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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배 Aug 06. 2023

거리에서 공연의상을 갈아입는다는 것

<나는 멜버른의 상모버스커> 그리고 그로부터 10년 뒤의 이야기

나의 버스킹 루틴 중 하나는, 거리에서 공연복을 갈아입는 것이었다. 10년 전에 나와 함께 유럽여행을 다녀왔던 명헌은 이렇게 말했다.

“행님, 거리에서 준비 쫌 하지 말고, 제발 딴 데서 준비 다 하고 나서 공연하러 좀 나와요. 이거 혼자서 사람들 다 기다리게 하고 쫌 안 그래요?”

하하하.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에펠탑 앞에서 옷을 갈아입고 스피커 세팅을 하고 있는 동안 수십의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나의 영상을 찍으러 동행한 명헌으로서는 그 자리가 충분히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제 버릇 남 못 준다고, 10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여전히 거리에서 옷을 갈아입고, 거리에서 상모를 매고, 거리에서 삼색띠를 묶는다. 거리에서 옷을 갈아입는다고는 적었지만, 물론 그렇다고 하여 남들에게 나의 속옷까지 보인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속바지를 입은 상태에서, 지금 입고 있는 청바지만 민복 바지로 갈아입는 것이고, 반팔 티셔츠를 입은 상태에서 겉옷을 벗고 민복 저고리로 갈아입는 것이다.


거리에서 옷을 갈아입는다는 것! 그것은 나에게 수영선수가 본격적인 수영 경기에 앞서 준비체조를 하는 것과 같고, 수영장의 물을 손으로 조금 떠서 자신의 몸을 살짝 적시는 것과 같다.

나는 거리에서 옷을 갈아입으며, 오늘의 날씨는(특히나 바람은) 어떤지, 오늘의 거리 분위기는 어떤지, 그리고 나의 주위에는 어떤 버스커가 공연을 하고 있으며 그들의 앰프소리가 나의 공연에 영향을 주는지 등을 체크한다. 그러면서 서서히 오늘의 거리의 분위기 적응하고, 그 분위기에 스며든다.


내가 거리에서 옷을 갈아입는 이유에는 하나의 광고요, 예고편의 효과를 기대한 것도 있다. 내가 거리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으면, 나의 공연이 궁금한 사람들은 자신의 가던 길을 멈추고 가만히 나의 공연을 기다려 주었다. 그러면 나는 그들과 소소한 대화들을 이어나갈 수 있었는데, 그 소소한 대화들은 나의 공연 전 긴장감을 누그러트리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나의 준비모습을 본다는 것, 그것은 그들에게도 하나의 볼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설령 그게 아니었을지라도, 그렇게 믿고 싶다. 하하하) 낯선 동양인이 호주의 도심 한복판에서 자신의 나라의 전통의상을 갖추어 입는 모습, 그 모습은 결코 쉽게 볼 수 없는 일일 테니까 말이다.


나의 공연에 최소로 필요한 복장 및 소품은 다음과 같다.

[ 민복 상의, 민복 하의, 검정색 더거리(민복 위에 입는 겉옷), 삼색띠, 미투리(신발), 흑포(검정 두건), 백끈, 꽃천, 상모(벙거지+진자+물채), 소고, 소고채 ]

대학교에서 동아리의 공연을 했을 때에는, 전통이라는 이름 하에 하얀 양말과 하얀 속옷, 하얀 티셔츠를 입을 것을 강요받았다. 하지만 나는 하얀 양말과 하얀 속옷, 하얀 티셔츠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다. 하얀 속옷이 없기도 하거니와, 어차피 민복을 입으면 나의 티셔츠와 속옷 색깔 따위가 누구에게 보여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하얀색 민복을 아래위로 입고, 검정색 더거리를 걸친다. 그리고 삼색띠를 하나씩 매는데, 노란띠부터 왼쪽어깨에서 오른쪽 허리로 늘어지게 리본 매듭을 짓는다. 그리고는 그 노란띠 바로 위에 파란 띠로 같은 리본 매듭을 짓는다. 빨간색 띠는 어깨에 매지

않고 허리춤에 차는데, 이때 띠가 헐거워지지 않도록 숨을 참고 허리를 최대한 가늘게 하여 타이트하게 묶는 것이 중요하다. 이 과정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공연 중에 삼색띠가 풀려, 삼색띠를 밟고 미끄러 넘어질 수도 있다. 빨간 띠가 잘 묶였으면, 처음에 묶었던 노란띠와 파란 띠를 빨간 띠와 허리춤 사이에 넣어 모양새를 다듬는다.


복장을 다 갖추었으면, 이제는 상모를 맬 차례다. 먼저 흑포를 머리에 묶는다. 이때 흑포가 흘러내리지 않게 최대한 세게 묶는 것이 중요하다. 흑포가 흐물흐물하게 묶여져 있으면, 상모를 아무리 타이트하게 착용했더라도 흑포가 따로 놀아 턱끈이 다 풀리게 된다. 흑포를 맨 후에는 벙거지의 턱끈을 최대한 타이트하게 묶는다. 숨쉬기가 버거울 정도로 묶을수록 상모를 돌리기에 용이하다. 그리고 나서는 백끈으로 이마를 둘러 벙거지가 앞뒤로 움직이지 않게 고정시킨다. 그리고는 그 위에 꽃천을 얹어 벙거지가 흔들리는 것을 2차로 예방한다.


옷도 다 입었겠다. 어느새 내 주위에는 나의 공연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여럿 생겨났다. 핸드폰과 스피커를 블루투스로 연결하여 노래를 미리 준비하고, 달러를 받을 모자도 관객들 앞에 살며시 내려놓는다. 가벼운 맨손 체조를 하고 난 후에야, 나는 수줍은 척 상모의 생피지를 살며시 촤르르 푼다. 탑 여배우의 긴 생머리도, 아마 이 때의 상모 생피지만큼은 감히 섹시하지 못하리라.

호주에서, 유럽에서, 그리고 한국에서 버스킹 활동을  한 지도 어느덧 어언 10년이 다 되어가지만, 나는 여전히 남들 앞에서 공연을 하는 것이 떨리고 긴장된다. 20년, 30년이 지나도, 아마 나는 여전히 그 설렘과 떨림, 긴장감을 즐기고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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