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질 이야기 4. 남의 불안에 쫓기던 바질의 최후
청소기 소리에 얀과 나는 각자의 사무실로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의견서를 작성 중이었는데 자꾸 얀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믿지 말라는 것이 무슨 뜻일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꽤 오랜 시간 한 문단을 가지고 썼다 고쳤다 계속 씨름했다.
‘어 벌써 5시가 다 돼 가네.’
쓰던 것은 접어두고 회의 준비를 시작했다. 클라이언트에게 보냈던 질문과 그 질문에 대한 답. 그 둘을 비교하여 제대로 답변 듣지 못한 것을 가브리엘에게 정리해서 보냈었다. 회의 중 어느 순서로 가브리엘이 진행하더라도 따라가며 놓치지 않도록 다시 형광펜으로 눈에 잘 띄게 표시해 놓는다. 정각 5시 접속한다. 당연히 클라이언트는 아직 접속하지 않았다. 가브리엘도 아직 접속 전이다.
5시 1분, 5시 2분, 5시 3분 혼자 화상 미팅룸에 있다.
“띵동”
가브리엘이 접속했다.
“바질, 와있었네.”
“응 가브리엘. 회의하기에 몸은 괜찮아?”
“오늘은 괜찮을 것 같아. 별 다른 문제는 없었어?”
“아… 내가 보낸 이메일들 봤어? 아직 네가 답을 주지 않은 것들은 어떻게 하지?”
“그건 그냥 놔둬. 우선 처리해야 할 일들부터 처리하고 나머지 내용들은 이따가 클라이언트 미팅 끝나고 우리끼리 잠깐 회의하자.”
“띵동.”
가브리엘이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클라이언트가 접속했다.
“굳 에프터눈 가브리엘. 파리는 오후죠? 우리는 이제 밤이 다됐어요.”
“안녕하세요 XX, XX에게는 늦은 시간인데 회의 제안해 주어서 고마워요.”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에 하는 거죠. 여기 우리 가족 변호사 YY가 함께 있어요.”
“안녕하세요 가브리엘 그리고 바질 맞죠?”
“네 맞습니다. 안녕하세요 XX, YY.”
회의는 늘 순조롭게 여유 있는 인사로 시작하지만 내용은 그다지 순조롭지 않았다. 가브리엘은 민감한 사안을 말할 때도 미소를 띠며 필요한 서류를 전달을 요청했다.
“우리에게 XX를 설명할 수 있는 자료가 많이 부족해요. 이대로라면 ZZ국가 행정당국을 설득시키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 질문지로 보냈던 내용 중에 11번 아넥스 좀 준비해 주면 어떨까요? YY, 가족 변호사라고 하셨으니 자료를 이미 많이 가지고 있을 것 같은데. XX, YY와 상의해서 전달해 주실 수 있을까요? 그것 없이는 여기에 있는 XX와 가족 소유의 건물들은 압류될 가능성도 충분히 있어서 말이죠.”
“가브리엘, 우리 집안이 왕족인데도 건물을 쉽게 압류할까요?”
“왕이나 왕족 이름으로 특권이 적용되는 계약이나 건물이 아니라, 아주 간접적으로 왕족의 재산과 관련 있는 경우라면 법집행이 일반 사건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은데요. 건물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저희한테 전달된 것이 없습니다. 정보를 알려주시면 한번 알아볼 수 있을 것 같네요.”
질문한 내용은 답도 안 하고 달라는 자료도 안주는 클라이언트. 어떻게 반론을 준비해야 할지 막막한 이 시점에 클라이언트는 일을 해결할 생각은 않고 행정당국이 어떻게 나올 것인가를 상상하며 불안해하거나 불안을 늘어놓거나 회의 내내 그것만 반복했다.
“XX, 우리는 지금 XX를 도와주기 위해 여기 있어요. 오늘 미팅은 가장 효율적으로 도울 수 있는 방법을 같이 논의하기 위해서 가능한 옵션을 다 제시하고 있습니다. 알고 계시리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XX가 그 제안들을 실행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하지 않으면, 우리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답니다. XX가 그런 자료를 제공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하시는데, 그렇다면 XX가 지금 걱정하는 일들이 모두 일어날 만한 리스크가 충분히 있다고 봅니다. 가족변호사이신 YY의 생각도 들어보고 싶은데 두 분이서 먼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더 좋겠죠?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면 어떨까요? 두 분이 함께 논의해 보고 다음 주쯤에 다시 미팅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괜찮으신가요?”
‘아 해방이다.’
질문 정리해 놓은 것의 반의 반도 못 왔다. 드디어 클라이언트와 클라이언트의 가족 변호사는 화상채팅 방을 나가고 나와 가브리엘만 남았다.
“가브리엘, 정말 너는 인내심이 굉장한 것 같아. 나라면 아까 그렇게 말 못 했을 거야.”
“그래? 어떤 부분이 그랬지 바질?”
“우리가 준비한 것을 클라이언트가 다 쓸모없게 만들었잖아.”
“아니야, 다시 필요할 거야. 준비한 것 잘 정리해 놔. 갑자기 그렇게 하자고 할 가능성이 커.”
“그걸 어떻게 알아?”
분명 아까 원점으로 돌아갔는데 잘 정리해 놓으라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오늘은 아무것도 제출하지 않고 방법이 없나 우리를 찔러본 거야.”
“자기 변호사인데 우리를 찔러본다고?”
“그러더라. 많은 클라이언트가 우리를 가장 많이 의심하고 경계하더라 신기하게도.”
“너무 쓸데없는 일 아니야? 뭐 하러 우리가 자기들이랑 실랑이를 해. 원하는 거 다 들어주고 싶지. 안되니까 안된다고 하는 건데.”
“바질, 네 말이 맞아. 그렇지만 사람들은 시간이 필요해 생각할 시간. 고민을 이야기하며 그 시간을 같이 보내주는 거야. 그리고 그 시간도 고객이 지불하잖아. 그것도 우리 일인거지.”
“가브리엘 네 말은 맞는데. 고객이 너무 몰라주니까.” 나도 모르게 입이 삐죽거렸다.
“바질, 실망했어? 종종 있는 일이야. 처음도 아닐텐데. 계속 같이 일하다 보면 신뢰가 생길 거고 그러면 제안한 것에서 진행이 될 거야. 그러다가 또 의심할 수도 있고 그 묶이고 섞이는 부분을 풀어가면서 일하면 돼. 아참, 근데 아까 내가 이메일 답 해야 하는 것이 있어?”
“아니, 기한이 급한 것은 아닌데 자꾸 어떻게 되었냐고 물어보아서.”
“그런 질문을 네가 꼭 답을 해야 할 이유가 있어?”
“어... 어? 질문했으니까 기다릴 테고 답해줘야 하는 것 아닐까?”
'질문에 대답을 하는 것이 내 선택이라고?' 가브리엘의 말에 마음에서 의문이 일어났다. 한 번도 나는 생각해 보지 못한 방향이다.
“그러면 너한테 질문할 때마다 바질 너는 다 대답할 거야 매번? 누군가는 불안해서 30분에 한 번씩 찾아오면 그때마다 대답을 해줄 거고?”
“그런 건 아닌데. 오늘 벌써 두 번 찾아온 팀도 있고 해서.”
“그렇구나. 그런데 우리 일 자체가 많지?”
“그런 편이지.”
“그런데 일도 많고 커뮤니케이션도 어떤 사람이 특별히 불안해해서 두 번 세 번씩 해야 한다면, 이 일을 우리가 다 할 수 있을까?”
“그러면 안 되겠지. 그렇지만 아까 가브리엘, 네가 그랬잖아. 같이 일하면서 신뢰가 쌓이고 그 시간도 클라이언트가 지불하는 시간이니까.”
“응 근데 어느 정도 구분을 해야 하지 않을까? 아까는 우리가 클라이언트의 불안을 한번 들어주는 미팅이었던 거야. 그래서 들어주었지. 그런데 우리가 그 불안을 해결하려고 했어?"
"그건 아니지. 그 불안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 방법을 제시했지만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지."
"그래, 그럼 네 시간을 침범하고 30분마다 찾아오는 사람의 불안은 네가 해결해 주어야 하는 것일까? 급한 일도 아닌데 오전 오후 찾아오며 계속 너를 졸라댄다면 그건 그 사람의 문제이지 바질 네가 해결해 주어야 하는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
“그렇긴 하지만 우리 일은 내가 결정할 수 없으니까. 가브리엘 너에게 물어보아야 할 문제이기도 하고...”
'이렇게 말하면 안 되는데. 왜 내가 이런 말을 하고 있지. 너무 변명 같은데.' 가브리엘 말이 맞는 것 같은데 나도 모르게 막 나오는 말이 나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바질, 누가 너를 30분마다 찾아오고 오전 오후 찾아오면 그걸 나한테 물어본다고?” 가브리엘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 아니 그거야 내가 그에 대한 대답을 내가 할 수 없는 입장이니까.”
'아 이젠 말까지 더듬네. 그냥 하지 말라면 알겠다 할걸. 왜 또 자꾸 대꾸하지 나는.'
가브리엘은 숨을 가다듬는 듯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말했다.
“그래? 너는 내가 대답이 없다는 것은 알잖아.”
“그렇지. 그런데 매번 답이 없다고 대답을 해줘야 하면 어떻게 해. 거긴 기다리는데.”
“애초에 왜 기다리지? 기한이 많이 남았는데. 그리고 ‘가브리엘이 답이 없다.’라는 답을 네가 주었잖아. 그걸로 된 거야. 그 뒤는 네가 책임지지 않아도 돼. 어차피 책임은 내 일이야 바질.”
점점 눈이 동그랗게 커지며 입도 조금씩 커지던 내 모습을 보며 가브리엘이 말한다.
“바질, 너는 네가 알고 있는 것만 이야기하면 돼. 다른 사람의 불안을 해결해주려고 할 필요 없어. 자꾸 널 찾아오는 것은 그 사람의 불안이지 너의 불안이 아니야. 그리고 대답해 주어 그 순간이 종료되어도 그 사람은 너를 계속 그런 식으로 흔들 거야. 다음 불안이 또 생기면 말이지. 네가 그 사람의 불안을 임시적으로 해결해 줄 수는 있어도 그 사람은 각 단계마다 계속 불안할 거고 너를 계속 그렇게 흔들어 댈 거야. 그래서 네가 답을 바로 줄 수 없으면 각 단계마다 너도 같이 불안해질 거야. 네가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는 일이잖아. 결국 남의 불안을 잠시 빨리 해결해 준다 해도 너는 편안해질 수 없어.”
가브리엘이 머리카락을 넘기며 얼굴을 옆으로 돌리고는 다시 이어 말한다.
"대답해야 하는 일은 다 대답했고 다른 일은 아직 기한도 있고 기다려도 되는 일이야. 그 판단은 내가 해. 내 일은 내가 판단하지 남이 하는 것이 아니야. 내가 기업파트 파트너잖아. 그 책임도 내가 지는 거야. 너를 재촉하고 닦달하는 다른 팀이나 클라이언트에 휘둘리지 말고 네 일부터 하면 돼. BB일 관련해서 의견서 다 썼어? 그거 다음 주 월요일까지 나가야 하는 거 알지?”
“아 그거 쓰고 있었어. 쓰고 있었는데...”
'아 그럴 줄 알았어. 아까 끝냈어야 했는데. 이럴 줄 알았어.'
**이 작품에서 등장한 모든 인물과 사건들은 허구입니다. 실존하는 인물, 장소, 건물, 제품과는 일절 관련이 없습니다.** 소설. 이제 꺼져 몰리토, 자책과 두려움
[글쓴이의 말: 바질이 갈길이 멀어요. 그래도 같이 가주실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