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질 이야기 5. 불안이 기대로 바뀌는 순간
“아 그거. 가브리엘, 빨리 끝낼게. 늦어도 내일 오전 중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보내줄게.”
“그래 알았어.”
‘휴 다행이다. 지금까지 한 것 당장 보내라고 할까 봐 식겁했네.”
“바질, 그런데 한 가지 질문이 있어.”
‘아 머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 같더니.’
가브리엘의 질문을 거절하고 싶지만 마지못해 입을 떼었다.
“어, 당연하지 질문해.”
미팅 전에 야심 차게 만들어 놓고 미팅 동안 전혀 마시지 못했던 차이 밀크티를 한 모금하며, 화상미팅 창의 가브리엘을 바라보았다.
“우리 팀에 내가 없을 때 팀을 이끌어야 하는 사람은 누구지?”
‘어라 브리스가 한 말이 사실인가. 가브리엘이 떠난다는 소리를 하는 건가?’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뭐라고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는다.
“가브리엘, 네가 없으면 안 되지. 갑자기 무슨 소리야?”
차이 밀크티에 정향과 생강 그리고 맥넛과 시나몬이 잘 섞이지 않아 입 안에서 가루가 씹히는 느낌이다.
커피를 너무 많이 마셔서 오후 늦게는 홍차로 넘어온 건데, 입 속 가루의 껄끄러움이 이 상황에 더욱 크게 느껴진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운데, 바질. 비상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묻는 거야.”
“아… 비상상황. 어 우리 팀에서는 너 다음에는 내가 연차가 높으니까 팀을 관리하고 있어야겠지.”
“그래. 잘 아네. 이번 기회에 팀 관리 한번 해봐.”
껄끄러운 밀크티만큼이나 가브리엘의 말이 불편했다.
“어.. 난 아직 매니징은 어려운데.”
“그래? 바질, 네가 만일 개업 변호사였다면 지금 연차에 뭘 하고 있을까?”
가브리엘이 도무지 이런 질문을 왜 하는지 도통 이해가 되지도 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아무 말 안 하기에는 가브리엘 질문을 무시하는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
“그러게 내 연차에 개업 몇 년 된 거면, 연수하는 인원과는 계속 일했겠고 아래 연차 어쏘도 뽑아서 같이 일하고 있을 수도 있겠다."
“그렇지? 그럼 너도 할 수 있겠네?”
“아 그렇지만 내가 차근차근 혼자 한 게 아니라. 나는 가브리엘 너랑 같이 일했고 네 감독 하에 일을 했으니까 조금 다를 것 같은데.”
“그럴 수 있지. 하지만 네 연차에 맞는 일을 지금부터라도 한번 해보면 좋을 것 같아. 진작부터 바질 너에게 넘겼어야 하는 일들을 내가 잡고 있었던 것 같아. 이번이 네가 성장할 기회가 될 것도 같은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성장이라 하면서 일을 더 많이 시키려는 거 아니야?’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가브리엘, 그렇지만 나 혼자 이것을 어떻게 다 하지?”
“너 혼자 하라는 것이 아니야. 네가 관리한다는 생각으로 시작해 봐. 결정은 네가 미리 머릿속으로 해보고, 그 결정도 나에게 알려줘. 그러면 내가 그게 좋을지 아닐지 내 생각을 너에게 알려줄게. 할 수 있겠지?”
“네가 도와준다면야 해볼 수는 있을 것 같은데. 나는 아직 한 번도 그런 생각은 안 해봤고 준비가 안된 것 같은데 괜찮을까?”
“바질.”
가브리엘의 목소리가 갑자기 더 차분해졌다.
바깥에 보이는 파리 날씨보다 더 차분한 가브리엘 목소리에 내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응”
“네 연차에서 이제 1-2년만 더 있으면 파트너가 될지 말지 결정되는 시기인 거 알지?”
“어 그렇지. 맞아.”
“그럼 1-2년 뒤에 그냥 갑자기 파트너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건 아니지만 올해는 난 그냥 그래도 내 일을 더 전문적으로 하고…”
“네 일을 전문적으로 한다는 게 뭔데?”
가브리엘의 질문에 내 몸은 얼어붙다 못해 깨지기 직전인 듯했다.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내 일이란 것이 뭘까? 왜 난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지?’
내 전공을 더 살리는 일, 변호사로서의 자질, 시니어급으로 다룰 수 있는 일, 그중에 무엇이 내 일인지도 모르고 ‘내 일을 더 전문적으로 하고 싶다.’ 말해버린 것 같았다.
그런 내 생각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가브리엘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까보다는 덜 차갑고 어둠 속에 불빛이 스며 오는 듯한 목소리로 말이다.
“바질, 토요일 오페라 티켓이 있는데 같이 갈 친구 있으면 티켓 줄까? 나는 못 갈 것 같거든.”
“아 그거 다 매진된 거 아니야? 베르디 거.”
“응 맞아. 난 티켓을 미리 구해놨었거든. 난 같이 가기로 한 친구도 주말에 싱가포르로 이동해야 해서 못 간데. 네가 갈래?”
가브리엘의 제안에 신기한 느낌이 들었다.
처음에 가브리엘이 나에게 질문할 때 들었던 느낌은 이랬다. 우중충하고 차가운 날씨의 파리 한가운데 높이 솟아있는 로펌처럼, 따뜻한 것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차디찬 돌로 만든 높고 어두운 성 안에 우두커니 서있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가브리엘이 방금 한 제안은, 성 안의 어두움과 차가움이 사르르 녹을 듯한 커다란 벽난로가 있는 방으로 인도받은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리고 그 크고 따뜻한 난로 앞에서 나만 홀로 불을 쬘 수 있는 그런 귀한 기회를 부여받은 느낌이었다.
“나야 좋지만, 가브리엘이 주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괜히 나 때문에 마음 쓰는 거 아니야? 나 괜찮아.”
“말이 며칠이지 내가 없는 시간 동안 바질이 힘들었을 거야. 이걸로 위로가 된다면 네게 주고 싶어. 그리고 브리스가 찾아오면 네가 아는 이야기를 하면 돼. 브리스가 한 이야기는 그대로 나한테 전하면 되고.”
“브리스가 다녀간 걸 알았어?”
'누가 말했지?'
“내가 아무 연락이 없는데 너무 당연한 거 아니야? 이렇게 뻔한걸 내가 몰랐을 거라고 생각했다니 서운한데 바질.”
“아.. 아니 난 그런 게 아니라.”
가브리엘이 알고 있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을 못했다. 그저 나 혼자 동동거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거 아니라도 괜찮고 바질, 맞아도 괜찮아. 토요일 저녁에 마음 편히 오페라에 갈 수 있도록 이번 주 급한 불은 금요일 오후까지 다 꺼 보도록 하자. 그리고 네 일을 전문적으로 한다는 것이 뭔지, 네 일이 뭔지는 이번 주말에 한번 생각해 보면 좋겠어. 대답은 다음 주에 해주어도 돼.”
“가브리엘 그러면 이제 일을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는 것이 너에게 좋을까?”
“오 이제야 제대로 된 질문이 나오는데 바질? 그거 네가 한번 생각해 볼래? 어떻게 하면 좋을지 우리가 어떤 식으로 일주일을 보내고 조직하고 관리하고 커뮤니케이션할지 생각해 보고 다음 주 팀 미팅 전에 이야기하자. 그때 바질이 의견 주면 나도 내 의견을 말할게.”
‘제대로 된 질문 아니라 가브리엘이 기다렸던 질문 아니야?’라는 생각에 웃음이 피식 났다.
“당분간은 바질이 팀을 전담하는 상황이 될 것 같네. 나는 너도 알다시피 건강 때문에 휴식이 조금 필요하거든. 언제까지 이렇게 있을지, 앞으로 어떻게 될지가 네가 가장 알고 싶은 것이겠지만, 나 역시도 지금은 어떻다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어서. 다음 주에 네 생각과 계획을 공유해 주면 나도 어디까지 해 볼 수 있는지 말해줄게. 같이 논의하는 시간 되었으면 좋겠어.”
별 큰 내용이 없어 보이는 가브리엘의 말이지만, 나도 모르게 마음이 놓였다. 꺼슬꺼슬한 밀크티를 다시 입에 머금어도 왠지 걸림이 없이 넘어가는 느낌이었다.
“가브리엘, 난 나중에 너 같은 파트너가 되고 싶어.”
**이 작품에서 등장한 모든 인물과 사건들은 허구입니다. 실존하는 인물, 장소, 건물, 제품과는 일절 관련이 없습니다.** 소설. 이제 꺼져 몰리토, 자책과 두려움
[글쓴이의 말: 고난과 기회가 헷갈릴 때 그때, 누군가 또는 무엇인가로 인해 불안이 기대로 교차되는 경험이 있었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