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질 이야기 3. 브리스가 뿌린 불안 정면으로 마주하다.
“간. 접. 화. 법. 이라니?” (지난 화 마지막 부분)
만지작 거리던 커피잔도 그대로 놓고 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바질 네가 브리스의 말을 듣고 뭔가 이상한 점을 느꼈지. 그럼 그걸 가브리엘에게 말한다고 쳐봐.”
“음… 그게 뭐 어때서?”
“바질, 일단 정글에 온 것을 환영해.”
로펌에 처음 들어왔을 때 한 선배가 해주었던 다소 식상한 환영 인사를 얀이 똑같이 말했다. 단단한 얀의 체형을 그대로 드러내 주는 실크가 섞인 그의 수트처럼, 얀의 단단한 내용의 말이 부드럽고 다정한 말투에 잘 녹아들어 있었다.
‘무슨 정글이라는 거지. 겨우 말 몇 마디 때문에?’
웃으며 말하는 얀을 갸우뚱 대며 바라보았다.
“브리스의 말은 계산 없이 나오는 법이 없어. 오늘 이따가 가브리엘과 통화한다고 했지? 그럼 그때 ‘브리스가 가브리엘이 없어서 힘들지 않냐고 해서 그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고. 그래서 브리스에게 가브리엘 더 이상 안 나오냐고 되물었더니, 브리스는 모른다고 대답하던데.’라고 한다면?”
“아마도 가브리엘이 더 이상 회사에 안 나올 생각이 아니라면, 그게 무슨 소리냐고 그럴 것 같은데.”
“그렇지. 가브리엘은 그렇게 나오겠지. 그리고 자기가 앞으로 어떻게 하려고 했는지 너에게 말하겠지. 그러면 어떻게 돼?”
“뭐가 어떻게 돼?”
“네가 가브리엘의 말을 들은 후에 브리스가 찾아오면, 너는 가브리엘이 말한 내용을 전달하겠지.”
“그렇겠지. 아마도. 그리고 어쩌면 가브리엘이 직접 브리스한테 연락할지도 몰라. 브리스가 한 말이 무슨 말인가 싶어서.”
“그래 바로 그거야. 브리스는 지금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상황이니까, 너에게 말을 걸어서 가브리엘에게 빨리 연락해보게 하려는 거지. 아프다는데 자기가 직접 연락해서 어쩌고 저쩌고 물어보는 것도 파트너 이사회 귀에 들어가면 안 좋게 보일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너한테 간접적으로 시키는 것이기도 하고, 현재까지 자기한테 연락 없는 가브리엘에게 어떤 상황인지 알리라고 너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압박을 넣는 거지. 이게 바로 브리스의 그 유명한 간접화법이라는 거.”
“와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야? 가브리엘 세 번 쓰러졌어. 브리스도 알고 있는 일 아니야? 그리고 겨우 3일 회사 안 나온 거야.”
“브리스도 그건 알지. 그러니까 빨리 결정하라는 거야.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너무한 거 아니야? 지금 어디가 아픈지도 모르는 사람한테. 계속 일만 했는데 회사 때문에 일하다가 이렇게 된 건데. 이게 뭐야.”
“너무하지 가브리엘한테. 그런데 브리스한테는 너무한 일 아니니까. 브리스 자기가 아픈 거 아니니까. 아픈 건 가브리엘 일이고 브리스에게는 어떻게 된 건지 아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니까. 그런데 티 나게 물어보면 분위기상 도덕적 윤리적 지탄을 받을 수 있으니까. 이렇게 간접적으로 바질 네가 움직이도록 자신의 화법을 자연스럽게 활용하는 거지.”
갑자기 탕비실 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둘이서 약속이나 한 듯 대화를 멈춘다. 그러다 청소기 소리가 나자 얀이 문 쪽을 한번 바라 보고는 다시 이어 말한다.
“그리고 아까 브리스가 질문 하나로 바질 너한테 ‘가브리엘이 어쩌면 안 나올 수도 있나?’라는 생각을 하도록 만들었잖아. 팀에 분열이 가능하도록 브리스가 불씨를 지펴 놓는 거지. 그렇게 해야 만일 해체가 필요할 경우, 해체도 쉬워지니까.”
눈썹을 치켜올리며 얀이 말한다.
“아무렴 그렇게까지 할까?”
들고 있던 커피를 잔 받침에 무심코 내려놓다가 쨍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렇게까지 한 건지 안 한 건지는 앞으로 차차 알게 될 거야.”
얀이 움직일 때마다 늘 은은히 풍겨오는 우디 계열의 향이 차가운 공기를 만날 때만큼이나 시크한 말투로 대답했다.
예전에 학부에서 법 철학이라는 교양 과목을 들은 적이 있다. 시험 문제가 정말 까다로웠다. 수업은 유서 깊은 앙피떼아트르 (amphithéâtre. 대강당 강의실)에서 아름답고 교양 있게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시험은 그리 아름답지 못했다.
지금 느낌은, 그 교양 과목의 오럴 테스트(구두시험)를 마치고 집에 와서 답안을 확인하는 느낌과 비슷하다. 시험 중 교수님의 찝찝했던 질문이 함정이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의 그 느낌, 그때 느꼈던 것과 비슷한 것이 내 마음속에서 만져졌다. 브리스 말의 찝찝한 내용을 지금 얀과 확인한 이 순간에 말이다.
손목의 시계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러다 고개를 똑바로 세우고 다시 말을 꺼냈다.
“얀, 그러면 내가 브리스에게 잘못 대답한 거 아니야?”
“아냐, 너는 오히려 되물었잖아 가브리엘 다시 안 오냐고. 그럼 너는 적어도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고 말한 거지. 가브리엘이 다시 돌아올 거라고 생각하는 거니까, 너는 가브리엘과 무언가 꾸미고 있는 것은 아니다는 , 의미의 무죄 추정을 오히려 유도한 거지.”
“내가 유도한 건 아닌데. 근데 무언가 꾸미고 있다니?”
“모르지. 가브리엘과 같이 떠날 것을 공모하던지, 뭐 그런 가능성.”
“아니 가브리엘이 아프다잖아. 그런데 무슨 공모가 지금 가능하냐고.”
“그렇게 같이 나간 팀 있잖아 저번 노동팀.”
“아 그래 얀 네 말이 맞네.”
“응, 여긴 아무도 믿으면 안 돼. 아까 말했잖아, 정글이라고.”
“아무도 믿지 못하는 곳에 있는 것은 너무 불안한 환경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면서 불안하게 지낼 수도 있는데 아닐 수도 있어.”
“그건 또 무슨 말이야?”
“믿는다는 것이 뭐라고 생각해?”
“아니 뭐 내 뜻을 알아주고 서로 진심으로 이야기할 수 있고 그럴 때 할 수 있는 것이지.”
“그런데 만일 서로 진심이라고 하는 것이 다르다면, 그리고 다른 진심을 인정해 버린다면? 서로에게 중요한 것이 다르잖아. 아까도 가브리엘과 브리스는 서로 중요한 것이 다르고 말이야. 그냥 있는 그대로를 보는 거지. 지금 여기서는 혼자서 어떠한 기대를 갖고 그대로 믿어버리는 것은 조금 위험한 발상인 것 같아.”
“아무리 그래도… 브리스는 좀 과한 것 같은데.”
“그렇게 볼 수 있어. 나도 지금은 그렇게 생각해. 그런데, 그냥 브리스에게 중요한 것이 다른 것이라고 인정해 버리는 순간 브리스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아? 브리스도 이 회사 매니징 파트너인데 그대로 기다릴 수만은 없잖아. 가브리엘과 관련해서 결정해야 하는 일이 많을 수도 있고.”
“뭐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네.”
“응, 정글에서처럼 각자가 필요한 것과 중요한 것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바로 이곳의 생리라고 받아들여봐. 그럼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도 쉽게 알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믿는다는 것, 그냥 믿어 버리고 싶은 마음은, 네 마음이 편하고 싶은 마음에서 생긴 발상은 아닌지 한번 생각해 봐. 그냥 이곳이 그렇게 쉽게 믿어버릴 수 있는 곳이 아니며, 원래부터 편할 수 없는 곳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완전히 인지하고 받아들이고 나면 괜찮아질 거야. 그리고 거기에 맞게 대응할 방법도 생길 거야. 그렇게 식상한 정글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식상하지 않게 파악해 나가는 거지."
처음 로펌에 취직했을 때, "정글에 온 것을 환영해."라고 들은 말이 지금 얀의 설명을 모두 담은 함축적인 안내였던 것 같다. 그때는 일일이 설명해줘 봤자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기에, 부디 미리 주의하기를 바라는 마음. 나를 지켜보던 선배의 그 바램을 담아 건넨 한 문장, 다정한 환영이자 경고의 메세지 말이다.
“얀, 그런데 아무도 믿지 말라면서 이런 이야기를 다 해주는 건 또 뭐야?”
“나도 믿지 마.”
“뭐?”
“하하. 지금은 내가 이렇게 말해도 어떤 날은 내가 중요한 것과 네가 중요한 것이 다를 수도 있잖아.”
얀의 말에 내 눈꺼풀이 떨리기 시작했다.
“바질, 반은 농담이고 반은 진심이야.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다 알려줄 테니 언제든 나를 찾아와. 지금 너를 도와줄 사람도 없잖아. 내가 도와주고 싶어. 그렇지만 언젠가는 나도 너를 도울 수 없는 날이 올지도 모르지. 그래도 지금은 우리 어쏘끼리 뭉치지 않으면 여기서 살아남기 힘드니까 할 수 있는 것을 같이 해보자.”
청소기 소리가 밖에서 간간이 들리더니 청소를 도와주시는 분이 들어왔다. 열린 문틈으로 바람이 들어와서인지, 오늘따라 얀의 우디계열 향수가 더 묵직하면서도 시크하게 느껴지는 듯했다.
**이 작품에서 등장한 모든 인물과 사건들은 허구입니다. 실존하는 인물, 장소, 건물, 제품과는 일절 관련이 없습니다.** 소설. 이제 꺼져 몰리토, 자책과 두려움
[글쓴이의 말: 여긴 감기인지 독감인지 바이러스가 대유행입니다. 모두 건강한 겨울을 보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