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맨오브피스 Jun 07. 2020

완벽이 오히려 안 좋다


양쪽 여백이 딱 떨어지도록, 다이어그램 속 네모의 크기가 모두 같도록, 코드 스타일이 모두 일정하도록, 정보 전달 프로세스가 완벽히 지켜지도록. 완벽하게 만들고 싶다는 유혹은 늘 존재한다. 일을 하다 보면 어느샌가 더 완벽하게 다듬고 싶어 집중하게 된다. 나만 이러는 게 아닐 것이다. 사람들은 일상에서도 완벽을 찾는다. 식탁에 수저를 놓을 때 이왕이면 바르게 놓고, 옷걸이는 전부 같은 것으로 맞추고, 조리도구 세트도 같은 브랜드의 것으로 맞춘다. 완벽을 추구하는 행동 자체는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굳이 거부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과하게 집착하는 것이 문제다. 미세한 디테일을 바로 잡으려 시간을 너무 많이 투자하게 되면 문제다. 나중에 판을 싹 갈아엎어야 할 때면 골치가 아프다.


디테일은 중요하다. 중요하지만, 끝낼 땐 끝을 내야 한다. 완벽을 고집한다는 애플 제품도 써보면 완벽하지 않다. 하지만 때가 오면 어김없이 신제품을 출시하고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를 한다. 제품 퀄리티 못지않게 타이밍 또한 중요하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완벽함을 구현했다고 해도, 그건 그 당시 기준의 완벽함이지 현재 기준으로 봐서는 부족할 수 있다. 그러니 완성되었다 싶으면 세상에 내놓고, 계속 발전시켜가는 것이 더 낫다. 완벽함 자체보다는 사람들의 삶에 가치를 더해주는 게 더 중요하니까. 내 얼굴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안경을 평생 찾아다니기보다는, 적당히 맞는 걸 빠르게 찾아 선명한 시야로 하루하루를 사는 게 더 유익하다. 유튜브 콘텐츠도 처음엔 조금 엉성해도, 시간이 지날수록 발전해나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더 매력적이다.


완벽은 환경을 경직시킨다. 꽉 짜여도 너무 꽉 짜였기 때문에, 갈아엎기가 쉽지 않다. 지켜야 하는 룰이 너무 많다. 책장에도 어느 정도 빈 공간이 있어야 책을 넣고 빼기 편하다. 새 책이 들어와도 공간이 있다. 소프트웨어 개발 계획도 너무 꽉 짜 놓으면, 예상치 못한 버그에 할애할 시간이 없어 제품이 망가질 수 있다. 사무실 불을 끄는 것, 쓰레기통을 비우는 것이 누구 담당인지 하나하나 완벽하게 지정해놓으면, 초반에는 잘 지켜질지언정 나중에 가면 무너지기 일쑤다. 담당자가 아프면 누가 대신할 것인지도 정해야 하고, 이 모든 것을 문서화해야 하고 감시해야 하는 등 낭비가 크다. 그냥 직급 상관없이 스스로 나서는 팀 문화를 만드는 것이 훨씬 더 간단하고 지속 가능하다.


독일의 거대 은행들이 아직까지 우편으로 계좌정보를 전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착착 돌아가는 완벽한 프로세스를 버리지 못해서라고 생각한다. 이제 와서 갈아엎기엔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고 고객들도 그냥저냥 잘 쓰고 있다. 그래서 그냥 하던 대로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표면상으로는 "개인정보 보호와 정확한 신원/주소 확인을 위해"라고 한다. 하지만 영상통화와 주소 증명 서류를 제출하면 신원과 주소는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또 디지털 개인정보 보호는 이미 기본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유출이나 해킹 리스크가 있지만, 우편이라고 리스크가 없지 않다. 누구라도 마음만 먹으면 다른 사람 우편함에 손을 넣어서 우편을 훔칠 수 있다.


완벽을 고집하는 게 무조건 나쁜 것이 아니다. 하지만 변화에 빠르고 유연하게 반응하는 쪽이 더 지속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기술, 제품, 프로세스뿐만 아니라 예술, 엔터테인먼트, 일상에도 모두 적용할 수 있는 이야기다. "왜 완벽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 나오지 않으면 대체로 덜 완벽하게 가는 것이 득이다. 시간과 자원은 유한하니까.

작가의 이전글 원격으로 조작하는 공기청정기, 세탁기, 에어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