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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은희 Aug 11. 2015

7인의 사무라이? NO!!
7인의 선발대? YES!!

"7인의~"라는 단어로 시작하면 일단 사무라이가 먼저 떠오른다. 특별히 <7인의 사무라이>라는  영화를 좋아하지도, 심지어 보지도 않았지만.. 나의 무의식은 그 영화의 제목을 기억한다. 선교사들의 자료를 조사하기 시작하던 즈음이었던 것 같다. 우리나라에 온 수많은 선교사들 중 유독 7인의 개척자, 선발대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는 이유가 궁금했다. 우리나라에 온 선교사들의 수도 궁금해져서 찾아보았지만 나의 짧은 식견으로는 그 수가 파악이 불가능했다. 1900년대 초만 해도 거의 500명이고, 이 숫자도 개신교만의 숫자이기에 금방 포기했다.

수많은 선교사들이 왔고, 돌아가기도 했고, 한국 땅에서 생명을 다하여 이 땅에 묻혔다.


1892년 <The Missionary>지의 8월호에 전킨과 레이놀즈 선교사가 "우리는 왜 한국에 가고 싶은가"라는 제목으로 글을 기고한 이후 남장로교는 7명의 선교사를 "조용한 아침의 나라", "은자의 나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결정의 이유는 "젊은이들의 요구에 응한다"였다.

미국 남장로교의 한국 선교의 시작이었고, 7명의 선교사는 호남지역 선교의 시작점이며 개척자가 되었다.

7명의 선교사들이 곧 조선으로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워싱톤의 조선공사관의 대리공사였던 이채연의 부인이 면담을 요청했다. 건강이 좋지 않았던 이채연의 부인은 선교사들 중 한 사람과 동행하여 조선으로 돌아가기 기를 원했고, 리니 데이비스 선교사와 동행하게 되었다. 1892년 9월 7일 세인트루이스 Central Church에서 환송 예배를 드린 후 다음날 목요일 저녁 덴버로 향했다. 10월 8일 요코하마에서 보낸 그리어 목사 M.B.Grier의 편지에는 리니 데이비스 선교사와 이채연의 부인이 10월 7일 요코하마를 출발하여 코베를 거쳐 10월 17일 제물포에 도착했다.


세인트루이스에서 9월에 출발했는데 한국엔 10월에 도착? 그렇다.. 이유가 있다. 잠깐 설명하자면 이 때만 해도 우리가 서부 영화에서나 보았던 배를 타고 말을 타고, 산 넘고 물 건너라는 말 그대로 일 때이다. 한 달을 배를 타고 항해해야 우리나라에 올 수 있었다1900년대 초의 사진을 보면 우리가 사극이나 드라마에서 보았던 것보다 상황은 훨씬 열악하고 열악하다. 수도도 없고 전기도 없고 조랑말과 가마를 타던 시대이며, 그 시절엔 여자들은 이름도 없었고 조혼이 성행하여 12살에 시집을 가서 시어머니에게 가풍을 배운다는 이름으로 종처럼 부려지다가 죽어도 갖다 버릴 뿐이었던 시대이다. 여자들에겐 정말 암흑의 시대였다.


이런 시기에 7명의 선발대 중의 한 명인 리니 데이비스 선교사가 먼저 제물포에 도착하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논문이나 책들이 자료의 부족 때문인지 내용이 거의 같다. 얼마 전 새로 읽은 매티 노블 Mattie W. Noble의 <조선회상>과 차종순 목사님이 번역하신 <The Missionary> 두 가지를 토대로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겠다.

긴 여행과 임신으로 건강이 좋지 않았던 일행을 일본에 두고 리니 데이비스 선교사는  먼저 조선에 왔으며, 제물포에 도착한 이채연의 부인은 가족과 돌아가고, 리니 데이비스 선교사와 일행은 중국인 상인이 경영하고 외국인 공동체의 보호를 받던 스튜어드스 톱사이드 보딩 하우스(Steward's topside Boarding House)에서 밤을 보냈다. 이때의 일행은 감리교 선교사인 매티 노블 Mattie W. Noble과 남편 아더, Mr. Taft, 리니 데이비스 4명과 마중을 나왔던 스크랜턴 선교사 부부(Dr. W.B. Scranton), 올링거 목사(Rev. F. Ohlinger), 마펫(Samuel. A. Moffet) 선교사였다. 이들은 제물포에 도착한 다음날 한양에서 남쪽으로 수마일 떨어진 곳까지 배를 타고 올라갔다. 서울에서 약 5킬로쯤 떨어진 곳에서부터 가마를 타고 나머지 길을 가게 되는데, 가마가 두개만 와서 매티 노블과 리니 데이비스 선교사가 번갈아 걸어갔다고 되어 있다. 서울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성문이 잠겨 있었고, 성 안쪽의 높은 둔덕에 남자들이 올라가 마펫 선교사가 미리 준비해 둔 밧줄에 매달려 9M나 되는 성벽을 넘어 서울에 입성했다. 그리고 도성 안의 알렌 의사의 집에 무사히 도착했다.


7명의 선발대 중 제일 먼저 도착한 리니 데이비스 선교사, 그리고 같은 해 11월 3일에 테이트(Lewis B. Tate), 매티 테이트(Mattie Tate) 남매, 레이놀즈(William D. reynolds)와 팻시 볼링(Pasty Bolling) 부부, 전킨(William M. Junkin)과 메리 레이번(Merry Leyburn) 부부가 도착하면서 7명의 선발대가 "은자의 나라" 조선의 한양에 모여 새로운 시작을 위해 준비를 시작하게 된다.

7인의 선발대 @ joeunhee 2015.8.06

조지 톰슨 브라운의 "한국 선교 이야기"를 보면 리니 데이비스 선교사는 아프리카로 가기를 원했었고,  테이트 양은 오빠의 열정에 감동해서, 볼링양과 레이번 양은 "당신이 가는 곳에 나도 가겠다"다고 했다고 한다. 서울에 도착한 이들은 처음에는 북장로교 선교사의 집에 머물렀고, 후일 알렌의 출국 이후 그의 옛집을 구입해 살게 되었으며, 남부에서 온 그들을 기려 외국인들은 이 집을 "딕시 Dixie"라 불렀다.


선교사들은 일 년 여의 기간 동안 누군가가 명명한 "목이 곧고 머리가 아홉 개인 괴물"이라고 부른 한국어를 배우며 적응 기간을 가졌다. 조선의 말과 관습에 무지했던 초기에는 전킨 선교사가 자신이 양반이기 때문에 짐을 싸게 운반했다고 기뻐했으나 사실은 짐꾼이 "냥반 즉 여섯 전"을 달라고 한 일, 레이놀즈 선교사는 자신의 한국어 선생에게 차를 드시라고 한다는 것을 재를 드시라고 한 일 등등 우스운 일들이 생겼다.


1893년 2월에 이르러 조선에 있는 모든 장로교 사역자들로 구성된 장로교 공회가  조직되었고, 남장로교의 7인의 선교사는 전라남북도와 충남지방을 맡기로 하는데, 당시 전라 지방의 인구는 1,452,750명이었고 충청지방은 약 1,220,400명이었다. 후일 인력의 부족으로 남장로교 선교회는 여섯 개 군을 제외하고 충남의 모든 지역을 다른 선교회에 맡기게 된다.


이렇게 해서 7명의 남장로교 선교사는 전라남북도 지역의 선교를 맡게 되었다.


1892년 12월 레이놀즈와 마펫 선교사가 조랑말을 타고 충청지방으로 탐사 여행을 떠났다. 그 당시 여행의 어려운 점은 여러 가지이겠지만, 당시에는 은행이 없었으며 화폐 또한 구리로 된 동전이었으므로 여행에 쓸 돈을 실으려면 조랑말이  한두 마리 필요했다. 두 선교사가 멈추어 설 때마다 수상한 사람들이 주변을 돌며 돈상자를 보고 환호성을 질렀다.그 바람에  레이놀즈와 마펫 선교사는 때때로 단거리 경주를 하듯이 달려야 했다.


1893년 초 선교회는 한국인 조사였던 정해원 씨를 전주로 보내 땅을 구입하도록 했다. 그해 9월 전킨과 테이트 선교사는 처음으로 조랑말을 타고 전주까지 여행을 했다. 여행 중 전킨 선교사는 늦가을 장마로 불어난 개울물을 건너다 물에 빠지는데 이때 한국 사람에 의해 구조되었다. 그 후 전주에 도착해 정해원이 구입한 집에 두 주정도 머물며 전주를 둘러보고 다니는 중에 조선의 소년들은 그들을 따라 다니며 야유하고 고함을 지르기도 하고 돌을 던지기도 했지만 친절한 대접을 받았다고 표현했다.


여러 번의 탐사 여행과 조사를 거친 후 1894년 봄, 

테이트 선교사와 여동생 매티 테이트 선교사는 함께 전주로 내려왔다. 

1892년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으로 가기를 바라고 기도하던 7명의 선교사들은 

"한밤중 폭풍의 나라"라고 후일 어느 선교사가 말했던,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폭풍 속으로 

긴 여정을 시작했다.



  


             다음 편에 계속....

                          사진 : 양림동 호랑가시나무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7호)


이 글은 역사적인 사실에 기초한 글입니다. 

날짜와 장소, 이름 등이 잘못된 부분이 있어 부득이하게 다시 작성해서 발행합니다. 

도움을 주신 분은 광주 동성교회 차종순 목사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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