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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만세 Oct 04. 2019

노는 기록 - 15일

2019년 7월 9일 / 나트랑(냐짱), 베트남




어떤 더위를 상상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것보다는 더 더웠다.


처음 '베트남에나 가볼까?'라고 생각했던 건 정말로 가벼운 마음이었다. 냐짱에 가서 친한 오빠가 운영하고 있는 해산물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고 그의 시간이 허락한다면 그와 술도 마시고...쌀국수도 먹고?

주변에서 하도 베트남에 많이 간다길래 유명한 여행지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한 번도 가볼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던 탓에 가지고 있는 정보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비행기 티켓도 저렴한 편인 데다 비행시간이 길지도 않고 맛있는(그리고 익숙한) 것들이 많다길래 나는 마치 부산에 친구를 만나러 가는 심정으로 여행을 결정했었다. 애초에는 3일에서 4일 정도의 일정으로. 그러나 비행기 티켓팅 전에 너무 많은 것을 찾아보면서 별 일정 없이 3일만 머물기에 베트남은 점점 더 아까운 곳이 되어 갔고 결국 끝없는 욕심에 못 이겨 나는 3일의 냐짱 전반전 일정에 3일의 푸꿕섬 후반전 일정을 붙여 일주일의 베트남 여행 일정을 만들고 말았다. 물론 초심은 변하지 않은 채로 가장 중요한 건 친구를 만나는 일이었다. (진심이다)


전반전인 냐짱의 테마는 시티였으므로 우리는 냐짱의 가장 번화한 곳에서 차로 약 20분가량 떨어진 곳에 합리적인 가격의 에어비앤비 아파트에서 3일 동안 머무르기로 했고, 아침 일찍 공항 근처 호텔을 나서 택시를 잡아타고 곧장 아파트로 향했다. 이른 시간이었지만 밖으로 나오자마자 우리를 사납게 덮치는 더위에 일차 충격을 받은 데다가 전날 밤부터 굶은 탓에 내 애인이 저전력 모드에 진입하고 있었으므로(그는 더위와 굶주림에 몹시 취약한 편이다) 나는 빠르게 해결책을 강구해야만 했고, 일단 짐이라도 덜어 보자는 심정으로 호스트에게 이른 체크인이 가능한 지 확인했는데 운 좋게도 가능하다는 답변을 받았다. 그러나 어쩐지 초장부터 모든 것들이 순조롭게 돌아간다 싶으면 의심을 해볼 필요는 있다. 아파트 근처에 도착해 근처 까페에서 시원한 커피라도 마시면서 호스트의 연락을 기다리기로 했는데, 그가 원샷을 위해 주문한 아이스커피는 냐짱의 땡볕보다 더 뜨거운 상태로 나왔고(유감이었으나 그는 한번 참고 우아하게 뜨거운 커피를 홀짝이기 시작했다), 일찍 체크인하기로 했던 숙소의 호스트와는 갑작스럽게 연락이 끊겼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기다리는 것뿐이었기에 우리는 배고픔이라도 어떻게 해볼까 싶어 커피를 마시던 까페에서 햄버거를 주문하려고 했는데, 커피를 마시고 나서 수중에 달러밖에 남지 않아 그것마저 무산되고 말았다. 발리에서처럼 시내에 도착하기만 하면 여기저기 환전소가 흩뿌려져 있을 거라고 대충 생각했기 때문인데, 그쯤 되자 그는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우리 돈 없어서 햄버거도 못 사 먹어."


결국 우리는 '이른 체크인'은 고사하고 '정상적인 체크인'시간보다도 한참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아파트에 들어갈 수 있었다. 우리를 도와주기 위해 나온 호스트는 아파트를 청소해주기로 했던 분이 갑작스럽게 나타나지 않아 친구들을 다 불러 청소를 하느라 체크인이 늦어졌다고 설명하면서 미안해했고, 우리는 넓고 에어컨이 있으며 쾌적하기까지 한 30층 아파트에 들어서자마자 그 모든 것들이 상관없어질 만큼 관대해졌다. 호스트는 영어 소통이 가능한 나이스한 청년이었고 심지어 우리가 밥을 사 먹을 수 있도록 환전도 해주었다. (자기야 우리 이제 햄버거 사 먹을 수 있어) 그렇게 우리는 차가운 에어컨 바람과 베트남 동으로서 평화를 되찾았고(사람이란 간사하다) 아파트 근처에서 간단한 식사를 한 후 냐짱 시내로 향했다.


냐짱에 온 이유였던(중요하다) 친한 오빠의 해산물 레스토랑은 냐짱 시내 중심지에 위치해 있었고, 구글맵으로 경로를 확인하던 중에 포나가르 사원을 발견하여 우리는 사원에 먼저 들르기로 했는데 숙소를 나온 지 1분 만에 벌써 비 오듯 땀을 흘리는 그를 바라보며 약간의 눈치를 보기는 했지만 예상보다 시원스럽게 잡히는 '그랩'어플의 택시 덕분에 별다른 어려움 없이 포나가르 사원에 도착했다. (그는 베트남에 오기 전에 '삼 보 이상 걸을 거리는 무조건 택시'라는 제법 유용한 조언을 듣고 왔다. 그랩 만세) 포나가르 사원은 참파 왕국의 힌두교 사원인데 전쟁으로 꽤 많은 부분이 소실되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붉은 첨탑과 사원이 남아있는 곳으로 여행을 시작하면서 우리의 안녕을 빌기에 더할 나위 없는 곳이기도 했다.(이국적인 더위의 한가운데에서 우리가 서로를 너무 싫어하지 않도록 빌어야 하기도 했고) 물론 수많은 사람들에 치이는 일을 감수해야만 했지만.


선명한 색의 하늘과 그 하늘을 투명하게 관통하는 햇살 아래에 침묵하고 있는 붉은 건축물은 엄청나게 크지는 않았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위엄 있어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와중에도 고요하게 느껴졌다. (나는 대체로 힌두교 사원을 좋아하는 것 같다) 우리는 사원 내의 그늘 아래에 앉아 오전 중에 조금 뾰족해진 마음을 내려놓고 숨을 고른 후, 해산물을 생각했다. 아주 금세 마음이 넉넉해졌다.


해변이 바로 보이는 도로를 달린 후, 빼곡한 건물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기 시작하자 번화가의 공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낮게 깔린 먼지의 냄새와 분명 그곳의 규칙들이 존재하겠지만 우리는 전혀 알 수 없는 교통 커뮤니케이션의 소리, 어딘지 모르게 다른 리듬을 타는 관광객들의 발걸음, 그리고 레스토랑의 문을 열자마자 얼굴로 쏟아지는 인공적인 냉기까지.(이것이 바로 냐짱 도시 한복판의 오아시스인가) 해산물과 볶음밥, 맥주까지 잔뜩 주문하고 음식을 기다리고 있는데 오빠가 주방에서 휘적휘적 걸어 나왔다. 그는 딱히 반가운 기색도 없이 어정쩡하게 테이블 근처를 서성이다가 필요한 게 있으면 꼬맹이한테 부탁하라고 말하면서 작의 체구의 서버 친구를 가리키고는 주방으로 돌아갔는데, 나는 낯선 도시에서 변한 것 없이 뻔한 그의 모습에 약간의 안도감을 느꼈다. (갑자기 환하게 웃으면서 반가워하기라도 했으면 무서울 뻔했다) 신선해 보이는 꽃게와 새우, 조개와 홍합이 소스를 덮고 있는 모습은 언제 봐도 아름다운 광경이어서 우리는 바다 근처로 여행을 왔다는 사실에 새삼 감격하며 그릇을 비웠고, 손님들이 하나둘 더 들어오고 주방도 바빠지는 듯 보이자 꼬맹이 친구에게 인사를 전해 달라는 말을 남기고 레스토랑을 나섰다.


전투적이었던 식사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부른 배를 두드리며 우리는 다시 숙소로 돌아가 낮잠을 잤고, 해가 완전히 저물어 도시가 식은 후에 오빠의 레스토랑 마감시간에 맞춰 해변의 펍으로 향했다. 맥주 양조시설이 있는 펍으로 유명한 곳이었으나, 우리는 해변과 가까운 자리에 앉아 여린 바람을 맞으며 와인을 마셨다. 오빠는 우리에게 매일 새벽 해산물 시장에 장을 보러 가는 이야기나 오토바이를 타다 차에 치어 자빠진 이야기, 그러니까 차가 왕이라서 돈 벌면 차를 사겠다는 이야기, 영어도 하면서 좋은 직원 구하기가 진짜 힘든데 자기네 꼬맹이는 똑똑하고 영어공부도 한다는 이야기와 냐짱의 맛집 이야기를 줄줄이 했다. 그는 틈틈이 냐짱은 할 것도 없고 불편한 데다 맛있는 맥주도 없다면서 투덜댔지만, 그가 뜬금없이 베트남으로 떠나기 전 한국에서의 갈피 못 잡던 시간을 충분히 보았기 때문에, 그는 베트남에서 나름대로 괜찮게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든 사람 사는 곳은 비슷비슷한 모양새일 테니, 어디에서든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 수 있다면 그 자체로 다행인 일처럼 여겨지기도 했고 말이다.


오빠는 대수롭지 않은 척하면서 끊임없이 음식이 맛있었는지를 물었고, 우리는 우리의 소감은 물론이고 옆 테이블과 뒷테이블의 반응까지 보고하면서 예쁜 옷을 입고 여행 오는 친구들을 위해 앞치마를 준비하면 좋겠다는 생산적인 피드백까지 남겼다. 대화의 중간중간 검게 물든 바다를 보며 큰 숨을 내쉬었고, 내 친구의 생활이 스며들고 있는 그 뜨거운 나라는 조금씩 친근해지고 있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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