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은희 Oct 08. 2015

예수씨?? 날 사랑하오??
Yes!! Yes!!

Yes!! Jesus loves me!!! This I Know!!


 "예수씨 날 사랑하오. 예수씨 날 사랑하오"


조선으로의 긴 여행의 마지막에는 줄까지 타고 서울의 성곽을 넘어야 했던 리니 데이비스 선교사가 조선에 온 첫 해에 아이들에게 가르쳤던 찬송가이다. 지금의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  사랑하심은"이라는 찬양의 초기 번역이라고 해야 할까? 영어 제목이 "Jesus  loves  me"이니까 원어에 충실한 직역이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에 개신교 선교사인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제물포에 첫 발을 디딘 이후 성경이 완역될 때까지 20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개신교 선교사인 언더우드는 조선에 오기 전 일본에서 이수정을 만나 조선의 문화와 언어를 배우며 한글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조선에 온지 일 년 후 선교사들은 이수정이 번역한 "마가가 전한 복음서 언해"라는 마가복음 번역본과 로스 선교사가 만주에서 매킨타이어와 서상륜의 도움으로 번역한 신약선경 전부인 "예수성교 전서" 두 가지의 번역본을 고치는 방법과 새로 번역하는 방법 중에 어느 것으로  정할지 고민했다. 결국 선교사들은 새로 번역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신약과 구약 전부가 번역되는 긴 시간 동안 "God"의 호칭을 어떻게 정할지에 대해 선교사들의 의견은 달랐고 제일 큰  어려움이었다. 천주교에서 사용하던 천주, 일본의 신, 상제, 하늘님 , 하나님 중에 지금의 "하나님"으로 정해진 것은 1903년이고, 신구약 성경이 전부  번역된 것은 1911년의 일이다. 

호칭이 정해지기 전인 1892년에 조선에 온 리니 데이비스 선교사는 "쥬님~", "예수씨"라고 번역된 찬양을 가르친 것이다. 130여 년이 흐른 지금, 나는 "예수 날 사랑하심은"이라는 말보 "예수씨 날 사랑하오. 예수씨 날 사랑하오"라는 말이 재미있기도 하고 더 정이 간다. "예수님"보다 "예수씨"가  더 가깝게 느껴지고, "Jesus loves me."의 영어 문장에 담긴 사랑은 더 강렬하다. 

 "Jesus loves me."  

이 강렬한 사랑이 선교사들을 들어보지도 못한 "은자의 나라 조선"에 오게 한 것이다.


은자의 나라, 조선에서 선교사들은 단지 서양인이라는 것만으로도 조선인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들이 머물렀던 집 주변은 늘 서양인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로 붐볐다. 


후일 애너벨 니스벳 선교사의 기록을 보면 "~뚫어져라 넋을 잃고 쳐다보면서 재잘재잘 떠들어대는 관람객들 앞에서 원숭이가 어떻게 느낄지 아주 정확히 알기 때문이다. 들을 쓰거나 공부하려고 할 때마다 얼굴을 창 유리에 대고 나의 일거수 일투족에 집중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주님께서는 얼마나 고독의 자유를 열망하셨을까?~"라고 쓰여있을 정도이다.


결혼하지 않은 여성이 결혼한 부부와 한집에 사는 것은 당시 조선의 문화에서는 이상해 보였기에 리니 데이비스는 서대문에서 도티 선교사와 따로 살아야 했다. 두 독신 여선교사는 낮에는 밖에 나올 수 없는 조선의 여인들의 집을 방문하고, 아이들에게 성경 말씀과 찬양을 가르쳤다. 누군가에게는 머리가 아홉 개 달린 괴물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배우기 어려운 한글이, 언어적 재능을 타고난 레이놀즈 선교사에게는 수월했다. 조선에 온지 6개월 만에  우리말로 설교를 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공도 무시할 수는 없다.

언더우드 선교사가 1890년 요코하마에서 출간한 한국어 문법서인 "한어문전"과 영한사전인 "한영자전"이 있었기에 7명의 선교사들은 물론이고, 다른 선교사들은 좀 더 빨리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에 온 첫 2년간 7명의 선교사들은  우리말과 문화와 예의를 배우고, 빨리 조선에 적응하기 위해 애를 썼다.


1894년 3월 30일에 레이놀즈와 드류 선교사는 호남지방 답사를 떠났다.  한 달 반에 걸친  육로를 통한 답사는 전라도 여러 도시를 탐험하고 부산을 거쳐서 증기선으로 제물포로 돌아오는 것으로 끝났다.  조선에 온지 얼마 되지 않는 드루 선교사에게는 어려운 여행이었다. 걷는 길이 많았던 이 여행에서 드루 선교사는 발에 생긴 물집으로 인해 걷기가 힘들었다. 궁여지책으로 드루 선교사는 쪽 복음서를 신발에 넣고 걸었는데 이 쓰라린 여행은 드루 선교사를 내륙보다 배로 여행할 수 있는 군산을 선택하게 만드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1894년 3월 24일에는 테이트 남매가 말과 가마로 전주에 도착해, 전에 구입해 두었던 집에서 6주 정도 머물렀다. 전주에 살게 된 첫 서양 여인이었던 그녀를 보기 위해 매일 사오백 명의 사람들이 왔고, 다섯 개의 창호지 문은 구멍이 가득해졌다. 그리고 구멍들은 까만 눈동자가 차지했다. 밤이고 낮이고 누군가가 늘 자신을 쳐다보는 느낌 속에 지내야 했지만, 매티 테이트는 거리에 나가지 않고도 계속해서 전도지를 나누어 줄 수 있었다.


선교사들이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다고 생각할 즈음 조선은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어둠 속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바로 그 시작은 1월에 있었던 고부 농민들의 저항이었고, 이 동학 혁명은 청일 전쟁의 구실이 되기도 했다. 

개항 이후 끊임없이 쌀을 뺏어가고 땅을 빼앗던 일본과 관리들의 악정은 결국 농민들의 봉기로 이어졌고, 고부에서 시작된 동학은 호남 전역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동학농민 운동의 한 가운데에 있던 테이트는 선교지를 떠나지 못하고 5월 말까지도  전주에 머물렀다. 그리고 동학농민군이 10마일 밖까지 왔다는 소문이 돌 즈음에서야 서울의 공사관의 당장 돌아오라는 전문을 받고 군산을 거쳐 서울로 돌아갔다.


그리고 며칠 뒤, 1884년 5월 31일 전주는 갑오농민혁명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어둠과 혼란 속에 조선은 침몰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조선이라는 배에 조선인만  탄 것이 아니었다. 

푸른 눈의 선교사들도 있었다.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7인의 사무라이? NO!! 7인의 선발대? YES!!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