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쪽 눈에서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 내렸다.
간호사가 엄마의 눈이 따가우신가 보다고 거즈로 덮어 준다고 했다.
엄마와 가족실에 오롯이 둘이 남았다.
엄마의 눈물은 계속해서 흘러 내렸다.
엄마에게 이제 가도 된다고, 엄마가 가도 나도 죽지 않고 애들과 잘 살겠다고 말해 드렸다.
오래지 않아
숨이 점점 약해지더니 삐 소리와 함께 엄마의 숨이 멈추었다.
드디어...... 엄마가 돌아가셨다.
눈물이 쏟아졌다.
나는 현실적인 일들을 처리해야 했다.
슬퍼할 겨를도 없이 엄마를 모시고 갈 장례식장을 결정해야 했고 가족들에게 연락을 했다. 오빠가 일본 여행을 가 있어서 바로 돌아올 수가 없었다. 엄마를 장례식장 안치실에 모셨다. 오빠 없이 빈소를 차릴 수가 없어서 장례식장 실장님이 집에 갔다가 다음날 다시 오라고 했다.
발걸음도 떨어지지 않고 멍해서 장례식장 복도에 계속 앉아 있었다.
눈물이 나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멍하게 오랜동안 앉아 있었다.
소식을 들은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조문을 오려던 친구는 빈소가 차려 지지 않았고, 장례식장에 멍하니 앉아 있다는 말에 장례식장에 와서 나를 집에 데려다 주었다.
집에 도착해서도 멍했다. 다음 날이 오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나 길고 길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서울에서 내려온 동생과 저녁을 먹고 장례식장에 며칠 가있을 짐을 챙겼다.
수면제를 먹고 잠들었다가 아침 일찍 짐을 챙겨 장례식장에 돌아왔다. 빈소가 차려지고 휑한 장례식장 모습에 엄마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면서 보았던 다른 빈소의 화환들과 시끌벅적한 소음이 부러워서 꽃집에 화환을 주문했다. 그리고 나니 화환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화환을 보내주는 분들에게 고마웠다. 화환이 이렇게나 쓸모가 있는 건지 몰랐었다. 비어있는 장례식장보다 화환이 넘쳐나는 모습이 엄마에게 덜 미안하게 느껴졌다.
장례식이 시작되고 교회에서 위로 예배를 와주셨다. 휑하기만 한 장례식자에 와주셔서 사람의 온기가 도니 살 것 같았다. 손님도 없고 오빠도 도착하지 않은 장례식이 시작되었다.
나는 서울 사람이다.
광주에 내려온 지 십여년이 넘었지만 서울이 고향이다 보니, 친척들과 가까운 오랜 친구들도 대부분이 서울에 살고 있었다. 아무도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엄마를 보내드리는 마지막 순간이 너무 쓸쓸한 거 같아 더 미안하고 미안했다.
빈소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오빠는 아직도 인천 공항에 도착하지 못했다.
아무도 오지 않을 것 같은 장례식장에 오후가 되면서 한두명씩 손님이 오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와주는 지인들과 친척 어른들께 진심으로 고마웠다.
몇년 전 아빠의 장례식을 치를 때는 장례식 내내 울기만 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손님들이 누가 오든, 손님이 오지 않든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고 이야기를 나누고 음식을 먹었다.
귤은 너무나 달았다.
21시 45분 경 오빠가 드디어 도착했다.
진짜 장례식이 시작되었다. 나는 제발 아무 분란없이, 아무 사건도 없이 엄마를 조용히 보내 드리고 싶었다.
눈에 거슬리는 일은 눈을 감고, 귀에 거슬리는 말들에는 귀를 닫고 웃어 주었다.
다음날은 서울에서 외삼촌과 작은 아버지들, 그리고 친한 친구들이 다녀갔다. KTX표를 구하기 힘들어 장례식 첫날 오지 못했다고 미안해 했다. 나는 그저 와준 것만으로도 고맙고 감사했다.
엄마, 그리고 아빠도 이제 진짜 마지막으로 보내 드려야 했다.
모든게 끝이니까.
그 마지막 시간에 함께 해주러 서울에서 와준 모두들에게 고마웠다.
입관을 마치고 다음날 아침 발인예배를 드리고 관을 실을 때 관을 들 사람이 부족해서 장례식장 직원과 교회 집사님이 도와 주셨다.
화장을 하고 목함에 담겨진 엄마의 마지막 일부분을 받아 들었다.
아빠를 보내 드렸던 먼 바다까지 운전을 해서 갔다.
엄마를 무사히 보내드렸다.
잘가. 엄마.
이제 쉬어도 돼.
광주로 돌아오는 밤길에 거센 바람과 함께 눈발이 휘날렸다.
평생 잊지 못 할 그 눈오는 밤이 그렇게 지나갔다.
안녕. 엄마. 이제 진짜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