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하지 않아도, 나는 남아 있다
바쁘게 살지 않아도 사라지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
by
글빛 지니
Jan 21. 2026
적지 않아도, 이미 충분히 남아 있는 하루.
나는 2020년부터 5년 동안
바인더로 하루를 기록해 왔다.
매일,
빠짐없이 적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처음에는 그 기록이
나를 살게 했다.
활동을 거의 하지 못하던
코로나 시기,
바인더는
내 하루를 받아주는
유일한 공간이었고
말없이 곁에 있어 주는
친구 같았다.
적는 것만으로도
버틸 수 있었고,
그날의 마음을
남길 수 있다는 사실이
큰 위로가 되었다.
기록을 앞에 두고, 무엇을 남길지보다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를 먼저 고민하던 순간.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일상이
다시 바빠지기 시작하면서
기록은
조금씩 다른 얼굴을 갖게 되었다.
하루를 놓치면
마치 숙제를 하지 못한 것처럼
마음이 찝찝했고,
적지 못한 날은
제대로 살지 못한 하루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 올해는
하루 24시간을 시간 단위로 쪼개 적던
바인더를 내려놓았다.
대신
일정과 감정을 함께 정리할 수 있는
조금 더 여백 있는
다이어리로 바꾸었다.
모든 시간을
기록하지 않아도 괜찮고,
모든 하루를
설명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
조금 늦게 배웠다.
기록은
나를 붙잡기 위한 의무가 아니라,
필요할 때
다시 만나기 위한 공간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
브런치를
처음 시작했을 때도 그랬다.
처음에는
그저 기쁘고
즐거운 마음뿐이어서
매일 글을 쓰는 일이
전혀 부담되지 않았다.
내 글에 반응하는 사람들이
글을 읽는 동안, 나도 모르게 마음이 먼저 웃고 있었다.
있다는 사실이 행복했고,
글을 쓰며
나를 또 한 번 알아간다는
느낌이 좋았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일을 병행하며
살아가는 나에게
‘매일 글을 쓴다’는 일은
어느 순간부터
또 하나의 책임처럼
느껴질 것 같았다.
그래서 지금은
주말만큼은
과감하게 글쓰기를 내려놓는다.
그 시간에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고
나만의 시간을 갖는다.
예전의 나는
오랜 시간 생각을 반복해야만
내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었고,
그 후에야
다음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 간격이
점점 짧아지고 있음을 느낀다.
내 마음의 소리와
체력의 한계를
조금 더 빨리
알아차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때는
바쁘게 사는 삶이
곧 성공한 인생이라고 믿었다.
해야 할 일이 많고,
일정이 빽빽할수록
나는 잘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바쁘게 살아도
이룰 수 없는 것과
가질 수 없는 것은
늘 남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사람마다
그 사람에게 필요한
삶의 속도와 모양이 있다는 것도.
욕심을 내려놓기까지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다.
쉽게 포기할 수 없었고,
끝까지 붙잡고 싶었던 것들도 많았다.
그런데
조금씩 욕심을 내려놓자
비로소 보이기 시작하는
것들이 있었다.
얻지 못한 것보다
이미 가지고 있던 것들,
애써 쌓지 않아도
남아 있던 것들.
지금의 나는
모든 순간을 기록하지는 못했지만,
내 인생과 나의 철학이
분명히 남아 있다는 걸 느낀다.
기록하지 않아도,
나는 남아 있다.
이 글은 연재
〈나는 아직, 나를 배우는 중이다〉의 기록입니다.
아직도 나를 배워가는 글빛지니
기록하지 못한 하루,
바쁘지 않았던 시간 속에서도
여전히 남아 있다고 느껴지는
‘나’가 있으신가요?
여러분의 이야기도
조심스럽게 나눠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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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unch Book
나는 아직, 나를 배우는 중이다
09
혼자가 익숙해진 줄 알았는데
10
나는 왜 나를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11
기록하지 않아도, 나는 남아 있다
12
아직 남아 있는 1월 앞에서
13
이제는 나를 다그치지 않기로 했다
나는 아직, 나를 배우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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