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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마닐 Mar 24. 2024

멜버른에도 야외온천과 사우나가 있다니?

여행을 완벽하게 마무리하는 방법


또 투어, 아무튼 투어


멜버른에서의 마지막 날이다. 내일 새벽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돌아가기 때문에, 게스트하우스에서는 체크아웃을 하고 공항 근처 호텔에서 묵기로 했다. 숙소를 옮기기 전에 애매하게 반나절 정도 시간이 비었다. 엄마가 도시에서 더 볼 게 없으면 투어라도 하나 더 가자고 하신다. 피츠로이 지역에 갔을 때 내가 수영하는 동안 엄마는 동네 공원에 앉아있으려고 했는데, 자꾸 홈리스들이 와서 서성거리는 바람에 도망 다녔던 모양이다. 새로운 동네 탐방보다는 투어를 선호하실 만도 하다.


멜버른 근교에서 즐길 수 있는 투어를 찾다 보니 ‘페닌술라 핫 스프링스’라는 곳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멜버른에서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있는 반도에 야외 온천이 있다는 것이다. 지열로 물을 데우는 방식이라 진짜 온천이라고 보면 된다. 기본 복장은 수영복이고,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같이 탕을 쓴다. 여행의 마지막에 피로를 풀기에는 제격이다. 해지는 모습이 예뻐서 야간 투어도 있는 것 같았지만, 우리는 반나절동안 다녀오는 투어로 예약했다. 시내에서 모여서 한 시간 반 동안 미니버스를 타고 이동한 후, 3시간 동안 온천을 즐기고 다시 같은 길을 돌아오는 일정이다.



오전 8시에 집합이라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 전날 퀸 빅토리아 마켓에서 사 온 과일들을 챙기고, 우리의 마지막 도시락도 쌌다. 샌드위치에 햄과 치즈, 아보카도, 과일을 양껏 넣었다. 로비에서 체크아웃을 마친 뒤 큰 짐은 맡겨두고 온천에 가져갈 짐만 챙겼다. 짐을 체크인 시간보다 일찍 맡기고 체크아웃 시간보다 늦게 찾아갈 수 있다는 점이 게스트하우스의 큰 매력 중 하나다. 거의 모든 해외여행마다 여행사를 끼고 가서 호텔에서만 묵었던 엄마에게는 신기한 문화다.


한국 사이트인 마이리얼트립을 통해 예약했지만 투어 자체는 영어로 진행되는 걸 신청했다. 지난번 투어 때 기사가 늦었어서 별 기대 없이 갔는데, 이번에는 웬일로 제때 버스가 도착해 있었다. 투어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대부분 정시에 왔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기사가 온천에 대한 설명을 해줬다. 알려준 대로 온천 지도를 찾아보니 생각보다 꽤 넓은 면적이다. 온천은 들어가서 오른쪽 길, 왼쪽 길로 나뉜다. 오른쪽 길 끝에는 ‘힐탑(hill top)’이라는, 그야말로 언덕 꼭대기 노천탕이 나온다. 여기가 온천에서 가장 전망이 좋아 인기가 있어서, 들어가자마자 힐탑 먼저 찾아가라는 팁도 얻었다. 왼쪽 길 끝에는 food bowl이라는 야외 공연장이 있단다. 밤에 찾아오면 실제로 공연도 한다고 한다. 도시락을 그쪽에서 먹어볼까, 머릿속으로 계획을 짜봤다.


얼마간의 설명이 끝나고 또 침묵의 운전 시간이다. 피곤한데 뒤를 돌아보니 대부분의 승객들이 졸고 있다. 아침 일찍 나왔으니 그럴 만도 하다. 나도 엄마도 잠들었다가 눈을 떠보니 온천에 도착해 있었다. 수건과 로브, 사물함은 별도 비용이다. 우리는 이 중 로브와 사물함만 빌렸다. 물 묻은 채로 다니다가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이니까. 사물함은 하나만 빌렸는데 꽤 커서 짐을 두기에는 나쁘지 않았다. 샤워실에서 샤워를 마치고 수영복으로 갈아입은 후, 물통과 선글라스, 모자를 챙겨서 밖으로 나왔다.




뜨끈한 탕에 담그니 천국이 따로 없지요


자연을 활용한 관광지를 만드는 데에는 도가 튼 나라다. 완만한 산등성이의 지형을 그대로 살리고, 사람이 지나다니는 길과 노천탕을 제외한 공간은 자연적인 형태의 조경으로 가꿔놓았다. 각 노천탕의 크기가 크지는 않아서 보통은 열댓 명 정도 들어가면 꽉 찰 사이즈다. 그런 노천탕이 개수가 꽤 많아서 한 탕에 다섯 명 넘게 들어가 있는 걸 보지 못했다. 평일이라 한산한 것일 테다.


사람을 위한 탕도 있지만, 동물과 새를 위한 탕도 따로 있다. 사람은 출입 금지다. 생각해 보니 당연한 조치다. 원래 산은 동물과 새를 위한 공간이다. 인간이 그들에게서 자리를 빼앗았으니, 탕을 공유하는 대신에 그들만을 위한 수공간을 따로 만들어주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오리 몇 마리가 헤엄쳐 다닌다. 인간 탕에는 락스와 지열로 데운 물을 내보내는 설비가 있지만 오리 탕에는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 생태공원에서나 볼법한 표지판도 있다. 이곳에 사는 생물종을 안내하고 있다.




한참을 꼬불꼬불 걸어서 올라가 드디어 우리가 찾던 ‘힐탑’을 발견했다. 가장 꼭대기에 있는 가장 작은 탕이다. 둘레가 판판한 돌로 마무리되어 있고, 깊이는 배꼽이 간신히 잠길 정도다. 물도 아주 뜨겁지는 않고 적당히 따뜻한 정도다. 그런데 사방이 탁 트여 시원하다. 탕 주변에는 갈대가 둘러싸고 있고, 그 뒤로는 지형이 점점 낮아지며 나무의 정수리가 보이고, 그 너머로 마을의 지붕이 보인다. 날이 아주 더울 거라고 해서 모자까지 야무지게 쓰고 올라왔는데 기대보다 덜 덥고 곧 비라도 올 것처럼 흐리다. 그래도 야외활동하는 데에는 더운 것보다는 낫다.




한참을 힐탑에 앉아있다가 한 칸씩 내려오기로 했다. 두 번째 탕에서 몸을 담그고 나왔을 때, 도시락의 일부로 챙겨 온 포도를 꺼냈다. 따뜻한 물에 지지고 나와서 목욕가운을 입고 앉아 아주 달콤한 블랙사파이어를 한 알씩 먹으니 그리스로마신화에 나오는 신이라도 된 것 같다. 세 번째 탕은 지나치려고 했는데, 다른 탕의 물 온도가 36~38도라고 적힌 데 비해 여기는 39~42도라고 적혀있었다. 한국인은 열탕을 지나치지 못하는 법이다. 결국 국밥을 들이켜는 “크으으”소리를 내며 탕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다가 나왔다. 그러고 보니 국밥도 탕이라고 한다. 마시는 것이든 담기는 것이든 행복하기는 매한가지다.




다음에 발견한 곳은 바로 사우나다. 호주인들은 목욕탕 즐기는 법을 제대로 아는 게 분명하다. 한쪽에는 건식, 한쪽에는 습식 사우나가 있고 그 사이에 샤워시설과 냉탕이 있다. 건식 사우나는 우리가 흔히 아는 것처럼 나무로 만든 벤치가 스탠드처럼 단단 올라가게 되어 있고, 앞에서 열기가 뿜어져 나오는 장치가 있었다. 여기서는 습식 사우나를 터키식 사우나라고 하나보다. 내부는 화려한 타일로 마감되어 있었다. 가운데 있는 편평한 곳에는 아무도 앉지 않고, 다들 테두리 쪽으로 앉아있었다. 테두리에는 두어 명이 앉을 수 있는 거리를 두고 수도꼭지와 작은 세면대가 하나씩 달려 있었다. 물론 작은 바가지도 하나씩 둥둥 떠있다. 습한 공기가 호흡을 방해할 때쯤 한 번씩 정수리와 어깨에 물을 뿌렸다. 엄마 한 번, 나 한 번.


뜨겁게 지지고 나오니 마치 준비된 것처럼 냉탕이 내 앞에 있었다. 냉탕은 꼭 우물같이 생겼는데 깊이도 우물처럼 깊어서 발이 닿지 않을 정도였다. 발끝부터 얼음물이 닿는데 쾌감이 든다. 심장이 튼튼한 사람만 누릴 수 있는 냉탕. 한국에 있는 목욕탕에 가면 꼭 사우나에서 나오자마자 냉탕에 망설임 없이 한 번에 입수하시는 아주머니들이 있는데, 그 용기와 결단력, 망설이지 않는 모습에 크게 감명받고는 했다. 물론 나는 여기서도 3분도 다 못 채우고 뛰쳐나와서 샤워기에서 온수를 찾았다. 프로 목욕러가 되기에는 아직 내공이 부족하다.




호주인들에게는 한국인의 DNA가 일부 있는 것이 분명하다. 대륙이 모두 연결되어 있던 시절에 나눠가졌을까? 그게 아니고서야 한국 공원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지압길을 여기에서 찾은 이유를 설명할 방법이 없다. 아니면 전 세계적으로 지압길이 유행했던 시기가 있었을 수도 있다. 너무 대중적인 것은 디자인 사조로 남지 않는 법일까? 지압길 시대, 하트조형물 시대, 인스타 프레임 시대 등등이 펼쳐졌을지도 모르는 일인데 말이다. 아무튼 이곳의 지압길은 발목까지 오는 야트막한, 천천히 흐르는 물에 잠겨있다. 길의 시작은 굵은 자갈인데 갈수록 뾰족하고 작은 돌멩이로 바뀐다. 한국인도 호주인도 으아 으아 소리를 내며 건넌다.




내려오다 보니 출발 지점까지 왔다. 한참을 걷고 따뜻한 물에 담그고 있었더니 배가 고파온다. 항아리 모양의 바나나 우유는 없으니, 대신 도시락이라도 들고 가기로 했다. 라커룸에서 도시락이 든 가방을 꺼내고 모자는 벗어서 넣어두었다. 오늘 내로 해가 쨍쨍하게 뜰 일은 없을 것 같다. 변덕스러운 멜버른 날씨 같으니라고. 아까 왔던 길과 반대 방향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중간에 얼음동굴과 사우나가 있는 곳을 발견했다. 내려오면서 시간이 나면 들러보기로 했다. 시간이 꽤 지나있었다. 3시간이 결코 넉넉하지 않다.


푸드볼에는 힐탑보다는 금세 도착했다. 반원형의 둥근 아레나 밑으로 마찬가지로 둥근 무대가 있고, 무대 뒤편으로는 초원에서 말들이 풀을 뜯고 있다. 야외용 빈백에 눕듯이 앉아 샌드위치를 열었다. 당연히 꿀맛이다. 시간이 별로 없으니 서둘러 먹었다. 먹으며 둘러보니 주변엔 유리로 된 건물이 몇 동 있는데, 그 안에 밖에 있는 것과 같은 의자들이 놓여 있다. 겨울에는 실내에서 따뜻하게 공연을 보거나 식사를 즐길 수 있는 모양이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며 보니 푸드볼이 괜히 푸드볼이 아니라, 단마다 있던 조경공간이 사실은 사과, 포도, 허브, 꽃 등과 계절채소를 키우는 텃밭이었던 것이다. 늦여름의 계절채소로는 브로콜리와 파슬리, 당근 등이 자라고 있었다.



내려오는 길에 만난 몇 동의 텐트에는 마찬가지로 밖을 바라볼 수 있는 널찍한 창과 편안한 소파베드들이 놓여있었다. 시간이 여유로웠다면 여기서 낮잠이라도 잤을 것이다. 이제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샤워를 하려면 최소한 삼십 분은 남겨놓아야 한다. 내려오는 길에 만난 사우나와 얼음동굴에 잠깐 들렀다. 사우나에 낯익은 호주남자가 있어 기억을 더듬어보니 우리 관광버스 기사다. “아니 누군가 했더니 우리 기사였군요” 했더니 “아무래도 한 시에 출발 못하겠는데…” 한다. 킬킬거리며 인사를 하고 나왔다. 라커룸으로 돌아와 샤워하는데 온몸의 피부가 보들보들하다. 천연목욕탕이라더니 정말 효험이 좋은가보다. 천연미네랄 온천수의 효험에 대해 써놓은 판자가 하나 있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한국인이라서 그런 거겠지.


샤워를 마치고 짐을 챙겨서 나오니 기사가 잘 씻고 나와 발그레해진 얼굴로 손님들을 맞이한다. 인원수 파악이 끝나더니 “나 대신 운전해 줄 사람?” 한다. 오, 정말 탐나는 직업이다. 아무리 부럽다고 해도 당연히 아무도 대신 운전해 준다고 나서지 않았다. 한바탕 웃음소리가 지나가고 차에 시동이 걸렸다. 도시로 돌아갈 시간이다.




멜버른 공항으로


목욕을 하고 오니 국물이 당긴다. 엄마와 함께 숙소 근처에서 쌀국수와 도넛을 포장해 왔다. 마트에도 잠깐 들러 호주에서 유명하다는 래밍턴 케이크를 사봤다. 래밍턴 케이크는 간식으로 싸두고, 게스트하우스 공용거실에서 국수와 도넛을 먹고 짐을 챙겼다. 멜버른 공항 근처의 호텔로 갈 시간이다. 무료트램을 타고 역으로 가서 스카이버스를 타고 공항에 갔다. 공항까지는 삼십 분 정도 걸리고, 공항에서 호텔까지는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호텔에 도착해서 수영복을 말리려고 했는데, 두어 시간 둬 보니 아무래도 하루 안에 마르지는 않을 것 같았다. 건조기에 4달러어치 동전을 넣고 돌리니 뽀송하게 말랐다. 호텔에서 샤워를 한번 더 하고 나와 뽀송해진 상태로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내일은 긴 하루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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