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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신만나드립니다 Sep 21. 2022

중의학과 한의학을 넘어 사업까지, 박주연 한의사

북경 중의대와 원광대 한의대를 졸업한 박주연 한의사 


요즘 여러분의 주요 관심사는 무엇인가요? 나만의 브랜드나 창업이 요즘 굉장히 인기가 많은데요...!
"한의대생도 해낼 수 있다!"를 몸소 보여주신 분을 만나러, 2022년 9월의 어느 날 양재 나다움한의원에 모였습니다! 중의대와 한의대를 모두 졸업하고 창업까지 해내시는, 열정 가득한 박주연 원장님과의 인터뷰, 지금 시작합니다!! 





Q. 안녕하세요, 원장님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A. 안녕하세요, 저는 양재동에서 나다움한의원을 운영하고 있는 한의사 박주연입니다. 
저희 한의원에서는 통증 위주의 침, 부항, 추나치료도 하면서 또 반특화 영역으로 여드름 탈모 리프팅 동안침도 하고 있어요.  


들어가자마자 "우와~ 예쁘다~"를 남발했던, 한의원 내부 모습!


Q. 요즘 원장님의 하루 일과 그리고 일주일 일정이 어떻게 되는지 궁금합니다. 

A. 출근하고 퇴근하면 사실 하루가 거의 다 가잖아요. 또 지금 거의 주 6일 근무를 하고 있어요. 그래서 요즘 퇴근 후에는 휴식을 취하고 운동을 하거나, 아니면 번역을 하죠. 
 

Q. 그렇군요. 요즘 어떤 책을 번역하고 계신가요? 

 중국의 황황 교수라고 들어보셨죠? 경방의안을 내신 분이요. 그분의 최신 서적을 번역하고 있고, 아마 내년 초쯤 나올 것 같아요. 






중의대 생활 

북경 중의 대학교


Q. 중국 유학을 결심하신 계기가 있으셨나요?  특히 중의대로 가기로 결심하신 계기가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A. 원래 중의대가 목적은 아니었고요. 사실 중국 유학을 갔다가 미국 유학을 원래 이어서 가려고 했었거든요. 그때는 막 중의대 붐이 일 때였어요. 드라마 허준이 흥행했던 시절이라, 한국에서도 중의대 유학 붐도 막 불었죠. 지인분께서 북경 중의대를 들어가셔 가지고 저에게도 이런 길이 있다며 권유를 해주셔서, 그렇게 입학하게 된 것 같아요. 사실 예전에는 한의대 졸업 후에 중의대로 유학하는 분들이 되게 많았어요. 2000년대 초반에 되게 많았다가 2010년 이후에 유학 가는 사람이 거의 없어지고, 지금 북경 중의대에는 한국인 학사는 거의 없고 석사분들만 조금 계실 거예요. 아무튼, 솔직히 처음에는 잘 모르고 들어가게 되었지만, 막상 공부를 해보니까 정말 재미있다고 느낀 것 같아요. 


 Q. 중의대와 한의대 커리큘럼은 어떻게 다른가요?

A. 기본적으로 커리큘럼 자체는 한의대는 6년제인데 중의대는 5년제예요. 다만, 어차피 중의사 면허를 따려면 졸업하고 1년을 실습을 해야 돼서 결국 6년을 하긴 해야 되지만, 기본적으로는 6년 과정을 5년 안에 압축해서 배우고 실습을 1년을 더 하는 시스템이에요. 그래서 더 학기 중 일정이 힘들고 방학이 한 3주~4주 정도밖에 안 되는 것 같고요, 5학년 때는 그나마 방학도 없었어요. 되게 타이트한 커리큘럼이어서 바쁘긴 했지만 재밌는 것도 많이 하긴 했어요. 

한의대만 특히 강조하는 부분이 있다면 원전인 것 같아요. 원광대에서는 원전을 2년 가까이 배웠지만, 중의대에서는 한 학기만 배웠어요. 그마저도 의고문(醫古文)이라는 책으로 배웠는데, 여러 의서에서 중요하고 유명한 문장들을 모아놓은 일종의 서머리 같은 책으로 딱 한 학기만 콤팩트하게 배우고 넘어갔어요. 

중의대에는 실험 같은 수업도 많았고, 한의대 커리큘럼보다 조금 실용적인, 임상에서 바로 활용할 수 있는 수업이 많았던 것 같아요. 


Q.  한의대 커리큘럼보다 임상적인 부분의 학습량이 더 많다고 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중의대에서는 어떤 부분을 더 많이 배우나요? 

A. 사실 저는 한의대에 와서 내경이랑 주역을 처음 봤어요. 중의대에서는 임상 과목 위주로 배운 것 같고, 양방 과목을 더 많이 배워요. 거의 어떤 학년은 양방 과목이 거의 반 정도 될 정도로요. 
아무래도 중의사는 양약 처방이나 진단 기기 사용이 모두 다 가능하기 때문에 그런 부분에 대한 수업량도 많은 것 같아요. 중의대는 과목 수가 한의대보다 많고, 수업도 많고, 아침 수업이 8시에 시작하고 그래서  힘들었던 것 같아요. (웃음)

실제로 중의대는 임상과목도 좀 더 다양하게 세분화되어 있어요. 한의대에서는 한방안이비인후피부과잖아요,  중의대에서는 중의 이비인후과와 서양 이비인후과로 나눠서 가르쳐요. 진단학, 내과학의 경우에도 서의 내과학 서의진단학 과목이 따로 있죠. 

중의대의 엄청난 학습량이 느껴집니다...! 


Q. 중의대 졸업 후 중의사 면허 합격률은 얼마나 되나요? 

A. 중의대는 면허 합격률이 한 30% 밖에 안 돼요. 거기는 워낙 이제 입학 인원도 많고 학생도 많고 하다 보니까 다 붙여줄 수가 없죠.  

아까 중의대는 5년 후에 실습 1년을 해야 한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5년 과정을 마치고 곧바로 면허 시험을 치지 않고 석사 3년을 하면, 1년 실습하는 기간을 면제시켜주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실습 대신 석사를 하는 경우도 많은 것 같아요. 중국은 특이한 게 학사보다 석사가 훨씬 많아요. 한의대와는 완전 반대죠. 중국은 양한방 교차 면허가 되기 때문에, 중의대 졸업 후에 양방으로 방향을 아예 바꿔서 가는 친구들도 많은 것 같아요. 그리고 기본적으로 연구를 되게 많이 해요. 석사를 하면서 실습 경험도 더 쌓고 그러는 것 같아요. 5년 학부과정을 하고 바로 석사 3년을 마치고 좀 본인이 준비가 됐을 때 시험을 보는 그런 경향이 좀 있습니다. 
 

Q. 실제로 중의대 생활하시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A. 솔직히 얘기하면 좀 생활하기에 외롭고 공허한 점이 어려웠던 것 같아요. 사실 언어의 장벽에서 오는 어쩔 수 없는 중국인과의 갭이 있거든요, 문화도 그렇고요. 그래서 성적도 아무래도 중국 학생들이  더 높은 경우가 많고 외국 유학생들이 한 6~70점대에 가장 많았던 것 같아요.  


중의대 재학 당시 공부하셨던 모습입니다! 


 
 Q. 그럼 당시 북경 중의대에 외국인 비율은 얼마나 되었나요?
 A. 외국인이 저희 때 되게 많아가지고 한 반에 절반 정도였던 것 같아요. 한국인만 있었던 건 아니고 남아메리카 유럽 호주 미국 등등 다양한 나라에서 온 유학생들이 많았어요. 


Q.  정말 다양한 외국인들이 중의대 생활을 하고 같이 졸업을 하게 되네요. 그렇다면 중의대 졸업 후에 유학생들의 진로가 어떻게 되나요? 

A. 유학생들은 사실 이제 각자 본국으로 돌아가는 경우도 많아요. 다만 다시 한국으로 들어오는 경우는 중의사 면허가 인정이 안되니까 아예 중의학을 좀 포기하게 되는 경향이 있죠. 그래서 아예 다른 진로방향을 선택하시는 분도 있고, 저처럼 한의대로 다시 들어가시는 분들도 있고요. 

한국이 아닌 다른 외국으로 가게 되어도, 어쨌든 외국 면허 시험을 다시 봐야 되거든요. 미국에서는 usmle를 칠 수 있긴 한데, usmle 같은 경우는 거의 시민권자나 영주권자 위주로 볼 수가 있으니까, 사실 어렵긴 해요. 외국인인데 중의사 면허만 있는 상태라면 거의 3차에서 native가 아닌 이상 어려운 부분이 많아서 탈락하는 경향이 많은 것 같아요. 한국인 유학생 중에서는 최종 합격하신 분을 딱 한 분 봤어요. 

어쨌든 유학생 동기 중에는 해외에서 침구사 자격증을 따서 개원한 친구도 있고, 그냥 페이 닥터로 일하는 경우도 있어요. 제 친구들 중에 해외에서 개원한 경우는 미국에 두 분이 있고 캐나다도 있고 호주에도 이렇게 있어요. 해외는 침 수가가 되게 비싸서 한 번 침 맞을 때마다 100불 넘게 받는 경우도 있고요. 외국생활이 살기 편하고 환경이 더 나을 수도 있겠지만 친구들이 외국생활을 외로워하는 경우도 종종 봐서 장단점이 있는 것 같아요. 


Q. 중국 유학 시절로 돌아가신다면 도전해보고 싶은 게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A. 그때 당시에는 외롭고 그냥 커리큘럼 따라가기가 바빠서 다른 데 신경을 못 썼지만 거기서 사업을 하나 할 걸. 이런 생각이 지금 와서 좀 들어요.  가게라도 하나 오픈해볼걸 이런 생각이요.  되게 많이 배웠을 것 같거든요, 사업적으로. 실제로 유학생들 중에서 북경에서 작은 옷가게 오픈해 보신 분도 있었고 카페나 아니면 한국인 식당 이런 걸 오픈해 보신 적도 있으셨거든요. 그래서 저는 꼭 요식업이나 의류 분야가 아니더라도 뭔가 더 역동적인 나만의 사업을 해봤으면 어땠을까 싶어요. 


Q. 지금 한국에서 임상 한의사로 진료를 하고 계시는데, 중의대 유학의 경험이 현재 어떤 도움이 된다고 느끼시나요? 

A. 제가 지금 활용하고 있는 치료 방식들이 중국에서 봤던 방식을 사용하는 게 되게 많아요. 제가 한국에서는 부원장 생활을 짧게 1년 정도만 했기 때문에, 한국 한의사들이 일반적으로 활용하는 침, 뜸 치료 방식보다 중의대에서 배웠던 부분들에 더 익숙한 편이에요. 예를 들어서 중국은 불부항을 하는데, 지금 저는 모든 분들에게 불부항을 다 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불부항을 종종 사용하고, 그다음에 중국에서 보고 배웠던 것들을 나름대로 아이디어로 녹여가지고 사용하는 것도 있기는 해요 지금도. 


Q. 중의학과 한의학을 모두 겪어본 사람으로서, 한의학이 가지는 강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A. 시대 흐름에 맞추어 현대적으로 세련되게 해석하는 건 오히려 한국이 훌륭하다고 생각해요

뜸 같은 경우도 사실 한국에서는 전자 뜸을 많이 쓰고, 요즘은 맥진기나 초음파도 도입하려고 하잖아요. 그런 현대적인 기기는 한국이 정말 강점인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유학하던 당시만 해도 중국은 진짜 옛날 전통 침법 그대로 고집하는 분위기였어요. 침관도 사용하지 않고 침을 소독해서 재사용하거나, 굉장히 원시적인 형태로 침을 놓고, 유리 부항으로 사혈하고 소독해서 재사용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리고 중국은 인구도 많다 보니, 굉장히 주관이 뚜렷한 중의사분들이 많으세요.  실제로 기억나는 한 분은 태계혈 딱 한 군데, 발 안쪽 복숭아뼈 아래에 있는 혈자리 한 군데만 자침 하고 모든 병을 다 치료한다고 보는 분도 계셨어요. 이런 유명한 분들께 치료를 받거나 참관을 하려면 돈도 많이 줘야 하고 아침 일찍부터 기다려야 하는 경우도 많았던 것 같아요.  분위기가 굉장히 특이하죠 (웃음) 


최근에는 전자 뜸도 한의원에서 많이 활용되고 있습니다  




한의대 생활

Q. 한의대에 다시 입학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A. 음, 우선은 외로움이 가장 컸던 것 같아요. 사실 원래는 졸업하고 미국을 갈까도 고민을 했었는데,  개인적으로 이제 더 이상 외국 생활을 못할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한국에 와서 내가 그래도 공부했던 걸 살리려고 한의대를 다시 가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Q. 한의대 재학 시절 어떤 학생이셨는지 궁금합니다.

A. 아무래도 중국에서 국시를 한번 치고 왔기 때문에 사실 한의대 커리큘럼 자체나 공부 자체가 어렵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공부 이외에 다른 것들에 눈을 많이 돌렸던 것 같아요. 대외활동을 정말 많이 하고, 이것저것 딴짓도 참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실제로 지방일수록  해당 지방 내에서 학생창업을  육성하기 위해서 더 기회가 많은 경우가 많았어요. 저는  특히 창업 지원 프로그램에 지원해서 제주도까지 가서 발표도 하고 그랬던, 활발한 학생이었던 것 같아요. 


Q. 한의대생 시절 가장 큰 도전 혹은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창업 이외에 또 있으시다면 무엇이었는지 궁금합니다

A. 본과 1학년 때였던 것 같은데, 원전학 교실에서 대구한의대 학생들과 함께 중국에 간 적이 있었어요. 대구한의대 원전학 교수님과 우리 학교 원전학 교수님이 몇 명씩 학생을 데리고 가셔서 상해 지역을 전부 돌아다녔어요. 주단계(朱丹溪)의 묘도 가보고 섭천사(葉天士)가 예전에 살던 집도 가봤어요(웃음). 중의학 박물관 같은 곳은 저의 경우에는 중의대를 다녔기 때문에 익숙했지만, 한의대 학생들에게는 그렇게 직접 가보는 경험이 중요한 것 같아요. 구경만 하면 아쉬우니까 여행 중에 학생들이 하나씩 리포트를 작성해서 발표하는 시간이 있었어요. 저는 그때 화침에 대해 발표했었는데, 그 리포트를 그냥 두기 아까워서 논문으로 다듬고 교내 논문제에 제출해서 상을 받았어요. 별거 아닌 것 같지만 그 당시에는 그런 것들 하나하나가 나름대로 성취감이 느껴지고 뿌듯했어요. 그렇게 작은 것들이 쌓여서 스스로가 성장할 기회가 되기도 하는 거니까요.



Q. 그럼 중의대를 졸업한 후에 한의대 생활을 하시면서 학업적인 어려움은 없었나요?   

A. 한의대 공부가 딱히 어렵지는 않았고, 오히려 더 편했어요. 국시도 사실 또 보는 거 한 번 봤던 걸 또 본 거였기 때문에 그렇게 에너지를 많이 쏟지 않았던 것 같아요. 중국은 중의사 면허 시험이 독특한 게, 약재 구성, 귀경 이런 거를 다 외워야 돼요. 300개 이상의 처방의 모든 약재 구성, 그람수 이런 걸 또 다 외웠어야 했어요. 이 모든 것들을 달달 외운  상태에서 한의대 들어갔으니 사실 많이 어렵지는 않았어요. 

한 가지 익숙지 않았던 분이 있었다면 사상 체질의학이었어요. 중국에는 체질의학이라는 게 없어요. 중국은 거의 변증 시스템이라 환자를 진맥하고 진단하고 거기에 맞게, 증에 따라서 약을 쓰고 처방을 다 작방을 하거든요.  그래서 한의대에 들어와서 사상 체질 의학을 처음 배운 거라 낯설게 느껴졌던 것 같아요. 



창업을 시작하다 


Q. 원장님의 창업 스토리에 대해 여쭤보고 싶은데요.  구체적으로 어떤 아이템으로 창업을 하셨는지,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A. 한의학과 안에 좀 활동적인 친구들의 모임이 있잖아요. 그 친구들이랑 뭔가를 같이 해보자고 서로 이야기를 하다가 이번에는 창업을 해보자 싶어서 교내 창업경진대회에 나가게 됐죠.  

저희가 처음부터 잘 된 건 아니었어요. 처음에는 뭘 할지 고민하던 중 한약의 제형을 패치로 바꾸는 아이디어를 내서 경진대회에 나갔는데 그것만 가지고도 상을 받았어요. 그 당시만 해도 한의대생이 창업하는 게 희귀할 때라서 상을 쉽게 주신 것 같아요. 

이를 계기로 교외창업지원센터나 도에서 주최하는 경진대회에도 패치 관련 아이디어로 몇 번 나갔었는데, 한 번은 제주도까지 가서 발표까지 했는데, 초기에 탈락하기도 했어요. 바로 탈락한 이유가 분명히 있으리라 생각하고 원인을 고민해봤어요. 한약의 제형 변화는 사실 한의사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인데 일반인들이 이걸 그렇게 원할까, 그렇다면 어떤 목적으로 상품을 만들어야 할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죠. 


제가 그때 생리 전 증후군으로 굉장히 많이 고생하고 있었는데, 치료법이라고 할 게 딱히 없었어요. 산부인과에 가도 피임약 주는 게 전부거든요. 국내에 시판되는 생리 전 증후군 관련 약은 종근당에서 나오는 프리페민이 유일해요. 프리페민에는 바이텍스(Vitex)라는 성분이 들어 있는데, 호르몬 균형을 맞추기 위해 해외에서 자주 사용되는 성분이에요. 왜 한국에는 치료법이 이렇게 없을까, 하다가 바이텍스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죠. 

바이텍스의 종이 만형자(蔓荊子)와 매우 유사하거든요. 그 점에 착안해서 생리 전 증후군에 쓰이는 한약재들을 찾아보고 여러 가지 연구를 해봤죠. 그 후에 어떻게 하면 이 약이 일반인들에게 쉽게 다가갈지 고민하던 중 예전에 패치를 개발했던 경험을 살려 패치에 접목했죠. 


(주) 한스메디의 월경통/월경전증후군 관리를 위한 일회용 패치형 의료기기



이 아이디어로 여러 창업경진대회에서 상을 받았고, 3천만 원을 지원받는 시제품 제작 프로그램에도 선정되었어요. 이후 시제품을 만들고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1억 원 상당의 사업에도 선정되었고, 이 과정을 좋게 봐주신 분들이 개인 투자도 해주셔서 사업을 키워나갔어요.


한의대생 시절 창업에 뛰어들어 의료기기를 개발하셨다고 해요! 



Q. 현재도 사업을 이어서 하고 계신가요? 

A. 아쉽게도 저희가 작년 말에 폐업을 결정하게 되었어요. 같이 창업한 멤버들 중 공보의를 간 친구도 있고 현재 개원을 한 친구도 있다 보니, 사업이 나름 성장하고 있었는데 각자 일이 생기고 나서는 병행이 정말 어려워졌어요. 외부 인력도 고용하고, 사무실도 구해봤지만 아무래도 한계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과감히 포기했지만, 미련이 많이 남아서 사실은 포기하기까지도 1년 정도의 시간이 걸렸어요. 정말 아쉬움이 많았지만 그래도 내가 지금 쥘 수 있는 걸 쥐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나중에 또 기회가 있을 테니 지금은 선택과 집중을 하자는 생각으로 과감하게 포기했어요.



Q. 임상진료를 하면서 동시에 나만의 제품을 개발하고 싶은 한의대생, 한의사분들이 많이 계실 것 같은데요실제로 제품을 개발해보신 입장에서 느낀 점이 있으신가요? 

A. 저는 상품을 만드는 과정에 몇 번 참여해보았기 때문에 그 과정을 아는데, 결코 쉽지 않고 기간도 오래 걸려요. 허가도 받아야 하고, 공장에도 직접 여러 차례 가봐야 하죠. 게다가 박스 디자인도 만들어야 하고 MOQ(최소 주문 수량)도 맞춰야 해요. 이런 과정에서 끝없이 거래를 계속해야 하기도 하죠. 시간이나 의욕도 문제지만, 비용의 경우도 많이 신경 써야 했어요. 제가 어떤 상품을 공장에서 만들고 싶어도 소량으로 만들 수 없고 최소 단위 이상으로 만들어야 하므로 비용도 많이 투자해야 했거든요. 

또 어떤 부분은 허가받기가 정말 어려워요. 저희는 의료기기로 허가를 받았지만, 그것도 무지 힘들었어요. 우리가 흔히 건강기능식품이라고 부르는 것 하나를 만들려 해도, 새로운 성분으로 만들어 출시하려면 어마어마한 임상시험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절대 쉬운 과정이 아니에요. 특히나 새로운 성분으로 제품을 만들려면 임상시험을 해야 하기 때문에 너무 많은 비용이 들고요. 


한의사가 만든 화장품이나 건기식이 잠깐 뜨긴 하지만 장기적으로 성공한 것은 많이 보지 못했어요.

가장 쉬운 방법은 기존에 판매되고 있는 성분으로 건기식을 만들고, 이미 시중에 나와있는 의료기기를 판매하는 것이지만, 저희는 나름대로 욕심이 있었기 때문에 포장만 바꿔서 출시하기는 싫었어요. 저희 말고도 신제품을 출시한 한의사분들을 몇 번 만나본 적이 있었는데, 결국 가장 중요한 단계인 마케팅이나 홍보에서 무너지시는 경우가 많으셨거든요. 그렇다 보니 사업이 절대 쉬운 분야는 아니죠. 


Q. 창업 과정에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과 가장 힘들었던 일은 무엇이었나요?

A. 보람 있었던 점은, 제가 사업을 쉽사리 포기하지 못한 이유기도 한데요, 제 아이디어가 실제 제품으로 구현된다는 게 너무 즐거웠고 보람도 많이 느꼈어요. 

다만 힘들었던 점은, 임상시험을 여러 차례 진행하며 데이터를 추출하고 통계를 내는 작업이 힘들었어요. 초반에는 추가 인력을 고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희가 일일이 참가자들에게 연락해서 데이터를 받아내야 했거든요. 한약을 투여하든 패치를 붙여서든 데이터를 뽑아야 하니까 때로는 어쩔 수 없이 굽신굽신 하면서 연락을 돌릴 때도 있었죠. 그 과정에서 말을 안 듣거나 제대로 한약을 복용하지 않으시는 분들도 있었어요. 또 한약 복용 중에 부작용을 보이시는 경우에도 직접 관리해야 했고요. 그렇게 참가자들을 일일이 상대하는 게 힘들었어요. 또 거래처에 뒤통수 맞은 경험도 있고요(웃음). 그럴 경우에 정말 뚜껑이 열리죠. 



Q. 학생 시절로 돌아간다면 바꾸고 싶은 아쉬웠던 점이 있으신가요말씀해주신다면 창업하고 싶어 하는 한의대생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요

A. 물론 그때는 그것이 최선이었겠지만, 상품성을 더 높이고자 하는 욕심이 있어요. 그때 만든 것을 지금 보면 정말 허접해 보이고 아쉬운 점도 많거든요. 만약 그때로 돌아간다면 더 상품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노력해서 웰 메이드 제품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또 한의대생들이 마케팅이나 홍보 쪽으로도 무지할 수밖에 없는데, 그쪽 분야 지식이 너무 없어서 이 단계에서 무너지는 경우가 정말 많아요. 한의사들도 마찬가지고요. 저희도 더 공부하고 업체에 시장조사를 맡겨서 진행해보기도 했지만, 한계가 있었어요. 그래서 그때로 돌아간다면 마케팅과 홍보 분야를 더 잘 준비해서 여러 가지 시도를 해봤을 것 같다는 후회가 있네요.





Q.  인생 그래프를 그린다면 가장 업이었을 때와 가장 다운이었을 때 각각 어떤 시기였는지 궁금합니다.
 
A. 환경에 큰 변화가 있을 때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서 되게 본인한테는 되게 그게 업이 될 수도 있고 다운이 될 수도 있잖아요. 그런 맥락에서 중국 유학 가기 직전 그다음에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그때가 좀 힘들었던 것 같거든요. 왜냐하면 격변의 시기였고 적응을 해야 되는 시기니까 그때 이제 내가 처음에는 이제 중국에 와서 뭘 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 그리고 한국에 들어왔을 때도 한국에서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이런 거에 대해서 좀 깜깜했던 그런 시기가 분명히 있었고 그때가 좀 힘들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UP의 시기는, 아무래도  한의대에 들어오고 나서부터 계속 UP이었어요. 


Q. 한의대 생활이 모두 up이었다니, 너무 좋네요. 어떤 점 때문에 계속 업이라고 생각하셨나요? 
 
A. 어떤 순간이라기보다는 그냥 내가 그냥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된 것 같아요. 나아가는 사람이 된다는 건, 작은 일들이 쌓여서 그게 형성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학교 다닐 때는 크고 작은 좌절도 있었고 스트레스도 많았지만 작은 성취들이 쌓여서 결국에 넘어져도 앞으로 넘어지는 사람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학교 생활을 뒤돌아보면 순간순간에는 내가 멈춰 있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조금조금씩 진짜 개미만큼이더라도 앞으로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고 있었던 것 같아요.  


Q. 한의대생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어떤 건지 궁금합니다.
 
A. 제 유튜브에서도 한번 얘기를 했던 것 같은데 워낙 주변 상황이 요즘 되게 힘들잖아요. 많은 것들이 격변하는 시기이고, 한의학에 대한 무분별한 비판들도 많은 상황이지만 이런 말들에 흔들리면은 본인만 힘들지 않을까 생각해요.  현재에 집중하고 미래를 구상하고,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가 중요한 거죠. 물론 이제 졸업을 하고 다른 분야로 갈 수도 있겠지만 지금 선택한 이상 앞으로 나아갈 궁리를 하는 게 조금 더 현실적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사실 코로나 이후에 모든 사람들이 삶을 살아내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은 맞지만, 제가 봤을 때는 한의학은 계속 찾는 분들이 계속 있어요. 저희 한의원도 그렇게 노인 환자분들이 많지도 않고 젊은 분들도 계속 찾으시고요. 병원이나 다른 것으로 분명히 채워지지 못하는 부분을 한의학이 맡고 있는 것이 있기도 하고, 한의학이 앞으로 확장할 수 있는 분야가 되게 많다고 생각이 들어서 전 그래서 더 재밌는 것 같아요

Q. 이제 앞으로 원장님이 하시는 일이 세상을 어떻게 바꿀까요.  원장님의 이제 다음 future step이 너무 궁금합니다.

A. 다른 형태의 병원도 해보고 싶고 중국에도 뭔가를 하나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우선은 이제 이 한의원을 더 성장시키는 데 집중을 할 예정이에요. 하지만 사실 저는 평생을 개원의로 살고 싶지는 않아요.  나중에는 사실 제가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다른 분야의 사업을 조금 하지 않을까 싶어요.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자꾸 흥미가 가는 거 보니까 사업할 것 같아요. (웃음) 


Q. 마지막으로 저희 대만드가 다음에 만나보면 좋을 분이 있다면 추천 부탁드립니다.
 
A. 대구 이웃집 한의원의 정규석 원장님 추천드립니다. 조소금 내과학, 조소금임증험안정선 번역하셨고,  신장병 연구소를 따로 하고 계세요. 근데 우리나라에서 신장병 한방 치료를 하시는 분이 거의 없거든요. 손에 꼽을 정도인데 그중에서도 꽤 오래 하셨고 정말 잘하세요. 

그리고 본인이 중의대도 직접 실습도 갔다 오셨어요. 정말 에너지가 넘치시는 분이기 때문에, 추천드립니다. 






하고 싶은 게 있다면 생각에 그치지 않고 바로 실천하시는 모습, 넘어져도 앞으로 넘어져야 한다는 말이 인상 깊었던 인터뷰였습니다. 졸업을 앞두고 다양한 진로 고민이 많은 시기이지만, 이번 인터뷰를 마치면서 저절로 '나도 할 수 있겠다!'는 긍정적인 생각이 마음속에 가득 찼던 것 같았습니다.
귀한 시간 내어 인터뷰에 응해주신 양재 나다움한의원 박주연 원장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Interviewer : 펭귄, 기린, 낙타, 갈매기 

Writer & Editor : 펭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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