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밍웨이 바에서 꺼낸, 전쟁 속 9살 아이의 생존 기억

바질 이야기 8. 리츠 호텔의 위스키, 그리고 9살의 옷장

by 마누아 브르통

1. 파리 오페라 가르니에에서 깨어난 9살의 전쟁의 기억


중간 휴식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오페라도 순식간에 지나가버렸다.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말소리는 노르망디 바다 절벽에 부딪히는 세찬 바람같이 귀를 압박했다. 바다의 밀물에 밀리듯 사람들 오페라 밖으로 밀려 나갈 때 나도 같이 밀려 나왔다. 어쩌다 보니 오페라 가르니에 앞 계단에 서있었다. 멍했다. 시간이 어떻게 이렇게 빨리 간 것인지 이상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얀이나 브리스가 신경이 쓰인다거나 무슨 생각이 든다기보다는 몸이 피곤해진 기분이었다. 아무리 좋은 좌석에 앉아 오페라를 관람했다 하더라도 몇 시간 동안 몸을 구겨 넣고 앉아 구경하려니 좀 찌뿌둥했던 것 같다.


‘맞다. 띠에리가 있었지.’

내 옆에 같이 걷고 있는 띠에리의 존재도 잊고 있었다.


“띠에리, 나 오늘 애들이랑 모이는 건 좀 어려울 것 같아. 그냥 집에 가려고.”

“그래 아까 오페라 시작 전에 너무 안좋아보였어. 들어가서 쉬는 것도 좋을 것 같네. 근데 아까 네가 애들한테 연락한 다했었잖아. 누가 온대?”

“아 맞다. 까먹고 연락 안 했네.”


정말 내 일을 어떻게 하고 사는지 나도 궁금하다. 내 직업적인 일 외에는 잊어버리는 게 요새 너무 많다.

여하튼 연락을 하지 않아서 아무도 못 온다는 사실을 안 순간 마음이 다시 편해졌다.

그래서 띠에리에게 둘이서 한잔만 더 하자고 권했다.


“방금 들어가겠다면서. 괜찮겠어?”

“아 그냥 다 모이는 자리에서 멍하니 있고 싶지는 않았거든. 둘이 이야기할 수 있으면 난 더 좋을 것 같아서. 너만 괜찮으면 말이지.”

“아까 하던 이야기? 회사 이야기구나.”


오페라에서 터덜터덜 리츠까지 걸어갔다. 헤밍웨이는 우리가 평소에 자주 가는 곳은 아니다. 그렇지만 오페라 가르니에 근처에서 토요일 저녁 편히 이야기 나눌 만한 장소가 딱히 없었다. 너무 시끄러운 음악이나 많은 사람들의 방해 없는 곳이 리츠호텔 헤밍웨이 바 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남자 둘이 맥주도 아니고 칵테일이 주종인 바에 간다는 게 좀 어색하기도 했지만 칵테일만 안 마시면 되지 하는 생각이었다.


평일이라면 퇴근하는 시간쯤이다. 토요일인데 같은 시간에 같은 동네를 걷고 있었다.


“바질, 가서 뭐 마실 거야?”

“나는 모르겠는데. 워낙 비싸니까 양 많은 거?”

“하하 네 말이 맞네.”


도착해서 자리 잡고 주문했다. 고급스럽고 고풍스러운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공기가 무겁게 느껴졌다. 주위를 둘러보니 바로 뒤의 자리에서 사업을 심각하게 논의 중인 것 같은 아저씨 두 분을 제외하고는, 우리 같은 남자 둘 구성은 보이지 않았다.


“남자 둘은 잘 없네.”

“이 시간에 남자 둘이 칵테일 바를 돌아다니는 게 흔치 않은 구성이긴 하지.”

“그래도 오페라에서 바로 와서 지금 우리 옷차림은 여기 바 분위기와 어울리는 것 같아.”

“평소대로 운동복 입고는 못 들어올 것 같긴 하다.”

이것저것 다양한 주제를 넘나들며 말 안 되는 말을 주고받고, 평소처럼 띠에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 띠에리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바질, 아까 있잖아. 나 좀 놀랬어. 평소에도 가끔 그런 일이 있었어?”

“아냐 처음 있는 일이었어. 나도 놀랬어.”


그 순간 예전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생각이 없어도 행복해야 했을 시절의 기억이었다. 하지만 그 시절은 나에게 행복보다는 불안이 함께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투스텝으로 뛰어다니던 작은 아이가 길가에서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안돼. 기쁘면 안 돼. 기쁘면 다시 꼭 힘들고 어려운 일이 찾아올 거야.’


그때가 고작 9살이었다. 해가 빛나는 것도 따뜻했던 날도 아니었지만 너무도 신나고 기분이 좋았던 아이는 행복한 순간이 마냥 불안하게만 느껴졌다.


“띠에리 혹시 기억나? 예전에 어릴 때 내가 부모님 따라 살던 나라에서 내전이 일어났던 거.”

“어 기억나. 너 그러고 다시 여기로 한참 오지도 못했잖아. 비행기가 없다면서.”


“나는 그 천둥 같던 소리와 굉음들이 모든 것을 앗아가던 상황을 눈앞에서 보고 있었잖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거든. 그런데 언제 그런 일이 일어날지 무슨 일을 겪게 될지 모른다는 것이 많이 힘들었던 것 같아.”

“당연하지 전쟁이 힘들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어. 게다가 어린아이들한테는 더 무서운 상황이었겠지.”


“응 그런데 그때 부모님과도 떨어져 있었거든. 부모님이 병원에서 집에 오시는 길 마저 파괴되어서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었거든. 이웃집 주민 분들이 가끔 오셔서 우리를 돌봐주시긴 했지만, 하루의 대부분을 나랑 내 동생 레아는 옷장에 숨어있었어. 이웃 분이 오시면 잠깐 옷장에서 나가 밥을 먹고는 또 옷장으로 숨고 그랬거든.”

옷장에 숨어 지내던 예전 기억을 떠올리니 한숨이 났다.


“무장한 군인들이 집 근처로 올까 봐 우리를 잡으러 올까 봐 무슨 소리만 나면 심장이 내 몸을 뚫고 나가는 것만 같았어. 레아랑 나는 너무 무서워서 하루의 대부분을 잠이 들어 지냈어.


무서운데 잠들었다고?


“응 해보지 않으면 모를 거야. 우리는 잠드는 게 더 편했거든. 그래서 그 옷장에서 계속 잠만 잤어. 최대한 나가지 않았어.”


“아 정말? 너 이 이야기 처음하는 것 같아.”

이야기를 듣던 띠에리가 심각한 표정을 하고는 나를 쳐다보았다.


전쟁 중에 옷장에 잠들어있는 9살 아동은 규정상 그릴 수 없다는 제미나이와 합의한 결과


“그런가? 아무튼 그렇게 자고 있는데, 이웃 주민 분이 오실 시간이 아닌데 누가 막 우리를 흔들어 깨우는 거야. 잠들어 있는 레아랑 나를.”

“헉 뭐야. 누가? 누가 깨운 거였어?”


“누구긴 다행히 부모님이 무너진 길을 뚫고 우리를 찾아오신 거였어. 그런데 오히려 그 순간이 너무 무서웠어. 레아도 나와 같았나 봐 그래서 막 울더라고. 누군가 올 시간이 아닌데 와서 흔들어 깨우니까. 뭐 그래도 다행히 우리가 죽는 상황은 아니었던 거지.”

내 말을 곰곰이 듣고 있던 띠에리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되물었다.


단순히 죽는 상황이 아니었다고 생각한 거야? 부모님이 오셔서 안심되었던 것이 아니라?

“음.. 그게 며칠이었는지 몇 주였는지 정확히 기억이 안 나. 근데 그 기간 동안 레아랑 나랑 너무 오래 두려웠으니까. 부모님이 오셨는데도 실감도 안 나고 안심이 되는 것도 아니더라고.”


“바질 너 상담받아본 적 있어?”

“아니 없는데.”

“전쟁을 겪고도 상담을 안 받았다고?”

“응 우리 가족 모두 겪은 일이고, 모두 살아있으니까. 상담이 굳이 필요할까.”

2. 두려움의 뿌리와 마주해 볼까


리츠 헤밍웨이 바 그려달라니 제미나이가 아예 글로 써줌


주문했던 위스키를 한입 머금었다. 처음 한입은 너무 알코올이 세다고만 생각했는데 다시 마셔보니 왠지 모를 단맛과 풍부한 나무와 연한 과일향 같은 것이 입과 코에 머물러 있었다. 그 9살 때 전쟁의 기억도 마시고 난 뒤 약하게 남아있는 맛과 향 같은 것 정도로 생각하고 싶었는데, 그것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었나 보다.


“그냥 단순한 후유증이나 경험이라고 생각했어. 지나온 과거이기도 하고 잘 살아 돌아온 증거 같이 느껴졌어.”

“바질, 그럼 혹시 아까 오페라에서 상황이 그때 그 전쟁 상황과 비슷하게 느껴졌던 거야?”


“모르겠어. 오페라 의자에 몸을 웅크리며 숨는데, 9살 때 전쟁 통에 숨었던 옷장 속 같은 느낌은 있었어. 그저 무력하게 잠들고 싶은 상황 있잖아. 어떤 것에도 보호받지 못하는 상황. 뭐 그래서 정신을 잃을 뻔한 걸까.”


칵테일은 너무 여성스러운 음료라며 안 마시겠다더니 주변 테이블에서 마시는 것을 보고 같은 것을 주문했던 띠에리. 음료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나는 네가 그런 것을 다 안고 사는지 몰랐어. 그때 전쟁 나서 돌아왔다는 것만 알았지 그런 것들을 겪은 지도 몰랐지. 나에게 네 이야기를 말해주어서 고마워 바질.”


“그냥 난 다 지나간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아닌가 봐.”

“그렇구나. 그런데 바질, 너는 더 이상 그때의 9살 아이도 아니고, 전쟁을 겪고 있는 것은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

“어떤 상황에 처했을 때 어느 정도의 상황인지도 가늠하고, 이제는 9살 어린아이가 아니라 네가 극복할 수 있다는 것도 알면 좋을 것 같은데. 상담을 한번 받아보고 네가 마주 못했던 이야기들을 마주 해보는 건 어때?”


“상담을?”

“응 봐봐 오늘 오페라에서 일은 전쟁은 확실히 아니잖아. 네가 적으로 알고 있는 두 동료가 같이 오페라에 온 것을 목격한 건데. 네가 그때 그 9살 전쟁 상황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건 아닌가 해서. 이제 네가 아무것도 못할 전쟁 상황도 아니고, 아무것도 못하는 어린아이도 아닌데 아직 거기에 머물러 있을 필요도 없고 말이지.”

“그러게 띠에리 네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해.”


“나는 상담가가 아니니까 더는 모르겠어. 그리고 네가 지금 겪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정확히는 난 몰라. 하지만 하나는 분명한 것 같아. 네 이야기를 한번 꺼내 놓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그리고 지금 일어나는 일들을 좀 다르게 볼 수 있는 네 마음의 눈이 길러진다면 나는 네가 지금 겪고 있는 것들을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과연 그럴까?”


“그럼, 너는 그 전쟁에서 살아 돌아왔어. 동생도 지켰고. 오늘도 살아냈고 지금 멋진 사회인으로서 일하고 있고 나랑 오페라도 보고 오전에는 운동도 했어. 인생을 얼마나 멋지게 잘 살고 있냐.


“네가 몰라서 그래. 회사에서 내가 어땠는지.”

“그건 네가 모르는 거 아닐까? 어느 상사가 오페라 티켓을 이렇게 두 장이나 옵티마 좌석으로 주냐? 나는 이런 거 받아본 적이 없어.”


“나를 위로하려고 하는 말이야?”

“바질, 내가 무슨 말을 하건 무슨 의도이건 중요한 건 너인 것 같아. 언제든 위로의 말을 건넬 수 있는 이 친구 띠에리라는 자산이 있는 바질이라는 사람이 너잖아. 그리고 나뿐 아니야. 오늘 네가 연락하는 것을 잊어서 못 왔지만, 다른 애들도 나왔으면 지금 이 이야기를 듣고 나보다 더하면 더 그랬지 덜하지 않았을 거야.”


“좀 오글거린다.”

“원래 이런 류의 이야기는 그런 느낌이 좀 있어야 해.”


“그건 그렇고, 띠에리 넌 상담받아봤어?”

띠에리가 상담이라는 말을 꺼내자 상담이라는 것은 어떻게 하는지 나도 받을만한 것인지 새삼 궁금해졌다.


“당연하지 고등학교 때 성적은 너무 안 오고, 프로 준비를 계속해야 할지 공부를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 많이 했거든. 그때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니 머리가 자꾸 빠지더라고. 그래서 아버지가 신청해 주셔서 상담받아봤지.”


“도움이 됐어?”

“음 나는 그냥 속에 있는 이야기를 다 한 기분이었어. 계속 듣고만 계시더라고 상담가 분이. 아무 말씀을 안 하셔.”


“그런데 그게 도움이 돼?”

“응 다 이야기하고 나니까 뭔가 나도 모르게 일정 부분 해결이 된 것 같았어. 네 일이니까 내가 뭐라고 할 순 없는데 이런 방법도 있다는 걸 말해주는 거야. 나는 그걸로 도움을 받았으니까.”


“아 혹시 그때 다이어트 상담도 받았어? 너 고등학교 때 살 엄청 쪘다가 다시 날씬해졌었잖아.”
“야 진짜 별 걸 다 기억하네.”


괜히 나의 깊숙한 곳에 숨겨 놓았던 이야기를 꺼내서 띠에리의 평안한 주말 저녁을 방해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고등학교 때 일을 말하며 가벼운 주제로 옮겨 가려했다. 그런데 띠에리는 눈치가 빨라 내 생각을 알고 있는 듯했다.


“바질, 이야기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말해. 오늘 너 덕에 너무 재밌는 오페라 봤고 네 이야기도 들을 수 있어서 나는 오늘 하루가 진짜 감사하다야. 그리고 알렉상드르, 앙드레, 아나엘 여기에 없어도 우리 친구들 모두 나와 한마음일 거야.”



**이 작품에서 등장한 모든 인물과 사건들은 허구입니다. 실존하는 인물, 장소, 건물, 제품과는 일절 관련이 없습니다.** 소설. 이제 꺼져 몰리토, 자책과 두려움


[글쓴이의 말: 이번화는 예고 없이 며칠 일찍 올려보았어요. 서프라이즈.]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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