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으로 떠난 마닐씨 #41
전 날의 강행군으로 지쳤는지 일어나서도 한참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큰맘 먹고 침대를 탈출한 시간은 오전 여덟 시였다. 최대한 무리하지 않고 하루를 보낼 생각이다. 씻기 전에 아침부터 차려 먹었다. 면에 소스를 버무려 간단히 토마토 파스타를 만들고 남은 빵을 데워 함께 먹었다. 자기 전에 핸드폰을 충전하는 것을 깜박했더니 샤워를 하고 나와서도 배터리는 반 밖에 차 있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폰을 충전기에 꽂아두고 거실로 나와 영수증을 정리했다. 집주인이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더니 블루베리 팬케익을 만들었다며 한 조각 나누어 주었다. 담백한 반죽 사이로 블루베리 한 알이 과즙을 팡 터뜨린다.
가방 안에 빵과 사과, 물을 챙겨넣고 느즈막한 시간에 집을 나섰다. 언덕 위에 있는 거대한 성당인 사그랏 코르에 갈 참이다.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버스로 갈아타려고 내리자, 길게 줄을 선 인파가 보인다. 줄 서 있는 아저씨에게 물어보니 일반 시내버스로는 못 올라가고 앞에서 따로 표를 끊어야 한다고 영어 반 스페인어 반으로 알려준다. 매표소를 찾으러 앞으로 가다가 질려서 되돌아 다시 지하철을 탔다. 다음 날부터 연휴 시작이라고 하더니, 벌써부터 어딜 가나 사람이 많다. 많다고 생각했던 어제보다도 더 많은 것 같다.
어디로 갈지 고민하다가 월요일에 휴관이라 못 들어갔던 미로 미술관에 가기로 했다. 버스에서 내려 미술관 앞을 보자 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밖에까지 표를 사려는 사람들이 줄 서 있다. 보지 않아도 안에도 사람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 분명했다. 이미 오전에 허탕을 치고 온 것이라 포기하고 줄 서서 표를 끊었다.
미로의 전시는 생각보다 아쉬웠다. 사람이 적었으면 조금 더 만족스러웠을지도 모른다. 캔버스에 그려진 것이 적을수록 그림 옆에 붙은 설명은 길어졌다. 이쯤 되면 그림을 위한 글인지 글을 위한 그림인지 알 수 없을 정도다. 사람들은 그림보다 글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며 전시를 관람하고 있다. 설렁설렁 전시를 지나쳐 옥상으로 올라갔다. 잠시 숨이 트인다.
역설적이게도 미로 미술관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미로의 전시가 아니었다. 특별전으로 ‘리나 보 바르디(Lina Bo Bardi)’라는 건축가의 전시가 진행되고 있었다. 처음에는 특이한 전시 형태에 눈길이 갔는데, 점점 스케치에 빠져들어 나중에는 그림마다 세세히 살피기에 이르렀다. 이 건축가는 1956년도에 바르셀로나에 방문하여 가우디의 작품을 보고 영향을 받아 상 파울로의 미술관 중 한 동을 설계하며 식물 장식으로 뒤덮는다. 어렸을 적부터 식물의 그림을 곧잘 그렸다는 건축가의 스케치에는 온갖 식물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
식물에 이은 전시의 두 번째 키워드는 바로 사람이다. 건축가의 전시인데도 이 전시에는 그 흔한 건축 모형 대신 스케치로 가득하다. 건물보다는 인간을 믿은 건축가는 그림마다 서로 다른 사람을 그려 넣었다. 실제 모델이 있을 법한, 표정과 특징이 살아 있는 사람들이다. 주택 프로젝트에 그려진 사람들은 건축주로 보인다. 원피스를 입은 귀여운 아이의 뒷모습과 파마머리를 한 여자, 꽃무늬 셔츠를 입은 남자, 견종을 추측해 볼 수 있는 강아지들이 스케치마다 가득하다. 정원에는 식물의 종류까지 그려져 있다. 건축가는 이런 말을 남겼다. ‘사람이 건물에 들어가 계단을 오르고 공간을 즐기며 시간을 보내기 전까지는 건축은 존재하지 않는다.’
리나 보 바르디는 건축물 설계와 전시공간 계획과 시각디자인 작업을 겸했다. 잡지 ‘해비타트(Habitat)’의 창간호의 목업 디자인이 전시되어 있다. 건축가의 작업을 소개한 영상에는 기다란 봉마다 작품을 걸어놓거나, 유리판 사이에 작품을 끼우고 아래서 콘크리트로 고정하는 등 당시에 파격적이었을 현대적인 큐레이팅을 볼 수 있다. 영상을 보고 나서야 이 건축가의 스케치를 전시한 방식을 이해할 수 있었다.
미술관 카페에서 커피라도 한 잔 하려고 했지만 자리도 없고 주문 줄도 길어 포기하고 다음 행선지로 바로 떠났다. 개선문과 시우타데야 공원이다. 하루종일 흐리더니 해가 조금 비치기 시작했다. 개선문 뒤로 야쟈수들이 줄 맞춰 일정한 간격을 두고 그림자를 늘어뜨리고 있다. 개선문에서 공원까지 가는 길은 버스킹을 하는 사람, 풍선을 팔고 비누방울을 만드는 사람들이 줄지어 있다. 공원은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가족들로 가득하다. 사람들 사이에 섞여 천천히 산책을 하다가 다시 버스를 타고 숙소가 있는 동네로 돌아왔다.
저녁은 KFC에 가기로 했다. 5유로짜리 세트에 버거, 순살 두 조각, 감자튀김, 음료, 아이스크림이 포함되어 있다. 오랜만에 먹은 프랜차이즈 햄버거는 꿀맛이었다. 순식간에 다 먹고 슈퍼에서 생수와 사과, 오렌지를 사들고 귀가했다.
아직 해가 떠 있는 이른 시간이다. 커피 한 잔을 타서 자리에 앉아 여행기를 정리했다. 매일매일 쓰고 있지만 몇 주 전 밀렸던 열흘을 채우기가 버겁다. 당장 그 날의 여행기를 쓰는 것도 간신히 해치우고 있다. 한참을 쓰고 있으니 집주인이 돌아왔다. 오늘은 어땠냐고 물어보더니, 이번 주 주말은 부활절 행사로 스페인의 모든 도시가 정신없을 것이라고 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날씨마저 좋지 않다. 주말 사이 내가 있을 안달루시아 동쪽 지방에 폭우주의보가 내려져 있다. 부활절 퍼레이드는 취소될 확률이 높다.
스페인 속담 중에 4월은 비가 많이 내린다는 의미의 속담이 있다고 한다. 아무래도 시기를 잘못 정해 스페인 여행을 온 것 같다. 시계방향이 아니라 반시계 방향으로 돌았으면, 조금 더 편히 여행했을까. 알함브라 궁전도 이미 5월까지 모든 예약이 차 있어 들어가지 못할 예정이다. 그저 짐 가볍게 해서 우산 하나 들고 동네 산책이나 즐겨야겠다. 널찍한 카페에서 구석 자리 차지하고 앉아 밀린 글을 쓰거나.
*오늘의 가계부
미로 미술관 : 입장료 13.00유로
KFC : 5.00유로
사과, 오렌지, 생수 1.44유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