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멜버른의 상모 버스커
지난 몇 년간 인사동에서 버스킹을 하며 한국분들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를 꼽으라고 하면, 단연, 아래의 두 질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거 왜 하는 거예요?”
“이거 해서 돈은 돼요?”
참으로 이상하다.
내가 호주에 있을 때에는 아무도 나에게 이 버스킹을 왜 하냐고 물어보지 않았다. 이것을 해서 돈이 되느냐고도 물어보지도 않았다. 다만, 당신은 어디에서 이 춤을 배웠으며, 언제 어떠한 계기로, 어떻게 이 버스킹을 시작하게 되었냐고 물어보곤 했다.
왜 버스킹을 하느냐?
어떻게 버스킹을 시작하게 되었느냐?
두 질문의 류는 비슷하지만, 결은 달랐다. 특히나, 질문을 받아들이는 이, 그러니까 두 질문을 받아들이는 나의 기분은 두 도시에서 확연히 달랐다. 아마도 이것은 상대에 대한 예의와 존중의 문제와 관련된 것 같았다. 버스킹을 왜 하느냐는 질문. 그 질문은 “나”라는 한 명의 버스커에 대한 궁금증이라기보다는, 돈이 되지 않는 일을 굳이 이 좋은 날씨와 귀한 시간에 땀까지 흘려가며 왜 하고 있느냐는, 한심의 눈빛과도 같은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모든 사람의 모든 행위를 경제적으로밖에 설명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우리가 아무리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살고 있다고 하지만, 누군가의 행동을 돈이 되느냐, 돈이 되지 않느냐로만 해석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한 경제 논리대로라면, 경제적 능력이 없는 비경제활동인구는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변신>에 나오는 벌레와 다름없는 존재로 해석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은 왜 타인에 대한 응원과 격려와 공감과 존중에 그토록 각박한 것일까? 먹고살기가 힘들어서? 그렇게 긍정적이고 낙천적으로 살기에는 우리 사회가 너무나도 치열하고 약육강식이라서?
길거리에서 춤을 추고 있는 댄서가, 돈도 안 되는 저 춤을 대체 왜 추고 있는 건지 궁금하시더라도, 부디 그에게 한마디 말을 건네실 때에는 그에게 힘이 되고 용기가 되고 격려가 되는 이야기를 해주셨으면 좋겠다. 정말로 먹고살기 위하여 거리로 나오는 생계형 버스커, 예술가도 있겠지만, 이 세상에는 돈이 아닌, 또 다른 무언가를 위해 거리로 나오는 버스커와 예술가들도 있기 때문이다.
내가 멜버른에서 버스킹을 하며 외국인 분들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를 꼽으라고 하면, 단연, 아래의 두 문장일 것이다.
“당신은 이 도시를 웃게 해요.”
“오늘 하루는 매우 힘이 든 하루였는데, 당신을 보니 기분이 좋아졌어요.”
그 두 마디 문장을 들으면, 나는 나의 종아리와 발바닥이 아픈 것도 잠시 잊고, 행복함에 다시 춤을 추었다. 이것이야말로 긍정의 연쇄 효과가 아니었을까? 나의 춤을 본 시민은 기분이 좋아져 나에게 칭찬을 하고, 그 칭찬에 신이 난 나는 멜버른의 시민들을 또 즐겁게 만든다.
두 나라, 두 개의 도시에서 춤을 추는 한 명의 버스커가 있다.
같은 사람의 같은 춤, 같은 공연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그리고 서울의 사람들은 그 버스커를 <돈을 벌러 거리에 나온 춤추는 인형>쯤으로 간주한다. 반면에 호주, 그리고 멜버른의 사람들은 그 버스커를 <도시를 즐겁게 하는 한 명의 예술가>로 인정하고 존중한다. 서울과 멜버른, 이 두 도시에서 춤을 추는 버스커가 과연 두 도시 중 어느 도시를 더 아끼고 사랑할지는 보지 않아도 뻔해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호주의 멜버른을 예술과 문화와 축제의 도시라고 부른다. 확실히 멜버른에는 수많은 예술 행사와 세계적인 문화 행사와 다채로운 이벤트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단순히 그러한 행사들을 이 도시에서 주로 개최한다고 하여, 이 도시가 예술과 문화와 축제의 도시로 불리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곳, 그 나라, 그 도시에는 그 도시의 예술과 문화와 축제를 즐길 준비가 된, 그 도시의 예술과 문화와 축제에 걸맞는 사람들이 있다. 그곳 멜버른 사람들에게는 (한국에서는 제법 찾기 힘든) 삶의 여유와 젠틀함, 타인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있다. 내가 멜버른이라는 도시를 사랑하는 이유이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멜버른에서 춤을 추며, 행복함을 느꼈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나 자신을 여지껏 "멜버른의 상모버스커"라고 소개하는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