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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만세 Oct 16. 2019

노는 기록 - 17일

2019년 7월 11일 / 나트랑(냐짱), 베트남

우리는 모두 각자의 이론이 있는데, 그것들은 대체로 아주 얄팍한 경험 위에 세워진 편견의 성인 경우가 많다. (나는 대략 3년 전까지 먹어본 적도 없는 가지를 싫어했고, 현재까지도 먹어본 적 없는 연근을 싫어한다) 또한 그 성은 쓸데없이 견고한 편인데, 우습게도 아주 얄팍한 경험들에 의해 쉽게 무너지기도 한다.


전날과 다름없이 깡깡대는 공사 알람으로 아침을 맞이한 우리는 전날 갔던 아파트 앞 까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하루를 시작하기로 했다. 그날의 커피 주문 전략은 '어제 아침에 말이 통하지 않아 커피 주문에 20분이 걸린 외국인들을 기억나게 하기'였는데, 전략은 탁월했고 우리는 엄청난 기세로 10분 만에 주문을 완료한 후 테이블에 앉았다. 차갑고 달콤한 커피를 마시며 기분 좋은 바람이 머리카락에 스며드는 것을 느끼고 있던 중 숙소의 호스트 청년을 다시 만났고 어쩌다 보니 우리 테이블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는데 또 어쩌다 보니 옆 테이블에 앉아 혼자 커피를 마시고 있던 러시아 아저씨까지 토크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호스트 청년이 베트남에서 나고 자랐는데 어떻게 영어와 중국어까지 잘하게 되었는지부터 시작해 러시아 아저씨 가족의 미국 이주 및 그 옛날 격동의 소비에트 유니언과 현재 러시아의 빈부격차에 대한 심오한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냐짱의 마지막 날을 시작할 수 있었다.


베트남에 도착하고부터 내내 베트남 전통모자인 '농'을 가지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는 나를 위해 그는 그날의 첫 번째 목적지로 담 시장을 선택해 주었고, 뭘 고르고 말고 할 것도 없는 똑같이 생긴 모자들 사이에서 밝은 오렌지색 리본 끈이 달린 농을 산 후 시내로 향했다. 날씨가 또다시 '몹시 더움'상태였기 때문에 우리는 뭘 고르고 말고 할 것도 없이 눈에 보이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고, 전날 오빠가 추천해준 까페에서 시원한 커피를 마시기로 했는데 뜨거운 태양열이 필터 없이 내리 꽂히는 와중에 까페에는 웨이팅이 있었다. (심지어 웨이팅 존이라고 하기에 무색한 길 한복판은 한국이었다) 맛집 투어에 딱히 열정이 없는 우리는 한국에서도 줄 서서 뭔가를 먹지 않는데 당연히 까페 웨이팅은 태어나서 처음 겪는 일이었고 그래서 그냥 기다리기로 했다. 여행에서는 원래 안 하던 짓을 하고는 하니까. 20분쯤 그의 전력이 빠르게 소모되는 과정을 지켜보다가 들어선 까페는 커다랗고 높은 정원 같았는데, 여기저기 나무와 풀들이 가득했고 꽤 높은 곳까지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으며 얕은 물이 흐르는 곳에 징검다리가 놓여 있었다. 우리는 예쁜 공간에 감탄한 후 차가운 커피를 마시면서 '스탭들도 음료 서빙할 때 징검다리 건너면서 물에 빠지겠지?'라든가 '나무랑 풀이 이렇게 많은데 모기 엄청 많지 않을까?'따위의 대화를 했고, (우리의 인스타그램 감성은 도난당했다) 코코넛 커피는 콩까페가 챔피언이라는 결론을 내고 다시 거리로 나섰다.


나는 여행지에 가면 스카프를 사는 병이 있고, 그는 갑자기 타투하고 싶어 지는 병이 있다. 이번에도 구글의 도움으로 냐짱의 타투 샵을 찾은 그는 특별히 가고 싶은 곳이 없다면 그곳에 가봐도 되는지 물었고 그렇게 우리는 일층에는 펍이, 이층에는 타투이스트의 작업실이 있는 작은 러시아에 들어서게 되었다. 타투이스트는 영어를 전혀 못하는 러시아인이었기 때문에 내 남자 친구가 원한 시안을 변형하고 디자인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펍에 있던 다른 이의 통역이 필요했고 어느 정도의 의논 끝에 타투이스트는 한 시간 정도 걸린다는 디자인 스케치 작업을 위해 이층으로 올라갔다. 우리는 러시아인들로 가득한 작은 펍에서 맥주와 토마토 주스를 마시면서 시간을 보냈고 잠이 쏟아지려는 찰나에 타투이스트가 다시 일층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제법 쾌적하고 쿨해 보이는 작업실에 들어선 이후에도 내 까탈스러운 애인과 타투이스트는 30분이 넘도록 스케치 시안 여기저기를 변경했고 내 영혼이 지루함을 이기지 못해 홀로 숙소로 향하려는 순간, 드디어 완성된 시안이 남자 친구의 팔에 커다랗게 올라앉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는 마지막 순간에 갑자기 타투하고 싶어 지는 병을 이겨내고 말았다. 스케치는 훌륭했지만 실제로 팔에 얹어지자 그 크기가 현실로 와 닿았고 그는 조금 더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던 것이다. 우리는 고생한 타투이스트에게 전하는 미안함을 구글 번역기에 잔뜩 집어넣었고 타투이스트는 그 출력을 바라보며 혹시 디자인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지를 물었다. (미안한 마음이 배가 되었다) 우리는 디자인의 문제는 전혀 아니라고 답변하면서 그가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기를 바랐고 디자인과 스케치 비용을 지불하고 난 후 몇 번의 감사 인사에 사과의 말을 덧칠해 남겨두고 타투샵을 떠났다. 나는 어쩐지 잘 가시지 않는 미안함을 빨리 떨칠 수 있기를 바랐는데 그가 맡겨 두었던 시계를 돌려주다 땅바닥으로 시원하게 낙하시키는 바람에 미안한 마음을 보내는 여정의 끝이 요원해졌다. (심지어 그 시계는 베트남으로 출국할 때 면세점에서 내가 생일선물로 사준 것이었고, 찍은 지 얼마 되지 않는 새 시계 자랑 사진만이 남아 내 마음을 찢어 놓았다)


우리의 여행은 여전히 한참 진행 중이었고, 조금씩 식어가는 도시의 저녁은 아늑했으나 나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풀이 죽은 것처럼 보였던 타투이스트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고, 여기저기 상처가 나버린 내 연인의 새 시계가 마음속에서 덜그럭 덜그럭 요란을 떨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물건을 아낄 줄 몰라서 이것저것 잘 상처를 내는 편이라 새 옷이 망가지거나 핸드폰이 부서져도 크게 신경 쓰지 않지만 그는 나와는 다르게 자신이 가진 많은 물건을 잘 다루고 오래 깨끗하게 유지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 걷는 동안 불편한 마음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그는 5초에 한 번씩 미안하다고 말하다가 어느 순간 말이 없어진 나를 한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자기가 선물로 사준 시계에 상처가 나서 나도 속상하긴 하지만, 네가 미안해서 이 즐거운 시간을 잃어버리는 게 더 속상해. 시계는 나중에 고치면 되니까 큰 일도 아니고. 나는 너의 기분이 더 중요해. 그러니까 그만 미안해하고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나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의 얼굴 여기저기를 뜯어보았으나(혹시 화를 억누르고 나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을 숨기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오히려 잘못은 내가 했는데 그가 죄지은 눈동자를 하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해서, 나는 그쯤에서 미안한 마음이든 불편한 마음이든 내려놓기로 했다. 끊임없이 미안해하다가는 더 미안한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우리의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까.


우리는 원래의 궤도로 돌아가 추천받은 로컬 맛집인 오리탕 식당으로 향했다. 오빠가 추천해준 맛집이었고 한국은 다음날이 복날이라는 소문을 들었으므로 당연한 의식의 흐름이었는데, 전날의 오토바이 사고로 병원에서 골절 진단을 받아 그날 하루 종일 가게도 못 열고 집에서 요양 중인 오빠가 마음에 걸려(외국인은 아프면 서럽다) 우리는 그를 불러 함께 오리탕을 먹기로 했다. (아프면 잘 먹어야 하고, 메뉴가 하필 오리탕이라 더할 나위 없었다) 오빠는 붕대를 감은 발을 질질 끌며 식당에 나타났고 우리 셋은 노상에 펼쳐진 테이블로 안내받아 오리탕을 주문했다. 오빠는 차에 받혀 오토바이에 발이 깔린 이야기와 가게의 매니저 친구가 일찍부터 병원에 데리고 가서 통역을 해준 이야기를 줄줄이 하면서도 아직 덜 아픈 탓인지 ‘오리탕은 소주랑 먹어야 되는데, 아니면 보드카 있으면 좋은데. 여기서 소주 팔면 잘 팔릴 것 같지?’따위의 쓸데없는 소리를 덧붙였다. 그러나 부드럽게 풀어지는 오리고기와 고수 향이 살짝씩 배어있는 고소한 육수, 뭉근하게 끓인 죽까지(거의 한국식 코스였다) 먹으면서 소주를 마시지 못하는 것은 치명적으로 섭섭한 사실이긴 했다.


바로 다음날 새벽에 푸꿕으로 떠나는 일정이었기 때문에 저녁 식사를 하고 바로 오빠와 헤어지려는데, 3일 연속 얼굴을 봐서 그새 아쉬운 마음이었는지 아니면 다친 사람에게 마음을 쓰는 나를 배려해서인지 남자 친구가 망고주스 한판을 제안했고, 우리는 길가에 펼쳐진 작은 의자에 앉아 당도가 건실하게 쌓인 망고주스를 마시며 언제인지 알 수 없는 다시 만날 날을 기약했다.


냐짱에서의 마지막 밤, 사람들의 얼굴이 새겨졌다. 내가 알고 있던, 혹은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알 수 없는 편견으로 둘러싸여 있던 무명의 얼굴들이 새롭게 이름을 얻고 다시 새겨졌다. 나는 러시아인들이  차갑다고 생각했으나 그날 아침 까페에서의 러시아 아저씨와 타투샵의 사람들은 다정하고 순수했다. 공항의 출입국 심사 줄에서 당연한 듯이 새치기를 하는 사람들이 내가 알고 있던 중국인의 전부였으나, 밤이 지나가는 것이 아쉬워 들른 중국 식당의 사람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려 깊고 상냥했다. 우리는 그들 모두에게 웃었고, 그들의 언어로 유려하지 않은 감사 인사를 몇 번이고 전했다. 밤은 깊이 익어갔고 우리는 우리를 너그럽게 받아 주었던 도시에 안녕을 고할 채비를 했다. 우리는 아직도 모르는 게 많은 사람들이지만 여전히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넘치는 이들임을 곱씹어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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