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 12일 / 푸꾸옥(푸꿕), 베트남
베트남에서 국내선 항공기를 이용한다는 것은, 인내심 그 너머에 있는 어떤 능력을 얻는다는 의미이다.
아직 어둠이 자작자작한 새벽, 핸드폰 알람이 자지러졌다. 냐짱을 떠나는 비행기 시간이 잔인하게도 오전 7시 반이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끊임없이 내려앉는 눈꺼풀을 가까스로 들어 올리면서 기계적으로 짐을 정리했고, 태양이 떠오르는 희미한 전조와 함께 그새 집 같아진 냐짱의 숙소를 등졌다. 구글맵으로 보았을 때 냐짱은 베트남의 동쪽이었으므로 머무는 동안 한 번은 일출을 봐야겠다고 생각은 했으나, 술로 점철된 밤들과 게으른 천성의 콜라보레이션으로 우리는 줄곧 일출과는 연관성을 찾아볼 수 없는 시간에 기상했다. 해서 우리의 살얼음판 같은 의지로 할 수 없었던 일은 가볍게 포기하고 푸꿕에 가면 일몰을 봐야지,라고 생각했는데 우연찮게도 이른 비행기 시간으로 인한 강제 기상이 우리에게 아침해를 선물했다. 해변가의 도로에 짐을 내려놓고 공항으로 가는 택시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바다에서 막 건져 올려진, 너무도 깨끗하게 빛나 완전한 새것처럼 보이는 해의 얼굴을 마주 볼 수 있었다.
택시는 20여분 동안 해안 도로와 시가지를 달려 공항에 도착했다. 냐짱에서 푸꿕섬으로 이동할 수 있는 국내선 직항 노선이 없어(원래 없는 것인지, 내가 티켓팅 할 때 없었던 것인지는 모르겠다), 호치민을 경유해야 했는데 냐짱에서 호치민으로 향하는 항공 노선의 사람들은 명절 시즌 시골에서 서울로 상경하는 풍경을 떠올리게 했다. 가능한가 싶을 정도의 커다란 짐들과 가족 단위의 승객들, 수화물 체크인 줄에서 정신없이 열리는 짐에서 뿜어져 나오는 숨길 수 없는 두리안의 존재감, 그곳은 아비규환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썰물에 떠밀려 수화물 수속을 하고 보안 검색대를 통과한 후, 보딩 타임에 맞추어 게이트 앞에 섰지만 게이트는 열릴 생각조차 없어 보였고 심지어 비행기 이륙 시간이 다가오는 시점에도 누구 하나 급해 보이지 않았다. (우리만 급했다) 티켓에 적혀있는 시간과는 전혀 상관없이 게이트가 열린 이후에도 비행기까지 도달하는 셔틀버스는 느긋하게 사람들을 꾸역꾸역 태웠는데, 그쯤 되자 우리는 베트남 국내선 항공기에서 정시 이륙은 환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시계를 보는 것을 포기했다.
그러나 저러나 비행기는 우리를 대도시 호치민 공항에 뱉어냈고, 푸꿕행 비행기는 정시에 탈 수 있을 거라는 순진한 기대와는 달리 우리는 2시간 연착 선물을 받고 공항 의자에 널브러졌다. 여전히 시간은 오전에 머물러 있었으나 얼굴은 끈적거렸고 호치민 공항의 인파에 짓눌려 피로는 배가 되고 있었기에 우리는 번갈아 서로의 무릎을 베고 짧은 잠을 잤다. 그가 시원한 커피를 사 오겠다고 자리를 뜬 사이 나는 몸을 일으켜 여기저기를 바라보다가 내 의자 뒤에서 할머니에게 안겨 있던 아기와 눈이 마주쳤다. 태어난 지 1년은 되었을까 싶은 작은 생명체는 반짝이는 눈동자를 나에게 고정하고 손을 뻗거나 청량한 목소리를 뽐내며 웃었는데 아기를 안고 있던 할머니가 눈치를 채고 대뜸 나에게 아기를 안겨 주었다.(저기요?)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일단 아기를 받아 안은 나도 당황했고, 커피를 사들고 돌아온 그 역시 낯선 아기를 안고 서 있는 나를 보고 당황하고 말았는데 신비로운 것은 그 무해하고 보드라운 생명체 하나를 안아 드는 것만으로 피로나 짜증이 사라진다는 사실이었다. 아기의 가족들은 흐뭇한 표정으로 낯선 외국인인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뭐라도 좋은 말들을 하고 싶었으나 이내 포기하고 단 몇 분동안 아기를 꼭 안고 있었다. 어쩌면 아주 아주 오래전에는 한국에서도 있을 법했겠지만, 요즘 같은 세상에는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아니 뭘 믿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는데 덥석 아기를 안겨주다니. 만약 내 아이였다면 낯선 이가 손도 못 대게 했을 텐데, 그들이 아기와 함께 건넨 찰나의 순수한 신뢰는 무척 어색했으나 사실은 아주 따뜻하고 감사한 일이었다.
길고 지루했던 대기시간이 끝나고 푸꿕행 비행기가 이륙했다. 물론 미리 안내되었던 이륙시간과는 동떨어진 시간이었지만 크게 상관은 없었다. 비행기가 떴다는 사실만으로도 감격스러운 일이었으니까.
오후 4시가 넘은 시각, 우리는 냐짱보다 훨씬 고요하고 끝없는 허허벌판처럼 보이는 푸꿕섬에 도착했다. 관광객들이 늘어나기 시작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아 냐짱보다 택시 잡기가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 우리는 미리 리조트에 연락해 공항 픽업 서비스를 요청해 놓았고(그러나 우려와는 달리 이후에 택시 잡기는 수월했다), 어렵지 않게 드라이버를 만나 첫째 날의 숙소로 향했다.
전반전인 냐짱 여행의 테마가 시티였다면, 후반전인 푸꿕섬 여행의 테마는 휴양이었기 때문에 확실히 냐짱보다는 푸꿕의 숙소를 고르는 데 더 공을 들였는데 발리만큼은 아니었지만 푸꿕에도 좋은 숙소 옵션이 많아 고민을 많이 해야 했다. 결국 발리 여행 때와 마찬가지로 3번의 숙박을 각각 다른 곳으로 정했고 첫째 날 숙소는 그중 가장 저렴한 가격의 조용한 리조트였다. 픽업 차량의 드라이버는 한번 들어가면 절대 나오지 못할 것 같은 굽이지고 좁은 숲길로 차를 몰았고 불안감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려는 찰나, 우거진 나무들 사이에 숨겨져 있는 리조트 입구에 차를 세웠다.
리조트는 작고 조용했으며 낮아지는 햇살과 함께 여유로움이 내려앉아 있었다. Island Lodge라는 이름처럼 큰 수영장 주변으로 작은 나무집들이 줄지어 있었고 각각의 나무집 앞에 있는 발코니의 의자에 앉으면 잔잔한 수영장과 하늘을 볼 수 있었다. 숙소는 자연친화적인 데다가 깔끔한 편이었는데 놀라울 만큼 손님이 적어, 우리는 아무도 없는 고요한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했고 아무도 없는 수영장에서 저녁 수영을 하며 옅게 물드는 구름들을 구경했다.
긴 하루였고, 뜻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하루였으나 결국 우리는 아름다운 섬을 만나는 일에 성공했다. 쨍한 도시의 소음과 불빛들 대신 풀벌레 소리와 밀도 높은 어둠이 있는 곳에서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느리게 숨을 고르고 진한 잠을 잤다. 이제 다른 리듬의 여행이 시작되고 있음을, 우리의 몸과 마음이 알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