갈아 넣고 건조과일을 올린 게 나왔는데 달달하니 맛있었다. 캥거루 스테이크는 이미 조각조각 다 자른 상태로 나와서 덜어먹기 편했는데, 생각보다 잡내가 없고 고소했다. 다 먹고 나서는 가지 요리도 하나 추가했다. 여기 가지는 우리나라보다 뚱뚱하고 동그래서 한번 먹어보고 싶었는데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요리는 맛있었고 가지 맛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넷 다 엄청 배부르게 먹고 산책을 하러 야라강변으로 나왔다. 언니와 언니 친구는 내가 엄마를 모시고 온다고 하니 여행지에서 할만한 것을 여러 번 제안해 줘서 정말 고마웠다. 말해준 걸 대부분 시도해보진 못했지만. 엄마 모시고 간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냥 60대 친구랑 같이 간다고 생각해 달라고 했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 덕분에 꽤 즐겁고 자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야라강은 한강보다 폭이며 규모가 작은데, 그래서 그런지 훨씬 접근이 편하다. 도로는 강변에서 한 발짝 물러서 있고 그 틈으로 레스토랑과 카페, 공원이 자리해 있다. 얼마간 산책을 즐기다가 헤어져서 숙소로 돌아왔다. 내일이면 호주에서 즐기는 마지막 날이다. 긴 여행도 끝날 때에는 늘 아쉬움이 남는다. 돌아가면 더 아쉽고 그립다. 언제 또 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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