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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맨오브피스 Aug 30. 2020

원격으로 효도하기

"이번에도 컴퓨터 기사 노릇 해야겠군" 베를린에 있을 때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다들 모여서 우스갯소리로 하던 이야기다. 주로 개발자 친구들의 농담 섞인 푸념이었다. 온 가족이 모이는 크리스마스 연휴. 그들은 부모님의 노트북에 오피스를 설치해주고 할머니 할아버지의 아이폰 화면 글자 크기를 키워주는 IT 기사가 된다. 나는 개발자는 아니지만 적어도 우리 가족 중에서는 컴퓨터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 반강제적으로 IT 기사 역할을 맡게 된다.


부모님과 같이 살던 6년 전까지만 해도 내가 할 일은 단순했다. 부모님 PC에 소프트웨어 설치하기, 인터넷 시작화면에 네이버 대신 다음이 뜨도록 설정하기, 프린터 고장 나면 손보기 정도가 전부였다. 별로 어려운 것도 아닌데 매번 여쭤보시는 게 의아했지만, 내가 요리를 할 때마다 레시피를 확인하는 것과 비슷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부모님에게 PC는 단순 도구일 뿐, 흥미나 의무의 대상은 아니다. 나처럼 매일 갖고 노시지 않는다. 그리고 어느 날, 드디어 스마트폰을 구입하셨다. 대략 4~5년 전쯤인 것 같다. 부모님의 학습 능력은 놀라웠다. 처음에는 전화와 문자만 쓰다가, 카톡을 쓰다가,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 공유하다가, 네이버 밴드에 가입하다가, 문자로 본인인증을 알아서 하다가, 이제는 인터넷 뱅킹도 알아서 하신다. PC는 아무리 가르쳐드려도 어려워했는데, 스마트폰은 그만큼 직관적인가 보다 싶었다. PC와는 달리 손 안의 컴퓨터는 부모님의 일상을 완전히 파고들었다. 다루시는 일의 종류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나의 IT 기사 업무도 복잡해졌다. 게다가 지금은 부모님과 함께 살지 않는다. 모든 걸 전화로 해결해야 한다.


"화면 중간에 QR코드 생성 버튼 보이지? 그걸 눌러보세요"

"버튼? 뭔가 엄청 여러개 있는데?"

"중간에 보면 검은색 버튼에 QR코드라고 쓰여 있잖아. 그거 누르면 본인인증 문자가 올 거예요"

"아, 문자 왔다. 어? 카톡도 왔네. 친구가 사진 보내줬어. 여행 갔나 봐. 자연이 너무 이쁘다~"

"저기요, 일단 본인인증부터 합시다^^;"

"인증번호? 문자 아까 알림에 있었는데 이제 없다. 어디서 찾지?"

"..."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원격으로 내가 직접 조작할 수 있는 방법을 탐색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팀뷰어(TeamViewer)라는 프로그램이었는데, 사용법이 별로 직관적이지 않고 "정식 버전을 구입하세요!"라는 팝업이 계속 떠서 부모님의 주의를 분산시키는 문제가 있었다. 무료인 동시에 팝업이 뜨지 않으며 PC뿐만 아니라 스마트폰도 원격으로 조작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필요했다. 검색을 여러 번 거친 결과, 애니데스크(AnyDesk)라는 보물을 찾았다. PC에 오피스를 설치해드리는 것은 물론, 스마트폰 배경화면도 바꿔드릴 수 있다. 말로 설명하면 10분은 넘을 텐데, 내 노트북에서 조작하니 1분이면 충분했다. 부모님의 스트레스도 줄었고, 나의 스트레스도 줄었다. 예전에는 대화의 99%가 아이콘 위치가 어디 있고, 안드로이드 업데이트를 해야 하고 같은 이야기뿐이었다. 문제 해결하느라 바빠 안부는 뒷전이었다. 지금은 "원격 프로그램 켜세요~"라고 말하면 끝이다. 내가 작업하는 시간은 자연스레 잡담 타임이 된다. 이제는 컴퓨터가 '고장'나면 부모님과 떠들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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