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부터 말하면 2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결론
- 이야기가 재미 없어졌다.
- 슈퍼스타가 없어졌다.
나는 아직 마블 작품을 모두 챙겨본다. 영화도 보고 드라마도 본다. 하지만 내 주위에서 마블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더 마블스>가 작년 11월에 개봉했을 때,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예매해서 볼 줄 알았다. 하지만 개봉 첫 주임에도 불구하고 자리가 꽤 비어있었다. 나에게 마블이란 존재를 알려준 아내도, 아이언맨 광팬이었던 친구도 더 이상 마블 작품에 관심이 없다.
"왜 요즘은 마블 작품 안 봐?"라고 그들에게 물었을 때, 아래와 같은 대답이 뒤섞여 나온다.
주변의 반응
1. 드라마도 챙겨봐야 할 것 같아서 부담스럽다.
2. 엔드게임이 너무 깔끔해서 미련이 없다.
3. 슈퍼히어로 영화 지겹다.
4. PC요소가 거슬린다.
나는 이 이유들이 마블의 쇠락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러나 핵심 원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1. 마블 드라마는 드라마만의 세계관으로 갔으면 더 깔끔하긴 했을 것이다. 넷플릭스에서 인기를 끈 마블 드라마 <데어데블>, <제시카 존스>, <퍼니셔> 등은 일명 '넷플릭스 마블 세계관'으로 나름의 개성이 있었다. 동시에 마블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 꼭 챙겨봐야 한다는 부담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드라마 작품이 늘어난 이후에도 성공한 마블 영화들이 없었던 건 아니다.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ume 3>, <샹치> 등은 성공적이었다.
2. <어벤져스: 엔드게임>은 정말 대단했다. 그동안의 서사가 모두 한 지점으로 모이면서 관객들에게 새로운 감동과 흥분을 선사했다.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경험을 안겨주었다. 엔드게임은 3.6조 원의 티켓 매출을 올리며 역대 박스오피스 2위라는 말도 안 되는 기록을 세웠다. 물론 작품의 깔끔한 엔딩으로 인해 '그다음은 어떻게 되지?'에 대한 궁금증이 사라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엔드게임 이후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마블에 대해 이야기했고, 흥미로워했다.
3. 슈퍼히어로 영화가 지겹다는 말은 맨 처음 어벤져스 때부터 있었다. 지겹다 지겹다 말이 많아도, 재밌는 작품은 성공했다. 지금의 문제는 아마 '안 봐도 뻔한 슈퍼히어로 작품이 많다'는 점이지 않을까 싶다. 사랑을 이야기하는 로맨스 장르가 지겨울 수는 있지만, 그게 (형태는 바뀔지언정) 로맨스 장르의 쇠락으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4. PC부분은 조금 조심스럽지만 그래도 이야기해 보겠다. 마블 작품들이 다양성을 억지로 집어넣는 경향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쇠락의 핵심 원인은 아니라고 본다. 예를 들어 "PC가 심하다!"라는 의견이 없었던 <시크릿 인베이전>이나 <웨어울프 바이 나이트>는 평가도 별로였고 성공도 하지 못했다. <앤트맨과 와스프: 퀀텀매니아>도 그저 그랬다. 나만 재미없었던 게 아니라 이들의 성적표를 보면 상황파악이 된다. 나는 앤트맨을 좋아하지만, <바비>가 훨씬 재밌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나의 결론을 다시 정리해 보겠다.
작품의 이야기가 재미 없어졌다. 복잡한 세계관이고 PC고 뭐고 상관없이, 일단 내용 전개에 앞뒤가 안 맞는 부분들이 늘어났다. 고난과 역경이 사라져 슈퍼히어로의 삶이 장난스러워졌다. 현실의 어려움과 맞닿아있는 느낌이 사라졌다. 쓸데없이 설정이 많아져 이야기에 몰입하는데 방해가 된다. 그들이 왜 강한지에 대한 설득력이 약해졌다. 수많은 세계가 연결되는 멀티버스 세계관은 흥미롭지만, 그 어떤 세계관도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는 부작용을 낳았다.
슈퍼스타가 사라진 것도 크다. 마블 영화를 말할 때 생각나는 배우 1위는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아이언맨)일 것이다. 사람에 따라 크리스 에반스(캡틴 아메리카)를 떠올릴 수도 있겠다. 이 둘은 엔드게임을 기점으로 마블을 떠났고, 천하의 매력으로 구심점 역할을 하는 캐릭터가 사라졌다. 지금의 마블 캐릭터들은 각자 열심히 뛰고 있지만, 중심이 되는 인물이 없다. 따라서 이들을 엮어놓아도 딱히 흥미롭지 않다. 모두를 이끌어주는 개성이 없다.
지금까지의 세계관 다 필요 없으니, 흥분과 기대감을 주는 작품 딱 1개만 나와줬으면 좋겠다. 일단은 모든 걸 무너트릴 필요가 있다. 세계관을 버리고 작품에만 집중해줬으면 한다. 세계관 연결은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온 후에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다. 지금은 앞뒤가 바뀌었다.
요즘 나에겐 망해가는 마블 브랜드를 되살리려는 모회사 디즈니의 고군분투가 가장 흥미롭다. 이번 주에 공개된 마블 드라마 <에코>보다, 디즈니의 실적보고서를 읽는 게 더 재밌다. 마치 배우의 연기보다 사생활 쪽이 더 흥미로운, 그다지 건강하지 못한 상태라고 볼 수 있다.
혹시나 만약에 마블이 망하더라도 끝까지 지켜볼 생각이다. 망하면 망하는 대로 느끼는 바가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