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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희 Aug 18. 2018

05 워킹맘의 저울질

Part1. 좌충우돌 직장생활


임신과 출산! 그 시선에 대하여 


봄이 시작되는 3월, 임신 8개월 차 

하루하루 무거워지는 몸으로 아침 일찍 출근버스를 타고 힘겨운 출근을 하고 있었다. 

그 기간 몸은 하루가 멀다 하고 무거워졌고, 컨디션은 늘 좋지 않았다.

입덧이 끝날 시점임에도  불러오는 배 때문인지 속은 늘 불편했고, 하루가 다르게 붓기가 심해지고 몸은 정상적이지 못했다. 그 기간 동안  팀원들의 배려와 어느 정도 회사의 이해를 받고 지내고 있었다.


아직은 쌀쌀한 날씨, 지난번 검사에 문제가 있어 재검사를 해야 한다는 산부인과의 전화를 받고 오전 진료를 급하게 가야 할 상황, 회사에 양해를 구한 후 병원을 들러 출근을 해야 했다.

그 날은 오후에는 중요한 결정사항이 있어 휴가를 내기가 어려웠다. 부서장님께 한 시간 정도 늦는다고 양해를 구했고 병원에 들렀다. 

주말부부였던 터라 무거운 몸을 이끌고 혼자 병원 진료를 가야 했고 혹시나 아이에게 문제가 있을까 마음은 늘 불안했다. 

한 시간 남짓 검사가 끝나고 잠시 휴식을 위해 병상에 누웠다가 서둘러 다시 회사로 향했다.  

아이와 나에게 힘든 검사였던지라 돌아오는 길 갑자기 편두통까지 동반했다.


‘엄마가 되는 일이 이렇게 힘든 거였구나.’ 


이렇게 하루하루 힘든 몸과 마음이 지속되던 임신기간이었다.

결혼 후 아이를 가진 주변의 지인들은 대부분 장기간 휴직을 하거나 일 년 정도의 육아휴직을 선택했다. 

다니던 회사의 휴직제도는 있었지만 긴 공백을 깨고 다시 제자리를 찾을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그 기간 부른 배와 지친 심신 그리고, 이후 전개될 현실적 문제에 대한 걱정으로 늘 불안한 나를 마주하고 있었다.

출산 후 육아를 위해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 시점이었다. 

긴 고민 끝에 출산 후 3개월 만에 복직하기로 마음을 먹었고, 육아와 일을 병행하기 위한 방법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육아를 위한 대안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언제나 일 번은 엄마!

딸 가진 죄인이라 하시던 엄마 난 또 엄마를 찾는다.

손 내밀면 제일 먼저 잡아줄 엄마, 무언가 문제가 생기면 도와줄 것 같은 엄마였다. 맡겨놓은 것도 아닌데 말이다. 

보증수표처럼 나에게 엄마는 달려가면 손잡아주고 안아주는 그런 존재였고, 40년 넘게 살아오고 있는 지금도 받은 은혜는 갚을 길이 없어 보인다. 

그다음 방법, 육아에 도움을 줄 사람을 찾는다. 

두려움과 걱정이 앞서는 말이다. 

지방에서 올라와 가까운 친척도 없는 나는 말도 못 하는 갓난쟁이를 모르는 누군가의 손에 덥석 맡기고 돌아설 자신이 없었다. 

세 번째 방법, 장기 육아휴직 후 일에 복직을 한다. 

마지막 방법은 나 자신에 대해 확신도 자신감도 없는 선택이었다.


‘나 없는 1년, 다시 돌아올 자리가 없어지는 것은 아닐까?’


임신을 하고 있던 시기 몸의 변화보다 더 무서운 것이 감정적 변화였다. 

그 기간을 보내면서 상사의 작은 발언 하나에도 나는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임신한 여성에게 부여하지 않는 일들에 대해 배려를 받는 것이 나에게 감사한 일이면서도  또 다른 측면으로 나를 뒷자리로 밀어내는 듯한 느낌에 불안했다. 


이런 감정적 변화는 심신의 변화가 많았던 그 기간에 내가 보인 나의 현실적 모습이었다.

그렇게 점점 나의 자존감은 바닥을 내보이고 있었고, 아이를 낳기 전과 후의 나를 비교해가며 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한 리스트를 체크하며 스스로 힘들어하는 시기를 보냈다. 


TV 드라마에서 만나는 슈퍼맘들을 떠올린다.

‘임신하고 일도 잘하고 애도 잘 낳고 육아도 잘해요~’

는 드라마나 각본에서만 존재하는 일이다. 

요즘은 그 후면의 현실들을 그리는 내용들이 요즘은 더 많이 방영되는 것 같다.

혼자서 일도 아이도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내는 슈퍼우먼이 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였다.

마음처럼 일을 할 수도 없었고 현재의 상황을 이해해주길 그리고 늘 배려받길 스스로 바래서도 안 되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여자로 엄마로 그 기간을 겪어 보지 않고서는 실제의 무게를 가늠하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가까운 미래를 위한 준비 


일은 철저히 관리하고 끝까지 마무리한다.

나는 늘 그런 마음가짐으로 살았다.

현재 나의 상황에서 나의 공백기를 잘 보내야 팀도 나의 위치도 잘 보장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 시기 두 명의 팀원들에게 일을 많이 일임하면서 업무분장을 하기 시작했다. 

하던 일을 넘기고 내가 없는 시기를 위한 대체 인력 충원을 준비했고, 새로운 일을  만들기보다는 현재 실행되는 일들을 문제없이 진행하고 처리할 수 있는 쪽으로 방향을 정했다.

긴 기간은 아니지만 3개월 동안 육아휴직 기간을 문제없이 운영하기 위한  업무 방향 세팅에 집중했다.

그 편이 나의 공백기에 발생할  문제점에 대해 미리 대처하는 방법이라는 생각 했다.


출산이 임박했던 시기, 퇴근길이었다. 


“박 팀장님, 아기 낳고 3개월이면 바로 오실 거죠?”

“네, 3개월 육아휴직 후 바로 오겠습니다.”

담당 부서장님의 질문에 대답을 하고 뒤돌아 나오면서 생각했다.

‘가능한 거지? 너? 다들 그렇게들 하니까. 너도 가능할 거야.’

‘그래, 그렇게 다시 돌아오는 거야.’


출산이 임박해 오면서 출산휴가를 냈고 아기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부지런히 했다.

신혼집이 없던 우리는 아파트를 구했고, 출산을 위해 필요한  물품들을  구입하러 만삭의 몸으로 다니며 바지런히 정리를 했다. 

출산준비를 하고 있던 중 예정일이 임박했을 때였다. 

엄마는 원래 오시기로 했던 날 보다 더 하루 일찍 오셨고, 할머니를 기다렸다는 듯 아기는 예상보다  일찍 세상을 만나러 나왔다.


드디어 출산, 나는 엄마가 되었다.

행복한 아기와의 만남, 세상에서 가장 경이로운 순간이었다.

그 간의 모든 복잡한 감정은 순식간에 눈 녹듯 사라지고 작은 생명과 마주하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선물 받았다.

아기의 울음소리, 인생의 또 하나의 행복이 되어준 아기와의 만남이었다. 

그렇게 한 달, 두 달을 보내며 출산 후 몸의 변화와 회복을 위한 일들을 하며 앞으로 3개월 후를 위해 몸과 마음을 준비해 갔다. 

몸과 마음을 정리하며 한 달, 낮과 밤이 없던 한 달, 그리고 일과 육아를 병행하기 위한 준비로 한 달을 보내며 슬슬 육아 전쟁의 서막이 오르고 있음을  스스로 느끼고 있었다.



육아의 시작


주말 부부였던 남편은 주말이면 아기를 보러 왔다. 

육아 휴직 기간이 끝날 무렵이었다.


“아기를 장모님 말고 자기가 키우면 안 될까?”


남편의 첫 번째 말에 나는 마음이 요동쳤다. 

실은 피해 가고 싶은 질문과 답이었다. 나는 일을 계속하고 싶었고 나의 생각과 그의 생각은 차이가 있었다. 

 나는 나의 일을 하며 평생을 살고 싶었다.

현실적으로 누군가 육아를 책임져 주지 않으면 나는 육아를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나는 몇 년이 될지 모를 육아의 시간을 위해 나를 시간을 보내야 할 것이다. 

현실적으로  우리 사회에서 육아를 책임져야 하는 위무는 엄마에게 더 많은 무게를 싣고 있으니  말이다.

고민을 하다 나는 고집을 세웠다.


“미안하지만, 육아는 엄마께 부탁하려고 해.”


왜 미안하다는 말이 먼저 나왔는지  모르겠다 생각하면서도 왠지 내가 미안해야만 하는 일로 보였다.


‘이런 내가 이기적인가?’ 


육아를 맡아달라는 남편의 말에 대한 고민을 했다.

나는 내가 행복한 순간을 찾으며 살아왔고, 그 순간을 놓았을 때 그 결핍이 줄 상황에 대해 나는 자신이 없었다

며칠을 잠 못 이루고 고민했지만 나의 마음속 결론을 정해 가고 있었다. 


결혼 전 일을 통해 성장하는 것에 나의 존재감을 찾고 행복감을 느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했고 가정을 이루었다. 

모두가 함께하는 가족이 된다는 부분에서 어느 부분에서든 서로의 희생이 필요하다.

그 희생은 각자가 아닌 함께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배려이고, 스스로 인정하며 받아들여야 그 결혼 생활이 행복할 수 있는 것이었다. 

출산과 육아의 시간을 지나오며 그 희생의 무게는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까지 여성에게 좀 더 많은 무게를 싣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실감했다. 


‘나 자신이 행복해야 가족에게도 행복을 줄 수 있다.’ 


나의 결론은 우리는 셋이 아닌 육아를 위해 넷이 되어 함께 살아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달 후 그는 지역을 옮겨 지방에서 경기도권으로 옮기며 우리는 하나, 둘도 아닌 육아를 위해 엄마와 함께 넷이 되어 함께 동거를 시작하게 되었다. 

앞으로의 많은 고민과 조율이 필요한 과정이 있음을 감지하며 말이다. 

그리고, 육아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배신감? No! 필요한  현실감!


출산 후 3개월 만에 복직을 했다.

나를 기다려 준 팀원들의 조촐한 파티와 환영회로 행복한 기분을 느끼며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업무에 임했다.


‘그래, 여기 내가 있어야 할 자리야.’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고 생각했지만 3개월 전과 현재는 같다고 할 수 없었다. 

쉽게 피곤해지고 수유를 계속하고 있었기에 3시간마다 비좁은 회의실에서 유축을 해가며 그렇게 또 육아와 일을 병행해야 했다. 

내가 선택한 시간이기에 누군가에게 힘든 내색도 할 수 없었고 그 시간을 견디고 이겨내야 했다. 


오늘은 회식이 있다. 모든 팀이 모이는 전체 회식자리이고, 아기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았고 평상시와 같지 않았다.

아직은 왠지 배려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잠시 나의 상황을 알기에 그 배려가 고맙기도 하지만 마음 한편은 왠지 편치가 않았다. 

그때는 자격지심인지 모르겠지만 나를 바라보는 시선 속에 담긴 생각들을 왠지 알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들의 시선으로 나의 상태는 어떻게 보일까?

이십 대의 거리낌 없이 무엇이든 하고 보던 나의 모습은 사라지고 임신과 육아로 지쳐가는 나로 기억하면 어떡하지?

왠지 나의 생의 시간 때문에 혹시나 팀원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닌가?


스스로에 대한 생각보다 남들의 시선이 더 신경 쓰는 그 자리의 내가  왠지 모르게 서글펐다.


‘생각하지 말자 , 안 그래도 되는데, 왜 자꾸 이러는 거야.’

‘곧 아이가 잠들 시간이구나. 들어가 얼굴이라도 봐야 하는데....’


그 회식자리에서 현재의 나의 상태를 자각을 하게 되었다.

심리적으로도 육체적으로 나는 많이 지친 상태, 관계와 생각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팀장의 자리에 대해 나는 늘 생각했다. 

회사에서 우리 팀의 일은 새로운 트렌드를 읽고 도전적인 일들을 만들고 성취해내는 기회가 많았다. 

개개인의 전문 분야에서 추진력 있게 실행해내는 능력을 겸비한 팀으로 브랜딩 하고자 했고, 그 로드맵에 맞게 일을 진행하며 각자 전문적 능력을 발휘하게 하는 것이 팀장의 본연의 업무라 생각했다. 

원래의 계획과 시기는  나에게 찾아온 삶의 주기와 맞닥뜨리며  주춤했고, 내가 우려하던 일들이  현실이 되어 돌아오기 시작했다. 



뒤통수 스매싱 주의 요망


복직 후 인사이동이 있던 시기, 팀은 다른 본부로 이동하도록 발령이 났다.

더 큰 충격은 팀 해체와 함께 말이다.


‘배신감’


그 단어밖에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이미 많이 지쳐있던 심신은 나를 더욱더 좌절하게 만들었다. 

6년이라는 그간의 노력이 모두 수포로 돌아갔구나. 

결혼 전 팀원 충원으로 팀 인원이 충원되었을 때가 기억나며 나의 공백기와 더불어 무언의 퍼즐들이 맞춰졌다.

나의 공백기에  인원 대비 효율이 떨어지는 팀으로 결론 내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와 같은 결정이 여성의 삶의 주기에 한 번은 겪어야 하는 임신과 출산의 기간 때문이라는 생각에 나의 감정적 배신감은 너무나도 컸다. 


그 기간 동안의 배려들은 돌아보니 모두 나를 재는 잣대에 하나씩 얹혔고, 통틀어 출산과 육아휴직 기간이었던 일 년은  나에게 마이너스 요인으로 작용해 인사발령이라는 결론으로 돌아온 것이다. 


입사 후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고 자부했고, 여자라서 못한다는 말이 아닌 그래서 더 잘하 낸다는 이야기를 듣고자 일했다. 지방 출장과 외근이 많은 일이 많았고, 남자라면 쉽게 보냈을 자리들이라 생각하고 불평하지 않고 일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는 일에 보람과 즐거움을 느꼈던 회사였기에 오랜 기간 내가 쌓아온 노력은 인정을 받지 못하고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었다는 생각이 너무도 컸다.

그리고 현재 마주하고 있는 모습에 나 자신도 어디서부터 다시 회복해야 할지 자신이 없어졌다.

직장생활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현실감 충전


본부 이동을 하면서 힘든 시간을 보냈다. 팀원 한 명은 자진 사표를 냈고, 나의 자존감 또한  바닥으로 떨어졌다.

6년 넘게 다닌 회사지만 본부 이동과 함께 근무지 또한 변경되어 너무나 다른 분위기의 본부 분위기에 적응해야 했다. 새로 입사한 신입사원처럼 긴장되고 힘든 시간의 시작이었다.


‘지금의 현실은 결혼과 출산이 준 결과인가?’


그 기간 현재는 나의 삶의 주기와 함께  비롯된 일이라는 생각에 더 억울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렇게 한 달을 보내던 어느 날 전화가 울렸다. 첫 동료였고, 회사를 그만둔 팀원이 나를 찾아왔다. 

같이 저녁을 먹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개인적인 사정이라 했지만, 진짜 그만둔 이유가 뭐예요?”

“안 계신 동안 이런저런 일이 있었어요.” 

“대처의 문제에 있어서 제가 제대로 역할을 잘 하지 못해 생긴 일인 것 같습니다.”


그의 잘못이 아니다. 분명한데 지금의 상황을 설명하려면 다양한 문제들이 산재하고 있음을 서로 알고 있었지만 차마 입으로 다 꺼내지 못했다. 


“팀장이 여자라 그 주기에 따른 불이익이 팀원에게 간 것 같습니다.

함께 일할 수 있어서 즐거웠고 또 나에게 많은 자극을 주었어요. 가끔 안부 전하고 얼굴 보고 지내요.”


나는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이 들었고 헤어지며 돌아서는 발걸음이 내내 무거웠다.

지금도 가끔 연락을 주는 그 친구의 전화는 반갑고 또 늘 마음 한편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렇게  팀 해체와 함께 팀을 이끌 명분이 사라졌고,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자존감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대로 그만둘까?’

‘내가 그만두면....’


답답한 사무실 공기를 느끼며 나를 사이에 두고 앞, 뒤로 앉은 팀원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지금은 아니야. 보란 듯 회복하자!’

‘지금 필요한 건 뭐? ‘

'현실 인정과 자존감 회복!’


일 년 전의 나라면 어떻게 대처했을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 먼저 팀을 회복한다.

! 나의 자존감을 회복이 먼저다. 

! 다시 새로운 플랜을 세우고 준비하자.


하고 싶은 일을 즐겁게 해내던 그때를 다시 기억해내자. 

그리고 소신 있게 하나씩 실천해 나가자. 





자존감 회복 프로젝트 


‘6개월 안에 다시 팀을 되찾는다.’


우리의 첫 번째 목표였다. 

팀 회복을 목표로 몇 가지 팀원들과 다짐을 했다. 

그때를 기억해 보니 전장에 나서는 잔다르크처럼 비장한 마음이었고, 나에게도 우리 팀에게도 절실했던 시기였다.


첫 번째, 닥치고 해내기!

요구사항의 크고 작음에 대한 핑계 대지 않고  불평 없이 처리해준다. 본부 이동과 동시에 우리 팀의 오퍼레이션 기능이 부각되어져 있었다. 그 부분에 대한 불만이 불거져 본부 이전의 첫 번째 명분이었기에 , 첫 번째를 해소해야 다음 단계가 보일 것이다.

두 번째, 우리 팀만이 할 수 있는 분야를 정비한다.

누구보다 잘하는 각자의 분야를 부각한다. 팀원의 한 사람 한 사람의 장점을 부각할 수 있는 일들을 만들어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만든다.

세 번째, 새로운 이슈를 만들고 이끌어낸다.

우리 팀은 브랜드와 마케팅 분야를 다루는 일이었기에 새로운 트렌드를 보다 빠르게 흡수하고 새로운 아이디어와 이슈를 업무에 적용하는 일은 누구보다도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렇게 팀원들과 함께 팀의 자존감 회복을 위한 일들을 해나가기로 합의했다.

한 달, 두 달 힘든 시기를 보내며 하나씩 회복되어가고 있었다.

다시 함께 일하며 내가 하는 일이 즐거웠던 것은 함께 일하는 관계에서 만들어졌던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일의 성취감과 보람도 있었겠지만 사람과의  ‘관계에서 오는 힘’은 무엇보다도 큰 것이었던 것이다. 

팀원들과의 관계는 더 단단해지고 돈독해지는 시기였고 앞으로 나아갈 힘이 축적되는 시기를 보냈다.


그렇게 6개월의 시간이 지나고 조직 개편의 시기가 도래했다.

우리 팀은 다시 이름을 찾았고 원래의 나를 회복해 가고 있었다.

이렇게 관계 속에서 만들어낸  결과와 성취감은 나를 다시 세워주었다.

그리고 기쁨의 후면,

늘 다른 한편으로 온전히 돌보지 못한 아이와 가족을 생각하며 늘 편치 않은 마음이 공존했다.



어느 쪽이든 한쪽은 결핍이다


육아와 일을 동시에 해내야 하는 시기, 어느 쪽이든 한쪽에 치중하면 한쪽이 결핍된 기분이다.

회사에 일에 집중하면서 늦은 퇴근과 아이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줄어들었고, 주말이면 늘 피곤한 몸과 마음으로 아이와 남편을 대할 수밖에 없었다.

일과 삶의 균형, 결혼 전에 워크홀릭으로 살아가던 나와 지금의 나는 달랐다.

야근과 늦은 회식자리가 있는 날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무언의 질책과 걱정스러운 엄마의 얼굴이 겹쳤다.

그리고, 저녁시간 조차 엄마 없이 보내게 둔 아이에 대한 미안함으로 마음이 늘 무거웠다.

반대로 직장생활에서 그 시간을 피하는 날이면 나로 인해 팀으로 돌아올 또 다른 질책과 불이익에 대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양손을 저울질하며 어느 한쪽은 늘  결핍된 상태로 살아가는 것 옳은 일일까?’

어느 한쪽으로도 기울지 않기 위해 늘 저울질하며 살아야 하는 워킹맘의 비애인가?’

무언가 결핍된 상태로는 나도 가족도 온전한 삶의 행복을 느끼며 살 수 없다는 결론에 닿기 시작했다.

직장생활의 문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나는 삶과 일에서 어느 한쪽을 선택하여  살아가야 할 것이다.

둘 다 놓치지 않는 삶은 지속될 것 같지 않았다.


가정과 일을 지켜내는 노력에 지쳐갈 때 즈음 , 모교 교수님께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 잘 지내니? 아이 낳고 회사 잘 다니고 있다고 들었다.”

“ 안녕하세요., 교수님 자주 연락드리지 못해 죄송해요.”

“ 이번에 산학협력활동으로 모교 졸업생 대상 강의가 있어. 한번 해볼 테니?”


그 전화 한 통에 나는 잠자고 있던 내 안에  무언가가  불쑥 고개를 드는 기분이 들었다. 

현업을 하고 있는 졸업생 대상으로 강의 제안을 주신 것이었다.  

하루 특강을 위한 제안이었지만 그 후 내게 가져온 일의 전환점이 되어 준 기회였다. 

일과 삶의 균형을 가져다 줄 또 다른 일에 대한 생각에 늘 목말라 있던 내게 새로운 도전의식을 가지게 해 준 계기가 되었다. 


모교의 교정을 7년 만에 밟게 되었다.

왠지 모를 설렘, 그리고 후배들과의 조우

나의 지난 경험을 담은 강의안으로  졸업 후 나의 행보를 담은 이야기들을 전달했다.

두 시간의 강의가 끝난 뒤 나는 한발 더 나아가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앞으로 그 길로 가는 방법을 찾아야겠다.

기분 좋은 설렘을  현실로 이어가기 위해 또 다른  준비가 필요함을 느꼈다.



서른여섯 다시 학생이 되었다

나의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일, 누군가와 함께 나눌 수 있는 방법

새로운 도전을 하자.

그 해 겨울, 그 과정의 첫발인 대학원 진학을 위해 원서를 냈다. 


대학원 진학에는 두 가지 목표가 있었다. 

직장생활의 측면에서는 늘 부족했던 지식을 채우고 또 현재 추진 중인 분야에 전문성을 보강하고자 하였고,

개인적 삶의 측면에서 새로운 도전을 위한 첫발을 딛는 것이었다. 

일과 삶을 위한 새로운 도전, 그 길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더 늦기 전에 새로운 도전을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서른여섯에 나는 다시 학생이 되었다.

낮에는 직장으로 밤에는 학교로 그리고  밤은 육아로 피곤하고 힘든 시간이 시작되었다.

나에게 힘든 시간이었지만 새로운 삶을 그려볼 수 있는 기회를 찾아보기 위한 과정이었기에 온전히 즐기며 할 수 있었다.

다시 공부를 시작하며 내 삶에 새로운 과제들을 하나씩 다시 꿰어 나가고 있었다.



나야나박마담

언젠가 직장의 워킹맘들의 모임에서 지나가는 말로 들었던 이야기가 기억난다.


“아이 하나에 아웃 하나씩, 김 과장은 세 명을 낳았으니 3진 아웃이야.”


상사가 육아휴직 들어가는 직원에게 했다는 말이었다. 

조금은 과장된 듯 하지만 그 이야기는 우리가 처한  현실과  또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 사회의 관념상 육아의 책임 또한  여성에게 조금 더 무게를 둔다. 

똑같이 일을 하고 직장을 다니지만 아이의 육아에 관련된 책임은 엄마에게 조금 더 무게가 실리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게 직장에서 어쩔 수 없는 결핍은 발생하고 그 결핍의 문제조차 여성의 문제로 취부 되는 경향이 있다.


겪어보지 않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이야기들, 

이 이야기들은 현재를 살아가야 하는  워킹맘들의 비애가 아닐까 생각이 된다.

또 반면으로 출산과 육아를 겪어야 하는 여성을 채용하면서 느끼게 될 상사들의 입장도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어쩔 수 없는 주기에 대한 고려가 필요할 것이고 그 후에 불이익도 당사자 혼자 막아서서 해결될 일이 아닌 것이다.

사회적 분위기와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함께 동반되지 않으면 언제고 남아있을 문제라고 생각한다.


임신과 육아의 기간에 내가 속한 사회는 나에게 다른 얼굴을 보였다.

지금 되돌아 그 기간을 지나고 나니 크게 이해하지 못할 부분도 없다. 

그리고 그 기간을 보내야 하는 여성들을 바라보며 ‘나와 같은 시간을 보내야겠구나’ 생각하니 씁쓸한 기분이 든다.

나 또한 직장에서 누군가를 평가를 해야 하는 존재가 되기도 했으며  양면적인 내 모습을 직면하기도 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누구라도 피해갈 수 없는 과정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사실이며  씁쓸하면서도 그 과정을 이겨내지 않고서는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없음도 알고 있다.


지금은 회사의 복지나 사회적 분위기가 내가 겪었던 당시보다는 조금 더  나아졌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 시선을 바꾸어 놓기에는 아직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여성들 또한 육아와 휴직의 시기를 위해 현실적이고 현명한 대안을 내놓고, 배려받아야 할 순간을 누릴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그 기간 이후의 나를 위한 준비도 스스로 해나갈  필요가 있을 것이다.


임신과 출산을 겪는 시기 나는 원래의 나의 모습을 잃어버리기도 했다. 

불안한  마음에  ‘오기’와 ‘목표’만을 위해 움직였고 다분히 나는 현실감보다는 감정적이고 편중된 판단과 생각을 하기도 했다.


‘다분히 감정과 편향적인 태도를 보이는 그때의 나를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불평과 배려만을 바라는 자격지심으로 가득한 한 사람으로 바라보았을 것, 한발 떨어져 보니 나 자신도 나에게 좋은 평가를 할 수 없을 것 같다. 

누군가를 탓하기보다 그 시기를 보내야 하는 나를 위한 격려와 준비가 더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모습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

나는 일과 가정의 양립을 위한 일을 찾아 그렇게 부딪치고 깨지고 또 성취하며 살아간다. 

그 저울질이 멈추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함께 살아가는 행복을 알기에 그 행보를 계속할 것이고

또 그렇게 나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행복을 느끼며 필요한 일들에 가장 현명한 결론을 고민하며 새로운 일들에 도전하며 살아간다. 

그렇게 나로 살아가는 것이 나의 진짜 모습이다.



엄마로 아내로 그리고 

또 나 자신으로 살아가는 나는 여전히 박마담이다.



by  마담의 ‘슬기로운 여성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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