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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은희 Aug 04. 2015

양림동에서 만난 꿈꾸는 기억

2015년 여름 지나온 시간 속에 잊혀진 사람들과 이야기들, 남겨진 것들

오늘처럼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던 그 날 작은 아이의 손을 잡고 무심히 일행을 따라 걸으며 목사님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절반은 흘려 들으며 하루 일정이 어떻게 될까? 몇 시에 끝날까? 집에 가면 무얼  할지까지 머릿속으로 분주히 계산을 했던  듯 하다. 지금의 내가 다시 그  자리에 간다면 아마도 한자라도 놓칠세라 정말 열심히 들을 것 같다. 


꼭 2년 전의 내 모습이다. 


광주에 먼저 내려온 남편과의 몇 개월의 실랑이 끝에 짧은 이산가족 생활을 마치고 광주에 내려와 처음으로 새로운 교회에 간 날,  모든 것이 낯설고 이상하게 느껴지고 말도 다른 거 같고, 좀 과할지 모르겠지만 낯선 이국 땅에 홀로 던져진 기분이었다. 그날 위임예배를 드리고 계단을 내려오시는 목사님 부부의 모습이 아직도 사진처럼 머리 속에 남아 있다. 매주 목사님은 양림동과 광주의 역사를, 선교사분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내가 광주 사람이 아니어서 늘 봐왔던 것들이 아니기에 그 이야기들이 더 새롭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멀고 먼 아주 오래 전의 먼 나라 이야기를 듣는 기분으로 이야기를 들었던 나에게 이야기들이 조금씩 다가왔다. 그 이야기들은 먼 나라 이야기도 아니었고 아주  옛날 이야기도 아니었다. 그 이야기들은 점점 커져서 지금 내 앞에 여러 가지 모습으로 서서 있다. 우리가 지나온 세월 만큼 우리는 우리 자신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길가에 구르는 돌멩이조차도 말이다. 

돌멩이가 말할 수 있다면 말이야. 돌멩이의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할 수 있겠지. 돌멩이는 말을 할 수 없지만 돌멩이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었는지, 왜 그 자리에 있었는 지를 보고 있었던 누군가는 돌멩이 대신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 거야. 난 그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다시 너와 나누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거야.

돌멩이는 호남신학대학의 언덕에 묻혀 있는 선교사분들이고, 양림동의 교회와 학교, 기독병원이고, 전주의 예수병원이고 신흥학교이고, 군산의 구암교회이며, 순천의 매산 학교와 기독진료소, 목포의 정명학교, 양동교회, 그리고 애양원이다. 

양림동에서 처음 나에게 말을 걸었던 돌멩이는 선교사 묘원에 묻혀 있는 선교사 분들과 그  아이들이다. 선교사 분들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병원과 학교가 생격난 이야기를 들었고, 광주의 이야기를 순천과 목포, 군산과 전주의 이야기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시작이 궁금해졌다. 바로 돌멩이가 원래 어디에 있었는지, 어떻게 여기로 왔는지, 오는 동안 무엇을 보고 들었는지 말이다. 무엇보다 왜?라는 질문이 머리 속에 가득했다. 내 눈에 보이는 건 지나간 자리와 남아있는 흔적이었으니까.


그러기에 더욱 궁금해졌다. 왜 잊혀져 가고 있는지 말이다. 


책을 찾고 순천의 기독교 박물관도 다녀오고, 다시 양림동을 찾았다. 

이제 양림동이 달라 보였다. 양림동의 건물 하나하나가 이야기를 담고 있었고 나에게 채근을 한다.

어서 찾아 보라고..재가 되어 사라지기 전에 .. 라고.

잊혀져서 사라지기 전에 자신들이 꾸었던 꿈을 찾아 달라고 말이다. 내가 찾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내가 무엇을 찾고 있는 건지, 어떤 것부터 찾아야 하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든 것이 확실하지 않지만 확실한 한가지는 시작은 지금 여기라는 것이다.


 2015년인 지금....우리에게 1876년이라고 하면 아주 오래된 옛날 같지만 불과 140여 년 전이다. 우리나라는 그 140여 년 사이에 여러 정변과 일제의 식민지 시대, 독립과 전쟁 등 많은 커다란 사건들로 혼란스러운 때였다. 이런 혼란의 때에 우리를 찾아온 사람들이 있었다. 1884년 알렌 선교사를 시작으로 1885년 우리가 잘아는 언더우드 선교사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왔다. 이들은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을 하게 되는데, 그래서 후일에 우리가 잘아는 연세대학교, 이화여자 대학교 , 그리고 병원과 새문안교회, 정동교회가 세워지고 예전의 제중원이란 사극에 헤론이라는 외국인 의사가 등장하게 되는 거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1891년 처음으로 안식년을 맞아 미국에 돌아가 미국의 각 지역을 순회하면서 조선에서의 상황을 알리고 지원을 요청하게 된다. 이때 테네시주 내쉬빌에서 있었던 전국 신학생 선교회 연합 모임에서 언더우드 선교사와 윤치호의 연설을 듣고 맥코믹의 테이트(Lewis B. Tate), 유니온의 레이놀즈(William D. reynolds), 전킨(William M. Junkin) , 그리고 존슨(Cameron Johnson)은 조선으로 가기를 결심하고 선교사 파송을 희망하는 지원서를 내게 된다. 


하지만  조선이라는 미지의 나라에서  새롭게 시작할 만한 인력도 비용도 부족했던 남장로교 집행위원회는 거절을 한다. 애너벨 메이저 니스벳(Anabel Major Nisbet) 선교사의 "한국에서의 나날들"에는 전킨과 레이놀즈 선교사는 집행위원회의 거절 이후 자신들이 조선에 가도록 부름받았다는 깊은 감동만으로 매일 만나 하나님께서 은자의 나라에 갈 수 있는 문을 열어주시기를 갈구하며 정성을 다해 기도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두 달 후 두 젊은이는 "8월에 항해할 준비를 하시오"라는 전보를 받게 된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순회 연설과 여러 선교사들의 교회 회보의 기고로  조성된 여론, 그리고 언더우드 선교사의 형으로 뉴욕에 거주하던 존 언더우드 (당시 언더우드 타자기 회사의 사장이었다)가 기부한 2000불과 언더우드 선교사의 사비 500불의 기부로 모자라는 비용이 채워지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조선에 가기를 바라고 기도하던 선교사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여기의 모든 것이 시작되게 되는 것이다.


그 후 1892년 10월 18일 리니 데이비스(Linnie Davis) 선교사가 제물포에 첫 발을 내딛는다.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그냥 이루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마태복음 18:19"


                                                                                                                              

                                                                           다음 편에서  계속...

                                                                                                위 사진 : 양림동 오웬기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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