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햇살과 보이지 않는 개수대
오랜만에 책 한권을 완독했다.
<그레이 아나토미>(그 ‘그레이아나토미’ 아니고)라는 해부학 교과서의 고전의 저자인 ‘헨리 그레이’의 전기를 쓰려던 빌 헤이스는 <해부학자>라는 독특하고 인상깊은 책을 출간했다.
작가는 헨리 그레이의 전기를 쓰기 위해 해부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이 책은 해부학 책이 되었고, 헨리 그레이와 관련한 기록이 부재하여 그와 함께 <그레이 아나토미>를 저술한 헨리 카터의 일기와 편지들을 충실히 읽은 덕분에 헨리 카터의 자서전이 되었으며, 해부학을 공부하고 헨리 카터의 자취를 탐색하는 과정을 기록한 덕분에 빌 헤이스 자신의 자서전이 되었다.
이러한 독특한 구성 덕분인지 나의 학부 시절에 대한 자전적 기록도 남기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다.
‘모름지기 해부학을 연구하고, 최소한 세 명의 여성을 해부해보지 않은 남자는 결혼할 자격이 없다.’ - 오노레 드 발자크 <결혼의 심리학> / <해부학자> 287쪽에서 인용
놀랍게도 한의대에서는 사주팔자나 관상을 배우지 않는다. 더욱 놀랍게도 상당한 시간을 할애하여 해부학을 배우고 더더욱 놀랍게도 해부학 실습을 한다.
내게 남아 있는 해부학 실습과 관련한 몇가지 인상들은 다음과 같다.
추운 겨울, 해부학을 배우는 예과 2학년에 진급하기 앞서 향우회 또는 동아리별로 ‘해부학 OT’를 진행한다. 내가 속한 향우회는 수인회 였는데 -짐승수에 사람인을 써서 수인회라는 말이 돌곤 했다. 구성원들이 술만 마시면 반인반수가 되서 그렇다는 것인지, 아니면 반인반수가 될때가지 술을 마신다는 것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수원과 인천의 앞글자를 따서 지었다는 설이 학계의 정설이다- 겨울방학에 2학년 1학기에 진행하는 모든 해부학 용어를 외우는게 해부학 OT의 주된 미션이었다.
기간은 3박 4일 정도 였고, 예과 2학년부터 본과 4학년까지의 선배들이 차례로 방문하여 테스트를 하고 문제를 틀렸을 때에는 (엄청난 양의) 얼린 초코파이와 귤이 뒤따르는 것이 통상의 벌칙이었다.
OT 일정을 하루를 남겨두고 도망치듯 빠져나왔던 기억과 아버지께서 이 사실을 아시고는 참을성 없이 혼자만 빠져나왔다고 꾸짖으셨던 기억이 난다.
내가 선배가 되었을 때에도 마찬가지로 후배들을 찾아가서 시험을 내고 얼린 초코파이 등을 주었던 기억이 있는데, 암기할 분량이 얼마나 많았던지 얼마 전 결혼한 수재중에 수재인 후배는 남은 분량 암기를 면제해 주는 조건으로 고삼을 먹을 생각이 있냐는 제안에 흔쾌히 수락했을 정도다 .
그 때나 지금이나 해부학 오티는 전통보다는 폐습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나는 도망치듯 빠져나왔을 때처럼 선배가 되어서도 바로잡을 용기가 없었다.
후회가 된다.
그렇게 학기는 시작했고, 인체해부에 앞서 동물해부 수업이 있었다. 화창한 봄날이었고 우리는 흰 가운을 입고 실습실에 모였다. 대략 5-6명이 한 조를 이루었고, 각 테이블에는 실험용 쥐-크기가 햄스터에 가까운-가 배치되어 있었고, 조교의 테이블에도 실험용 쥐-크게가 들쥐에 가까운-가 놓여있었다.
해부에 앞서 살아있는 실험용 쥐의 숨을 끊어야 했다. 각 테이블의 누군가는 해야하는 일이었는데 나는 하고 싶지 않았다. 해부용으로 위생적으로 길러진 실험용 쥐의 숨을 가장 고통없이 끊는 방법은 한 손의 엄지와 검지손가락우로 쥐의 후두골을 잡고, 다른 손의 엄지와 검지 손가락으로응 쥐의 앞다리-사람으로 치면 어깨부위-를 잡고 신속히 서로 반대방향으로 당기는 것이다.
아찔한 기억 때문인지 그 일을 내가 했는지 아니면 다른 조원이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힘들었던 기억은 남아있지만.
이보다 비극적이고 충격적인 장면이 어럼풋이 기억나는데, 조교의 테이블에서 있었던 일이다. 실습에 앞서 준비를 하던 조교는 원만히 그 일을 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당황하던 조교는 창가쪽의 개수대로 실험용 쥐와 커다란 가위를 가지고 갔다. 녹음이 푸르른 화창한 봄날의 일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시간이 흐른 뒤, 인체 해부실에 모였다. 시신-우리는 시신이라는 표현 보다는 카데바라는 표현을 썼다. 다들 인격적으로 완숙하지 못하던 시절이기에 혹시라도 실례를 범하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에 더 신경써서 그와 같이 표현했던 것 같다-을 둘러싸고 교수님의 지도에 따라 해부를 했다. 인체를 해부하기 시작하며 처음 깨달은 것은 혈관과 신경과 림프관이 잘 구분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심작박동이 멈춘 시신의 몸속은 질서보다 카오스에 가깝다. 심장이 뛰고 있는 사람은 그보다 100배는 더 카오스에 가까울 것이다. 내가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을 마음속 깊이 존중하는 이유 중 하나다.
모닥불이 식어가듯, 카데바와 달리 나와 동기들로주터 뿜어져 나오던 열기도 경우에 따라서는 식어가곤 했다. 해부학이 재미없거나, 해부가 자신이 없거나, 해부학을 공부하는 것이 나중에 개원했을 때 딱히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거나, 전날 술을 많이 마셨다거나 등등의 각자의 이유에 따라 해부에 대한 열정이 식어갔을 것이다. 나도 앞서 언급한 사유들 중 몇몇을 이유로 실습 테이브 뒤쪽 벽 근처에 걸터앉았다. 가브리엘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을 손에 들고 있었고, 그 모습이 어울린다는 동기의 말에 어깨가 으쓱하기도 했다. 열정이 식은 모습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말이다.
후회가 된다.
금요일이면 아내랑 소파에 앉아 밀린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본다. ‘의사는 환자를 포기하면 안된다’는 대사에 깊이 공감하며, “적어도 의사 만큼은 ‘절대로’ 환자를 포기하면 안되지.”라고 되뇌인다. 내가 아프거나 가족이 아프거나 친구가 아플때 견디는 것보다 포기가 쉽다고 느껴질 때, 의사마저 그에 동조한다면 그걸로 끝이다. 슬프게도 경험에서 우러나온 말과 생각을 티비속 캐릭터가 대신 해줄때는 쾌감과 동시에 후회감이 파도처럼 덮쳐온다.
그러고 보니 해부학과 관련한 나의 경험은 후회로 점철되어 있다. 내가 이제는 더 이상 환자를 진료하고 있지 않음에 나도 당신들도 안도의 한숨을 쉬어야 할 정도다.
헨리 카터는 “헨리 그레이와 같은 대가 밑에서 일하지 않는 한, 그렇게 거대한 프로젝트를 두반 다시 수핼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는 천부적인 리더로, 큰 그림을 볼 줄 알고 현대적인 문장을 구사할 줄 아는 인물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생명을 바라보는 스케일이 너무 작다”라고 적었다. 이런 헨리 카터에 대해서 빌 헤이스는 이는 터무니없는 자기 비하이고 그는 위대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며, 작은 것에 집중하고, 사물을 분석하고, 정신적으로 해부하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높게 평가한다.
타인의 평가가 나를 정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헨리 카터의 노력과 자기성찰에 기인한 극복의 시간 덕분에 빌 헤이스의 위와 같은 평을 했을 것이다.
후회로 점철된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면 앞으로는 보다 용감하게 직업인으로서의 윤리를 지키며 살면 된다. 후회의 기억을 원동력으로 삼되, 과거의 나를 최소한의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