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엘로 이야기 2.
“이엘로, 언니 어쩌지? 아프다고 하는데 여기서 같이 좀 쉴까?”
‘아프지 마 가브리엘. 내가 여기 같이 있어 줄게.’
가브리엘과 같이 있는 것이 나는 세상에서 제일 좋다. 하지만 가브리엘의 무거운 목소리는 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
창문 밖에 공기는 시원하지만 무겁다. 코 끝이 차갑고 축축하다.
까만색 작은 네모를 높이 있는 동그란 나무 딱딱한 곳에 내려놓고 가브리엘이 바닥에 앉는다.
‘왜 가브리엘 빨갛고 높은 자리에 앉지 않는 거지?’
가브리엘은 이 빨간색 구멍이 숭숭 난 높은 자리를 좋아한다.
그래서 그 자리가 거실에도 하나 있고 방에도 하나 있다.
바닥은 햇살도 없고 차갑기만 한데 가브리엘이 계속 그대로 있다.
나도 내 폭신이가 있지만 가브리엘이 여기 있는 동안 나도 같이 손을 모으고 앉아있을 거다.
‘띵딩딩동 띠리리동.’
소리가 나는 까만 작은 네모를 가브리엘이 다시 찾는다.
‘금방 동그란 나무 딱딱한 곳에 내려놓았잖아. 내가 알려줄게.
“이융이야 웅웅”’
가브리엘에게 말하며 나무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이엘로 식탁 위에는 올라가지 않기로 했잖아.”
‘아니라고. 내가 알려주고 싶었다고.’
내 눈을 동그랗게 하고 머리를 옆으로 기울였다.
“아 여기 있구나. 핸드폰 소리가 나서 그랬어? 나에게 알려주려고?” 가브리엘이 나를 쓰다듬으며 말한다.
‘다행이다. 알아들어서. 오늘 간식 꼭 달라고 해야지.’
가브리엘은 까만 네모를 손에 쥐며 말한다.
“어 여보세요. 아, 네. 맞아요. 오늘 미팅 시간 맞습니다. 화상에 접속을 아직 못했는데 5분만 기다려 주세요.”
‘쥬스틴이 아닌데 이번엔 누구지?’
가브리엘이 방으로 가더니 큰 네모를 쳐다본다.
몰래 따라가 얼굴을 삐쭉 내밀어보니 큰 네모에 내가 아는 얼굴이 나온다.
'카티아다.'
카티아는 주말에 가브리엘이 큰 네모 앞에 앉으면 거기서 말하는 친구이다.
‘나도 말 잘하는데. 나도 끼워주지.’
큰 네모 근처로 얼른 달려갔다. 그리고 네모를 앞발로 톡톡 두드리며 인사했다.
카티아도 손을 흔들며 인사한다. 늘 내 이름도 불러주고 웃어주니까 좋다.
“카티아, 미안해요. 기다려줘서 고마워요. 내가 오늘 조금 힘들었어요.”
“괜찮아요. 오늘 평일인데 회의실이 아니네요.”
“뒤에 배경이 보이는군요. 네, 일찍 왔어요. 음.. 사실 어제 저녁 먹고 나오던 길에 속이 안 좋더니 잠깐 쓰러졌었어요. 오늘 출근했다가 조퇴하고 병원 다녀왔어요.”
“아유 어떻게 그런 일이. 그러고 보니 혈색이 너무 안 좋네요.”
카티아가 눈을 크게 하고 잠시 말을 멈춘다. 그러다 다시 조심스럽게 조용히 말한다.
“몸이 안 좋으면 다음에 해도 괜찮은데. 가브리엘 정말 괜찮나요?.”
가브리엘은 씩 웃으며 대답한다.
“지금은 괜찮아요. 영양제도 맞았고요. 그리고 해보고 싶은 이야기도 있어요.”
“네. 어떤 이야기든 가브리엘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보아요.”
“여기 이엘로가 있어서요. 모니터를 자꾸 가리죠? 옆방으로 좀 내보낼게요. 이엘로, 이야기할 동안 저기로 좀 가 있을래?”
‘가브리엘이 나에게 다른 곳으로 가라고 말하다니!’
“이야옹 이양 이양 이야옹”
‘내가 왜 나가야 해. 나는 여기 같이 있고 싶어. 안 갈 거야.’
“이엘로가 가기 싫나 보네요. 가브리엘만 괜찮으면 나는 괜찮아요..”
“아 네. 음… 그럼 잠시만요. 이엘로 여기 옆에 앉아. 여기로 와.”
‘안 그래도 거기 앉으려고 했다고. 거기가 내 자리잖아.’
가브리엘이 가리키는 곳은 원래 내 자리다.
가브리엘은 매일 집에 와서는 큰 네모 밑에 굉장히 작은 네모 여러 개를 마구 두드리며 열중한다. 나도 재미있어 보여 종종 눌러보는데 그때 옆에서 가브리엘을 지키는 내 자리가 거기다.
“이제 자리 잡네요. 시작하면 될 것 같아요.”
"네, 오늘은 어떤 주제로 말씀하고 싶으세요?”
“제 일이요. 제가 계속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건강이 허락하지 않는 것 같아서요.”
가브리엘이 입꼬리를 내리더니 목소리가 어두워진다.
“저희와 같은 일을 하시는 분들 중에 꽤 알려진 분들은 60대 초쯤에 건강에 문제가 많이 생겨요. 큰 병이 나거나 과로사로 돌아가시는 것도 종종 보았어요."
“네.” 카티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가브리엘을 바라본다.
“제가 일하고 직업적으로 무언가 해낸다는 것이 좋기는 하지만, 저도 십몇 년 후에 그렇게 되는 건 아닌지 그런 생각이 들긴 해요. 그런데 또, 아프고 싶지는 않은데 일은 계속하고 싶고…”
가브리엘이 말을 멈춘다.
눈썹을 치켜들며 한참 그대로 있더니 다시 말을 꺼낸다.
“아, 아니에요. 계속하고 싶은 것인지 아닌지도 모르겠어요. 그냥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런 생각이 들었군요.”
“네. 요즘 특별히 일을 많이 하는 것도 아니고 학교 다닐 때부터 늘 그렇게 살아왔는데, 하필 왜 지금 와서 몸이 고장 나기 시작하는지 모르겠어요.”
가브리엘이 한숨을 쉬며 창문 밖을 바라본다.
‘나도 한숨 잘 쉬는데. 휘 쉬.’ 따라 해 본다.
“방금 그 말을 할 때 혹시 어떤 감정이 느껴졌나요?”
“글쎄요. 건강을 관리 못한 스스로에 대한 원망과 자책?”
“원망과 자책이 있군요. 그럼 그런 말을 듣고 있는 가브리엘을 스스로가 보면 어때요? 어떤 마음이 드나요?”
“음 제 자신이 불쌍해요. 뭐랄까 미안해요.”
“왜죠?”
“이렇게 아픈 걸 알면서도 다그치고 있어서요. 사실 어제 쓰러졌을 때도 그랬어요. 제가 저한테 나약한척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더라고요. 일 조금 했다고 배가 불러서 쓰러지고 있다고.”
‘가브리엘이 그랬었구나. 어제 그런 일이 있었구나’
걱정이 되어 가브리엘 얼굴을 그저 바라보았다.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창문을 좀 닫을게요. 아직 날이 많이 차갑네요.”
가브리엘이 창문을 닫고 창문 밑 따뜻한 네모에 딸깍이를 누른다.
“카티아, 기다려줘서 고마워요. 창문 잘 닫고 왔어요. 그 김에 라디에이터도 키구요.”
“아픈데 따뜻하게 하는 것이 좋죠. 자 그럼 계속할까요?”
카티아가 말하는 소리가 조용하면서도 차분해서 졸린다.
가브리엘이 창문을 닫고 난방을 켜서 그런 것인지 포근하다.
‘나도 듣고 싶은데.’
내 마음과는 달리 포근함에 눈이 스르르 감긴다.
그러다 큰 소리가 났다.
“토르르 탕”
방금 잠꼬대를 하다가 무언가 건드린 것 같다.
무엇이 떨어지는 소리가 나서 화들짝 놀라 깨어났다.
‘언제 잠든 거지?’
가브리엘의 목소리도 들린다.
“이엘로가 펜을 떨어트렸네요.”
떨어진 것을 줍고 가브리엘이 이어 말한다.
“저희 부모님은 제가 어릴 때 매우 엄격하셨어요. 성인이 되고 부모님과 떨어져 지내게 되면서부터는 제가 스스로 부모님을 대신했던 것 같아요. 제가 저를 엄격하게 대했어요. 부모님 방식대로요. 어쩌면 부모님보다도 더 제가 저를 더 엄격하게 대했던 것 같아요.”
“스스로를 엄격하게 대했다라. 예를 들면 어떻게 하셨나요?”
‘아 카티아가 아직 있구나.’
눈을 비비며 가브리엘 옆으로 더 바짝 붙어 살포시 기대었다.
“반드시 해내야 한다구요. 해내지 못하면 성실하지 못한 거고 다 제 잘못이라고요. 어떤 실수도 용납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실수를 하면 절대 안 되었어요. 그러다 무언가 실수하거나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면 어디론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제 스스로를 비난하고 원망했던 것 같아요. 책망했고요."
가브리엘이 한쪽 입꼬리에만 힘을 주더니 '휴'하고 길게 한숨을 쉰다. 그리고 고개를 바닥에 떨군다.
한참 아무 말하지 않다가, 조금씩 입을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런데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는다.
그러다 조금 뒤 가브리엘이 작은 소리로 말한다.
“마음이 한 번도 쉬지 못했어요.”
가브리엘은 말을 잇지 못하고 구석자리 바닥으로만 쳐다본다.
카티아는 그저 조용히 함께 해주고 있었다.
“제 공부도 일도 모두 꼭 다 이루고 또 해내고 싶었어요.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매일 일어났어요. 하루를 꼼꼼하게 계획했고 매일 그 계획대로 다 해내려고 했어요. 그대로 하지 못하는 날은 스스로에게 휴식시간을 없애는 벌을 줬어요. 그래도 계획대로 잘 해낸 날은 가끔 밖에 산책도 하고 외식도 했어요. 학교 다닐 때는 공부와 잠자는 시간 외에 밥 먹고 설거지하고 화장실 가고 그 외의 이동하는 일까지 모두 정해 놓은 시간 내에 다 마쳐야했어요. 파리는 좁으니 멀리 갈 일이 잘 없잖아요. 계획한 시간 내에 이동은 어렵지 않았어요.그런데 그렇게 해도 뭔가 늘 부족한 것 같았어요. 계획대로 못하는 날이 많아지면 제가 싫고 미웠어요. 일을 하면서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아요. 늦은 시간에 퇴근하고도 새벽 5시에 다시 회사로 출근했어요. 공부할 때와는 조금 달랐던 것 같기도 해요. 동트는 것을 회사에 보는 것이 좋았어요. 그 시간에 사무실 청소해 주시는 분을 저만 안다고 생각하니 무언가 특별한 사이가 된것 같고, 그 분과 수다하는 것도 좋았어요.”
말을 멈추는 가브리엘 한숨을 쉬며 다시 말한다.
“아니네요. 일하면서도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네요. 변함없이 저를 몰아세웠어요. 버틸 수 있는 한계까지 몰아세우고 싶었어요. 근데 또 그렇게 하면 해내더라고요. 나 때문에, 부족한 저 때문이라고 분노하고 원망하고 스스로에게 소리 지르면 제 안에 제가 다시 이를 악물고 묵묵히 앉아서 해내더라고요. 그런데 해내면 해낼수록 더욱더 그 소리가 커져갔어요. 그래서였을까요? 저 스스로와 사이가 안 좋아진 것 같아요. 이젠 더 이상 그렇게 하기 싫은가봐요. 아니. 하기 싫어요. 저도 마음이 여유로운 사람들처럼 살고 싶어요. 저만 이렇게 대하는 것이 아니라 제 주변 사람들도 잘 대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이건 제가 원하던 잘 해낸다는 것의 의미에 부합하지 않는 것 같아요.”
곰곰이 듣고 있던 카티아가 입을 뗀다.
“잘 해낸다는 것의 의미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했죠. 그럼 잘 해낸다는 것은 가브리엘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음… 사실 어느 시점까지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어딘가 목표에 도달한다.' 또는 성공을 잘 해낸다는 의미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어느 지점까지 도달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도달해도 또 다른 곳, 그다음 곳 계속 어딘가로 달려야 했고 해내야 했어요. 그것을 반복하기 위해서는 만족하면 안 되었어요. 스스로 칭찬해서도 안되었어요. 늘 불안하고 늘 어딘가에 굶주려있고 항상 어디론가 도달하기 위해 끝도 없이 달려야 했어요. 스스로를 비난하고 원망하며 자책하는 것이 저의 가장 훌륭한 채찍이었던 것 같아요. 저를 앞으로 가게 하는 도구 같은 것이요. 제 스스로에게 비난과 원망을 퍼부어서 저를 정신없게 했고 흔들어 힘없게 만들었어요. 그렇게 멍해지고 약해진 저를 끌고 가면 원하는 목적지에 수월하게 도착했던 것 같아요. 아무 반항을 안 했거든요. 그런데 채찍은 아픈 거잖아요. 목적지에 그렇게 하나씩 도달했지만 아팠어요. 그리고 그다음 채찍을 미리 두려워하며 마음을 늘 불안하게 했던 것 같아요. 그게 어디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방법인가요? 폭군도 그런 폭군이 없죠.”
가브리엘에 잠시 멈추었다. 무언가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고 나를 자꾸 쓰다듬는다.
그리고는 다시 입을 떼었다.
“스스로에 대한 원망, 비난 그 모든 자책은 저에게 어쩌면 족쇄나 주문 같은 것이었나 봐요. 벗어날 수가 없었거든요. 그렇게 해야 제가 앞으로 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렇지만 비난과 원망의 말들이 사실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나 봐요. 그렇게 말은 못 했지만 사실이 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노력했어요. 그런데 그럴수록 더 저를 조여왔어요. 하지만 비난과 원망은 어떤 사실을 보는 하나의 의견일 뿐이잖아요. 그렇게 열심히 하고 있는 저를 누구도 그렇게 대할 권리가 없는데, 제가 제 스스로에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허락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이제 저를 존중해주고 싶어요. 채찍질하고 주문 걸고 족쇄 채우고 그것을 또 두려워하고… 그러고 싶지 않아요. 자유롭고 싶어요.”
말을 마친 가브리엘의 얼굴을 보았다.
‘가브리엘 얼굴이 왜 좀 다른 것 같지? 목소리도 무언가 힘이 있어졌어.'
“그래서 그런지 지금 저에게 잘 해낸다는 의미는 좀 다른 것 같아요."
가브리엘의 눈도 반짝인다.
"몰리토, 지난번 세션 때 제가 자책과 두려움에게 지어준 이름."
크게 숨을 들이키며 가브리엘이 말한다
"몰리토를 사용해 제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고, 제탓하며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너그럽고 큰 마음으로 저를 믿어주고 여유롭게 기다릴 줄 알고 묵묵히 제 몫을 하며 일상을 지낸 다는 것이 이제는 잘 해낸다는 의미가 될 수 있겠네요."
가브리엘이 잠시 말을 멈추고는 무언가 생각하는 것 같다.
"음… 그리고 저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불안해 하기보다 마음을 지키고 평정심을 가지고 묵묵히 지켜볼 수 있는 담대함을 가지는 것도 잘한다는 의미가 될 것 같아요. 저를 응원하고 칭찬하고 격려해 주고 싶어요. 이제 그 마음 쉬어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말을 하고 있는 가브리엘 목소리에 점점 더 힘이 생기는 것 같았다.
‘가브리엘 이제 괜찮아 진거야? 카티아랑 이야기 많이 했어?’
“전 이제 정말 마음이 넉넉한 사람처럼 살아보고 싶어요.”
가브리엘이 웃는다. 이건 진짜 웃는 거다.
가브리엘이 기분 좋을 때 나는 냄새,
내가 너무 기분이 좋아지는 냄새.
**이 작품에서 등장한 모든 인물과 사건들은 허구입니다. 실존하는 인물, 장소, 건물, 제품과는 일절 관련이 없습니다.** 소설. 이제 꺼져 몰리토, 자책과 두려움
[글쓴이의 말: 수정하다가 아예 다시 써버렸습니다. 주인공 가브리엘을 관찰하고 이해해 보려다가 제가 생각이 많아졌어요. 주인공을 생각하며 글을 쓰는 자체가 제 스스로에게 위로가 되기도 하네요. 여러분도 가브리엘 같았던 적이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